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인상적인 강직도
* * *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 좀 사 왔는데 드실래요?”
“안녕하세요, 송 대리님. 요즘 몸 안 좋으셨잖아요. 잘 쉬셨어요?”
“어머,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완전 괜찮아졌어요.”
동료들의 말에 의례적인 미소로 답하긴 했지만 몸 상태가 좋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다행히 한정헌의 모든 말은 진실이었나 보다. 일이 발발하고 거래를 주고받기로 한 이후로 아무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걸 보면. 어제는 마침내 안심하고 잠도 잘 잤다. 한층 밝아진 기분으로 책상 정리를 하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한 박사님 오셨어요?”
“네.”
“오늘 날씨 좋죠?”
“네.”
단답이었다. 하여간 사회성 떨어지긴.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설치게 만든, 그리고 어제는 꿀 같은 잠을 자게 만든 장본인 한정헌 박사가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을 멀찍이서 쳐다보았다.
컴퓨터의 부팅을 기다리고 있던 정헌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끗 눈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돌렸다.
“여러분, 아홉 시 삼십 분에 회의 있습니다.”
“네에.”
“민규 주임님, 회의 자료 출력 내가 했어요.”
“벌써요? 제가 하려고 했는데, 감사합니다.”
“저 진짜 좋은 선배죠? 고마우면 나중에 돈으로 주세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민규가 웃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스몰토크였다. 하지만 웃음을 만들었잖아? 아무것도 아닌 한 마디가 쉽게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 수 있다. 안 그래도 일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까지 딱딱하게 굴어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공장에서 샘플 납기일이 빠듯하다고 삼일 정도 늦춰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스케줄로 봐서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아뇨, 이번 툴로 계산한 값을 보면 불량이 생길 확률이 0.3% 이상 존재합니다. 샘플이 나와도 결함의 오차 범위를 줄일 실험이 필요하니 최종 시간은 맞춰야 합니다.”
“하지만… 0.3퍼센트 정도면 타사랑 비교해도 괜찮은 퍼센티지잖아요.”
“그래, 공장 사람들은 계속 같이 일할 사람들인데 좋게좋게 가자. 스케줄을 조율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검증된 결과가 있고 수정하면 오류를 줄일 수 있는데 왜 위험 부담을 무릅씁니까? 왜 그렇게 일하는지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
회의하던 팀원들이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논리적으로 검증한 값이 그렇다는데 태클을 걸 수도 없다. 하지만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의 반박도 이해가 되었다. 현장과의 의사소통은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으니까.
하다못해 부드럽게라도 말하면 좋을걸. 굳어 있는 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느끼지만 한정헌은 사회적인 언어에 정말 취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을 잘하면서도, 일을 ‘잘’ 한다는 평판이 돌지 않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구내식당으로 내려와 보니 이미 한정헌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었다. 나는 눈인사를 하면서 식판을 들고 비어 있는 자리에 끼어 앉았다.
“진짜 같이 일하기 제일 힘든 스타일.”
“맞는 말이라도 말을 꼭 그렇게 까칠하게 해야 되냐고요. 일하러 온 동료들끼리 좋게 말하면 어디가 덧나?”
“근데 또 윗선에서는 유능하다고 본다잖아요.”
“맡은 대로 오류 안 나게 처리하니 좋아하겠지. 같이 일하는 사람만 스트레스 받아서 복장 터지고.”
“여자 친구는 진짜 답답할 것 같지 않아요?”
나는 육개장 국물을 떠먹다 말고 스푼을 떨어뜨릴 뻔했다. 여자 팀원들이 소리를 죽이면서 웃었다.
“한 박사님한테 여자 친구가 있을까요?”
“애인이면 서로 맞춰줘야 되는데 아마 맞춰준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 듯?”
“대체 어떤 여자가 저 남자를 만날지 궁금하다.”
네, 바로 제가 주말에 저 남자와 데이트를 한답니다. 그 말을 던지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일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맞장구라도 쳤을 텐데 심란해져서 밥이 목에 턱턱 막혔다.
“그런데 한 박사님 잘 생기셨잖아요.”
그 말에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에는 더없이 객관적인 사람들이다.
“솔직히 우리 회사 안에서는 탑이지.”
“가끔 얼굴 보면 놀라잖아요, 왜 저렇게 잘생겼나 하고. 처음 입사했을 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무슨 연예인 섭외한 줄.”
“하지만 신은 모든 걸 주시지 않나 봐. 얼굴 대신 성격을 가져가셨잖아.”
“패션 센스도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며 모두들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두런두런 식사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식판을 반납하고 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엄마였다. 나는 동료들에게 먼저 올라가시라고 말하며 1층의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테라스에는 밥을 먹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몇몇 걷고 있었다.
“여보세요, 엄마. 나 회산데 무슨 일 있어?”
- 엄마가 부탁한 에센스 면세점에서 사 왔니?
“…깜빡했다. 면세는 아니어도 사서 보내드릴게.”
- 으이그, 나이가 몇인데 벌써 깜빡깜빡해. 됐고 너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내.
“무슨 시간?”
-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밥만 먹고 와.
익숙하게 구슬리는 말투였다. 어휴! 나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선 안 봐.”
- 그냥 만나만 보는 건데 뭘 그래? 돈을 그렇게 잘 벌고 사람도 괜찮다더라.
“싫다니까요? 그렇게 괜찮은 남자면 다희나 소개시켜 줘.”
- 걔는 남자친구 있잖아. 너는 연애도 안 하고 어차피 주말에 시간도 많은 가시내가 뭘 튕겨?
“나 주말에 시간 없거든? 약속 있어.”
- 참나, 그래 봤자 친구나 만나러 가겠지.
“아니야, 남자 만난다고!”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 진짜? 남자 만나? 누구? 어떤 사람인데?
“그, 그냥 사람이지. 엄마 나 들어가야 되니까 끊어요.”
- 데이트 잘 하고 나중에 집에도 데리고 오고!
난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허둥지둥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남자를 만난다니, 거짓말은 아니지만 양심이 깊이 찔렸다.
“송 대리, 요즘 만나는 사람 있나 봐요?”
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젠장, 신미희였다. 그녀가 생글거리는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나는 굳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왜 남의 대화를 엿듣고 그러세요?”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미희가 이런 얘기를 들었을까! 그녀는 내가 회사 안에서 가장 꺼림칙해 하는 사람이었다.
“그냥 인사하려고 기다렸는데 들린 거예요. 남자친구 생겼어요? 어떤 사람?”
“…그걸 제가 왜 신 대리한테 말해야 해요?”
“까칠하다~ 궁금해서 그러잖아요. 우리가 아주 상관없는 사람도 아니고.”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긴, 놀고 있네. 부글부글 속이 끓어 올랐다. 상대할 가치도 없어서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을 때였다.
“기오 씨, 여기야! 점심 다 먹었어?”
에이 씨. 그때까지 참고 있던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김기오까지 만나다니 정말 운수가 더럽게 나쁜 날이다. 기오가 우리 둘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흙탕물처럼 흐려졌다.
“송 대리 오랜만이네, 요즘 얼굴 잘 안 보이더라. 걱정했잖아.”
눈치없이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밝고 긍정적이라며 좋았던 때가 있었다. 현재 애인과 양다리를 걸쳤던 옛 애인이 함께 있는 것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이는 뻔뻔함이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
“기오 씨, 송 대리 요즘 만나는 사람 있대. 잘 됐지?”
“그래? 다행이다. 영 소식이 없길래 누구 좋은 사람이라도 소개해줄까 했었는데. 어떤 남자야?”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분노로 다가온다. 콩깍지를 벗고 본 김기오는 그냥 무례하고 머리에 든 게 없는 인간일 뿐이었다. 난 왜 학교 다닐 때 응원단을 한 걸까? 무술을 배웠으면 지금 한 방 날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주변의 시선이 웅성거리며 이쪽으로 몰렸다. 한때 우리 세 사람이 이 회사 안 화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잠깐 잊고 살았다.
기오와 미희가 웃는 얼굴로 딱 붙어 서 있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혔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 내가 먼저 나왔는데 왜 피해야 돼? 나는 상큼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남자 만나는 게 뭐 대수라고 이렇게 호들갑이야. 성실하고 괜찮은 남자예요, 누구랑 달리.”
“그래요? 하긴 그렇겠죠. 송 대리가 원래 보기보다 눈이 높잖아요.”
이런 젠장 저렇게 받을 줄이야. 저게 할 말이야? 분수도 모르고 눈이 높다 이 얘기잖아? 그리고 내가 눈이 높았으면 저 똥차 김기오를 만났겠어?
“좋은 사람이면 다행이고. 이번에는 잘 됐으면 좋겠다.”
기오가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얼굴을 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꼭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하는 듯한, 위에서 안쓰럽고 안타깝게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역시 태권도를 배웠어야 했다니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비참해졌다. 주말의 약속이 진짜 애인과 만나는 거라면 당연히 너 같은 똥차보다 좋은 벤츠를 타러 가는 거라고 의기양양했을 테지만… 다른 여자를 만나기 위한 예행연습을 위해 여친 대행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생판 남에게 자위 도구를 들키는 바람에!
그러는 동안 우리를 보는 눈은 더 늘어났다.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과의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가야 할까. 그냥 가버리기에는 도망치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존재가 끼어들었다.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산책에 방해가 되어서요.”
한정헌이었다. 그는 언제 나타난 건지 무덤덤한 얼굴로 내 옆에 서 있었다. 정헌은 사내에서도 키가 훤칠하게 큰 편이었는데, 평균을 간신히 넘는 기오는 그 옆에서 한층 더 작아 보였다.
정헌은 (남들 눈치 안 보고 말이 안 통하며 직언하기로) 사내에서 제법 유명한 존재였다. 오랜만의 삼자대면이라며 눈치도 없이 힐끔대던 사람들은 금세 헛기침을 하며 흩어졌다.
정헌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서 있던 가운데로 쑥 들어오더니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얼굴을 향했다.
“송 대리님, 보내주신 보고서는 잘 읽었습니다. 오후에 업데이트 버전을 볼 수 있을까요?”
“네, 네! 들어가서 마무리해서 바로 보내드릴게요. 같이 들어가세요.”
휴, 다행이었다. 타이밍 좋게 끼어 들어준 정헌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만약 화를 내거나 자리를 피했다면 미련이 있는 것 같다는 둥, 뭐가 찔리는지 도망을 쳤다는 둥 쓸데없는 입방아에 일주일은 오르내릴 터였다.
더 진상을 피우고 싶은 표정인 기오와 미희 커플을 내버려 두고 얼른 정헌의 뒤를 쫓아 숨 막히는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전혀 의도치 않았겠지만 적절히 끼어 들어준 것이 고마워서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정헌은 날 쳐다도 보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움직이는 숫자만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무뚝뚝한지 안 그래도 서늘한 인상이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말을 붙여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늘처럼 회사 엘리베이터 속도가 느리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불편했다. 왜 이 사람하고 있으면 이렇게 불편한 걸까.
앞으로도 주말마다 네 번이나 만나야 하는데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러려나. 어차피 해야 할 데이트라면 조금이라도 즐거운 게 좋았다. 난 억지로 할 말을 끄집어내 보았다.
“자판기 커피 좋아하세요? 설탕이 너무 많던데. 먹으면 입맛도 텁텁해지고.”
정헌은 어쩐지 놀란 표정을 했다. 별말도 아닌데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자판기 커피 매니아였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뭐야, 무슨 대화가 이 모양이야.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는 왜 뽑았어.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자 정헌은 망설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인데 사적인 용도로 말을 걸어도 됩니까?”
그 말에 내가 더 놀랐다. 거래 내용에 회사 안에서는 일 이야기만 하고 서로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서 무서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건 사적인 말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아무 말이잖아요.”
“아무 말의 범위가 어떻게 됩니까?”
“됐어요, 말을 말아요.”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우리는 승강기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은 다른 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버려서 하필이면 둘 뿐이었다. 정헌은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쿵, 문이 닫히면서 공간이 밀폐되었다.
그 때 조용하던 정헌이 입을 열었다.
“회사 안이지만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 사적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 네, 하세요.”
여태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던 정헌이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번 주말에 송 대리님께 데이트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잠시 멍해졌다. 주말마다 데이트를 할 거라는 건 이미 이야기가 된 기정사실이라 따로 만나자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장소나 시간만 통보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
게다가 ‘데이트 신청’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만나자고 한 사람은 평생 처음이었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고 클래식하게 느껴져서인지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그, 그게.”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올라갔다. 도착했다는 띵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토요일에 만나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민규를 비롯한 팀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송다비와 한정헌이 데이트 약속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사람들이.
큰일 날 뻔했다. 방금 대화가 들렸으면 어쩔 뻔했어? 긴장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정헌은 표정 없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걸어 나갔다. 나는 약간 느리게 그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현실감이 훅 밀려왔다.
회사 동료와 남녀 관계로 만난다는 현실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