소설리스트

5화 (6/55)

* * *

토요일은 아침부터 날씨가 무척 맑았다.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얼굴에 바르고 있던 팩을 어푸어푸 씻어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만, 어차피 만나게 된 거라면 목줄 묶여 끌려가는 소처럼 죽상을 하고 앉아 있긴 싫었다. 명목상이지만 데이트기도 했고.

주말에 이성과 만나는 게 하도 오랜만이라 옷을 고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6년 차 회사원인 탓에 옷장에 걸린 옷은 죄다 오피스룩이었는데 휴일까지 그걸 입고 싶지는 않았다.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몸에 대보자 문득 십여 년 전 정헌과 처음 만났던 소개팅이 생각났다. 그때도 비슷한 원피스를 입었었지.

아.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고개를 내젓고 원피스를 다시 걸었다. 그때랑은 많이 달라졌을 거다. 그리고 어떻게든 거절하려고 했던 나랑은 달리 정말로 마음이 있는 여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연습까지 하는 거겠지. 그래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 봐야겠다.

준비를 끝내고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인 역 앞으로 도착하자 정면에 정헌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보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한 박사님.”

“오셨습니까.”

아. 그의 몸이 보인 순간 내 얼굴의 웃음이 급히 사라졌다. 정헌이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커다란 풀색 점퍼였는데 색상부터 디자인까지 너무 촌스러웠다. 요즘 스포츠 브랜드에서 괜찮은 것들도 많이 나오는데 어디서 저런 걸 샀지. 저건 점퍼라고 하는 것보다는 잠바때기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하하, 저희 오늘 등산 가요?”

농담처럼 얘기한 진담이었는데 정헌은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지만 아웃도어 활동을 하긴 할 겁니다.”

돌려 말했을 때 알아듣는 능력이 있다면 한정헌이 왜 한또이겠어. 하지만 저 옷을 입고 그 여자분을 만나러 나가면 안 될 텐데. 어떻게 좋게 말해줘야 할지 생각하던 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웃도어라고요? 어떤 건데….”

말끝이 흐려졌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온통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약속장소가 한강공원이 있는 역이었지.

나는 울상을 지으며 몸매가 살짝 드러나도록 입은 화사한 무늬의 맥시 원피스와 굽이 높은 누드톤 샌들을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일정으로는 자전거를 탈겁니다. 주중에는 주로 앉아서 일을 하니 주말에 하루 정도는 몸을 움직이는 게 건강에 좋을 겁니다.”

싫어요. 쉬는 날 운동 딱 싫어!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겠지만 오늘은 송다비가 아니라 초면의 소개팅녀 대행 자격으로 온 거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정헌의 뒤를 따라가다가 소심하게 반항해 보았다.

“음, 그런데 저 옷을 이렇게 입고 와서 바퀴 체인에 걸릴 것 같아요. 신발도 높고요. 아쉽지만 자전거는 다음 번 데이트 때 타면 어때요?”

“다음 데이트는 또 다른 플랜이 있습니다. 그리고 옷을 어떻게 입고 오실지 몰라서 제가 미리 운동복을 준비했습니다.”

와 정말 안 고마운 준비성이시다. 멀지 않은 주차장에 도착한 정헌은 자기 차의 뒷좌석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그 안에는 정갈하게 접혀 있는 운동복 상하의 세트와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아, 한정헌이 골랐구나…. 운동복은 내가 고등학생 때 입었던 진자주색으로 갑자기 향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색깔이었다. 운동화라도 사이즈가 안 맞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또 무슨 눈치로 때려 맞췄는지 정확하게 맞는 사이즈였다.

“갈아입고 오시죠.”

반항의 의지조차 상실한 난 터덜터덜 공중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머리 세팅을 공들여 하고 풀 메이크업까지 한 얼굴 아래로 촌티 나는 체육복을 걸치니 부조화의 극치였다

. 평상시에 취미로 필라테스를 하러갈 때도 백화점에서 제일 예쁜 요가복을 고르는 나였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꼴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데이트인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주말에 상사랑 등산 가는 시츄에이션이야?

“다 입었어요.”

“잘 어울리시네요.”

“그렇죠? 제가 뭐든 잘 어울려요.”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아쉬운 게 있는 사람은 나였다. 흡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정헌은 그 사이에 빌려왔는지 자전거 두 대를 차 옆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래 운동하면 살도 빠지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면서 그중 한 대의 핸들을 잡았다.

“잠깐만요. 아직 타지 마시죠.”

“네? 왜요?”

“그대로 타면 위험합니다. 보호 장비를 차야 안전하게 탈 수 있습니다.”

“아, 그런데 뭐 한강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요.”

“자전거 타다가 잘못 넘어지면 정말 크게 다칩니다. 자전거 사고도 갈수록 늘고 있는 추세구요. 자칫 머리라도 부딪쳤다가는 뇌진탕 등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게 설명하는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거면 애초에 왜 타자고 한 거래?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쨌든 보호대의 필요성을 이해한 내가 끄덕이자 정헌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를 열었다. 기껏해야 헬멧 정도나 무릎 보호대 정도를 떠올리면서 가까이 다가간 나는, 트렁크 안에서 튀어나온 물건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이게… 이게 뭐예요?”

트렁크 안에는 갑옷 같은 시커먼 보호대가 들어 있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입고 다닐 듯한, 혹은 테러 진압 팀이 입고 출동할 법한 장비였다. 아무리 넓게 쳐줘도 생존용 서바이벌 장비지, 자전거 보호대로 보이지 않았다. 정헌이 그걸 집어 들자 눈앞이 절로 캄캄해졌다.

“바디 아머입니다. 척추 부분과 목뼈 부분의 보호를 강화했죠. 하드 쉘 부분의 파손이 타사 것에 비해서 현저히 적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입어욧?!”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서 사고가 날 가능성이….”

“아니 무슨 산악자전거 타러 가는 것도 아니고 한강에서 타면서! 저기 어린 애들도 놀면서 타는 거 안 보이세요?”

“한국은 안전 불감증이 심각한 나라예요.”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이런 거 입고 다니면 다들 쳐다볼걸요!”

“그깟 시선이 본인의 몸보다 중요합니까?”

정헌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야 사회의 주류와 동떨어져서 사는 아웃사이더 인생이니까 신경 안 쓰겠지. 하지만 나는 남들이 쳐다보면 너무 창피하단 말이야! 도대체 이런 갑옷을 입고 어떻게 자전거를 타!

내가 여친 대행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다른 건 다 맞춰줘도 저건 안 되겠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 나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바디 아머인지 뭔지 그 진압용 장비처럼 생긴 것을 들고 정헌에게 내밀었다.

“그럼 어떻게 입는 건지 시범 좀 보여주세요.”

“아.”

내가 자포자기했다고 생각한 건지 정헌은 다행이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선뜻 받아들었다.

“보시면 가운데에는 지퍼가 있습니다. 가슴보호대와 복부의 벨트는 벨크로로 연결되어 있으니 팔을 먼저 꿴 후에 이 부분의 벨트를 조여서….”

“입고 천천히 오세요, 먼저 갈게요!”

정헌이 네? 하고 되묻기도 전에 나는 트렁크 안에 있는 헬멧을 꺼내 번개처럼 머리에 썼다. 그리고 곧바로 자전거에 올라타 재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헛발질을 한두 번 했지만 자전거는 순식간에 앞으로 굴러나갔다.

“송 대리님!”

당황스러워하는 정헌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를 악물고 페달을 굴렸다.

“잠깐 기다리세요!”

뒤에서 정헌이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을 안 한지 한참이라 금세 허벅지 근육이 소리를 질러대고 숨이 차올랐다. 한강에서 때 아닌 추격전을 벌이는 촌스러운 체육복 차림의 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렸다.

“송 대리님!”

“저 부르지 마세요!”

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빨리 쫓아온 거야? 시꺼먼 보호구를 입고 열정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정헌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적토마를 타고 적장의 머리를 베기 위해 달려오는 관우 같았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정헌이 큰 소리를 냈다. 그 기세에 눌려 나도 모르게 얼른 정면을 보았다.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것을 보니 위기감도 생기고 경쟁심도 발동해 더욱 멈출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다행히 정헌은 거기서 더 거리를 좁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달린 후에야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멈추지?

* * *

지하철로 따지면 세 정거장쯤을 그렇게 달리고 나서야 나는 허벅지 근육의 비명을 무시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척 자전거를 멈췄다. 머뭇거리며 뒤돌아섰을 때, 열심히 뒤쫓아 온 정헌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입을 다물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가는 길은 그렇다 쳐도 오는 길은 지쳐서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다. 나는 자전거 두 대를 끌고 앞서가는 정헌의 뒤에서 터덜터덜 걸었다.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데이트야, 차라리 주말 출근을 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네, 좀 고프네요.”

“식사할 곳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밥 얘기만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군침이 돌았다. 이 자전거 레이스가 내 입맛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면 성공한 전략이었다. 나는 보통의 소개팅처럼 맛있는 것을 먹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차를 마시는 그림을 기대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옷을 갈아입고 그가 안내하는 대로 차에 탔다. 하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내 예상과는 좀 달랐다.

“…여기 초밥집이예요?”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간판의 히라가나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했다.

“네, 오마카세 코스 요리만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미리 예약했습니다.”

“제가 사실 생선 종류를 먹다가 목에 심하게 가시가 박힌 적이 있어서 생선류를 못 먹거든요.”

“아….”

정헌은 잠시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여쭤봤어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제 탓이죠.”

“그러면 어디 다른 곳으로… 잠깐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정헌은 난색을 표하며 예약을 취소하고 나왔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그러고 나서도 그 앞에서 서성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잘못된 명령어를 받은 컴퓨터가 버벅이는 것처럼 얼떨결에 일식당 안을 한 번 더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이 주변은 거의 다 예약제인 곳이라 이 시간에 새로운 식당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난 다른 동네로 떠나기에는 이미 배가 너무 고팠다.

“혹시 분식도 괜찮으세요?”

나는 한 블록 옆에 있는 즉석떡볶이 맛집을 떠올렸다. 소개팅에서 떡볶이를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뭐 아무렴 어때 진짜 소개팅도 아닌데. 떡볶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고 고등학생 때는 하루에 한 번은 꼭 먹어주곤 했던 나의 소울 푸드였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뭐라도 먹어서 위장을 채우고 싶었다.

“네, 좋습니다.”

내 질문을 들은 정헌은 잠깐 시선이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이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지 메뉴판을 외우는 사람처럼 꼼꼼하게 보고 있기에 그냥 내가 알아서 시켜버렸다. 당면 사리에 치즈 떡 추가, 맵기 강도는 보통으로 무난하게. 떡볶이를 끓이기 시작하면서 얼음이 담긴 시원한 물을 마시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난데없는 운동을 했네요. 진짜로 소개팅하신다는 그분 말인데요, 그 여자분은 운동을 좋아하세요?”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사람이에요? 알려주시면 저도 참고하게요. 이왕 예행연습을 할 거면 타겟층의 특성을 알아야 성공 확률이 높아질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정헌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굉장히 좋습니다.”

“목소리요?”

호감을 가진 요소가 꽤 독특했다. 정헌은 청각에 예민한 축인가 보다. 목소리에 반했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아나운서처럼 조곤조곤하고 상냥한 목소리려나?

“그 밖에도 장점이 많습니다. 무척 미인이고 그래서 인기도 많지요.”

“그렇구나. 경쟁률이 높겠네요.”

“네. 그래서 이번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정헌이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조금 놀랐다.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였어? 남자들이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일직선으로 달려간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듣긴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한정헌의 변화는 놀라웠다.

그러는 동안 떡볶이가 끓기 시작했다. 난 입맛을 다시며 떡과 당면을 건져 앞 접시에 담았다. 매콤하고 말랑한 떡을 한 입 베어 물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매콤달콤한 떡볶이만한 것이 없다니까.

그런데 정헌은 난감해하며 냄비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려는지 국자를 들고 떡볶이를 퍼 담으려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맸다.

“잠깐만요 한 박사님, 국물을 그렇게 다 가져가시면 다 졸아붙는데. 당면부터 먼저 건져 드셔야죠.”

“…그런 겁니까?”

“혹시 떡볶이 처음 드시는 건 아니죠?”

“…….”

와, 정말인가 봐. 있는 집 자식이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세상에 지금까지 떡볶이를 못 먹고 산 사람이 있다니 정말 안타까웠다. 서툴게 만두를 하나 건져 접시에 담은 정헌은 포크로 만두를 쪼개더니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뭔가 잘못된 듯합니다. 안에 내용물이 거의 없는데요.”

“원래 그렇게 비어서 나오는 만두예요.”

“속이 비어 있으면 만두의 정의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정헌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는 수학문제를 앞에 둔 사람처럼 변했다. 난 답답해져서 만두를 먹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일단 드셔 보시기나 해요. 이렇게 떡볶이 국물에 푹 적셔서 먹는 거예요.”

정헌은 나를 따라 떡과 만두를 잘라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우물거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맛있죠? 내가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는데 갑자기 정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어쩔 줄을 모르며 벌떡 일어났다. 헉, 설마! 나는 순간 공포감에 휩싸여 두 손을 내저었다.

“잠깐, 잠깐만요! 일단 삼키세요! 제발 진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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