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사실은 거절을 할까 했다. 첫 만남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은지에게 아무 말도 듣지 않았다면 이 사람이 지금 장난치나 하면서 No라는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쪽에서 마음에 든다는 내색을 했다니까 맘이 기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을까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지금까지 연애에 관심이 없었고 소개팅도 처음 해봤다면 서툴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얼굴을 붉히고 있었던 것 같고, 안절부절못하기도 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헌은 약속장소인 영화관 앞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오늘도 패션 센스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얼굴이 워낙 빛나는 탓에 사람들이 정헌을 힐끔거렸다. 잘생긴 이목구비를 보자 마음이 몽글하게 풀어져 내렸다.
그래 한 번 더 만나보는 게 뭐가 어렵다고. 가위바위보도 세 판인데.
없던 일로 치부하기에는 저 얼굴이 너무 아깝잖아.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제가 늦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아직 상영 시간이 십 분 정도 남았으니까요.”
“아, 우리 영화 보나요?”
“네. 함께 친목을 도모하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응이 안 되는 정헌의 말투에 웃으면서 요즘 무슨 영화를 하는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어헉!”
순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에 들어온 영화 포스터 때문이었다. 새파란 얼굴의 귀신이 이빨과 손톱을 세우고 포스터 밖으로 뛰쳐나오려 하고 있었다. 요즘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B급 공포영화였다. 너무 무서워서 보다가 앞사람 머리에 팝콘을 쏟았다는 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난 호러 영화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벌레처럼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귀신이나 긴장하게 만드는 음악, 피가 튀기는 잔인한 연출까지. 아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으니 호러 영화를 보는 건 나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저기 혹시 오늘 우리가 볼 영화가 무슨 영화예요?”
“‘간을 꺼내 도망쳐라’라는 영화입니다.”
“…… 저 공포영화 말씀이세요?”
“개봉 중인 영화중에서 제일 평이 좋고 예매율과 별점이 높더군요.”
정헌은 많이 알아봤다는 듯이 어깨를 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사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공포 영화를 극장에서 그 커다란 화면과 생생한 사운드로 본다는 것은 평생 상상도 안 해본 일이었다. 못 보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정헌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그럼 공포 영화를 고른 것도 나와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르잖아? 왜 드라마를 보면 남녀가 같이 호러 영화를 보다가 무서워하면 꺄악! 하면서 눈을 가려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스킨십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래, 할 수 있어 송다비. 지금 공포 영화가 문제야? 원래 미남을 차지하는 일은 어려운 법이랬어. 공포 영화라도 옆에 누구랑 같이 보면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몸에 힘을 주고 결연히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하필 영화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한가운데 자리였다. 미리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정헌이 전화가 오고 있는 휴대폰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잠깐 통화를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음료수라도?”
“아, 아뇨. 괜찮아요. 늦기 전에 오세요.”
정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무섭다고 소문난 공포 영화라 그런지 좌석은 드문드문 거의 채워지지 않았다.
영화 광고가 몇 개가 지나가고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정헌은 돌아오지 않았다. 난 연신 뒤를 돌아보며 정헌을 찾았다. 왜 안 오지?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관 안의 조명이 꺼지는 순간까지 나는 믿기지 않아서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들어오겠지.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손톱으로 쇠를 긁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서 귀신이 튀어나왔다. 아악! 힘껏 소리를 질렀다. 눈을 감았는데도 귀신의 잔상이 남아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 오겠지. 설마 안 오기야 하겠어?
심장을 쥐어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곧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예감에 나는 눈을 감고서도 온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문 쪽을 살펴보려고 살며시 눈을 뜬 순간, 스크린 가득 찬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
“꺄아아악!”
왜 안 와?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왜, 왜 안 오는 거냐고!
또 귀신을 볼까봐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혼자서 그 지옥 같은 영화관에 앉아 끔찍한 영화를 끝까지 봤다.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기진맥진해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에는 음산한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지르고 긴장해 있었던지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얼굴에 범벅이 된 눈물을 닦았다. 그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호감이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공포 영화가 아닐지라도 소개팅한 여자를 혼자 영화관에 내버려두고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세상에 이런 개매너가 어디 있어! 나를 완전히 엿 먹이려고 그런 거잖아!
떨리는 손으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더 열 받게도 전화기는 꺼져 있었고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릴 줄 알아!”
* * *
그 날 이후 나는 한정헌이라는 이름을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썼다.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정헌의 휴대폰 번호를 스팸으로 돌려 버렸다. 번호를 지울까도 했지만 혹시라도 연락이 왔을 때 받지 않도록 이름을 ‘미친 새끼’로 바꾸고 이중 삼중으로 차단했다. 어쩌다 정헌의 이름이라도 들으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후 회사에서 정헌을 다시 만난 것이다.
“이쪽은 HC 에너지 연구소에 새로 들어오신 한정헌 책임연구원님.”
새로 프로젝트에 배정되었다면서 표 부장님이 소개해주셨을 때,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십 년이 흘렀는데도 잘생긴 얼굴은 그대로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헌 역시 나를 알아본 건지 놀란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외영업팀 송다비예요.”
“…한정헌입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악수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눈에 띄면 죽여버린댔지!’하면서 명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분노의 뒤끝이 이렇게 길고 진득한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었고,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체감한 사람이었다.
그 후로는 모른 척으로 일관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것도 있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과 과거에 소개팅을 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같은 프로젝트에 배정되어 하루에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칠 일이 생겼지만 열심히 피해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엮이지 않고 이 프로젝트만 잘 끝내면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덮고 있던 이불을 다시 뻥 차올렸다. 아까부터 거의 5분에 한 번씩 하고 있는 짓이었다. 그날 나는 도망친 후에 아프다는 핑계로 호텔 안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다음날 비행기에 실려 날아오자마자 집으로 쏜살같이 튀어왔다.
“아무래도 성을 바꿔야겠어, 노 씨로. 나는 노답이야! 인간이 이렇게 노답일 수가 없어!”
그날 일을 떠올리자 다시 얼굴이 달아올라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끝없이 그날 일이 눈앞에 리플레이되었다. 곧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전전긍긍하며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무단결근하면 퇴사 처리되겠지?”
당장 내일 정헌의 얼굴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휴대폰으로 사직서 쓰는 법을 검색하고 이직 사이트까지 흘러 들어갔다가 한숨을 쉬면서 내려놓았다. 의미 없다. 사직서를 낸다 해도 어쨌든 회사는 가야 하지 않은가.
미친 여자인 줄 알았겠지? 아니, 돌은 변태인 줄 알았겠지!
가방에서 자기 섹스 토이를 꺼내 달라는 사람이라니, 반대로 생각해서 한정헌이 자기 가방에서 오나홀을 꺼내 달라고 했으면 난 그 얼굴에다 내던지고 경찰에 신고해서 콩밥을 먹일 거니까.
“…잠깐만, 혹시 진짜로 성희롱에 걸리나?”
다른 사람 같으면 모를까 한정헌이다. 그 사회성 제로 정헌이라면 진짜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의 행동 범위는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마이너스의 망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회사 안에서 붙잡혀가는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시선들이 그려졌다.
송 대리가 성희롱했대. 자기 딜도를 보여줬다던데? 그래, 쓰던 거!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변태에다 미친 사람이네. 남자가 엄청 고팠나 봐? 하긴 애인이랑 그렇게 헤어진 지 몇 년째잖아.
그리고, 그리고 마침내… 김기오의 귀에까지 들어가겠지! 악, 생각을 하니까 미칠 것 같았다. 이불을 다시 걷어차면서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악! 내일 회사 어떻게 가냐고!”
* * *
회사의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을 가다듬었다. 밤새 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해서인지 이미 소문이 퍼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직 한정헌을 만나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딜도 때문에 먹고 살기를 포기할 수는 없잖아!
“송 대리님! 안 들어가세요?”
같은 팀의 인경 씨와 경영지원팀의 윤 주임이 걸어오고 있었다. 만약에 그사이에 얘기라도 돌았다면 우리 팀에서 제일 소문에 빠른 인경 씨가 모를 리 없었다. 얼른 인경 씨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평소와 똑같았다. 아직은 아무 소식도 돌지 않은 모양이었다.
“출장 갔다 오니까 출근하기 완전 싫은 거 있죠.”
“맞아요. 월차라도 낼까 했다니까요.”
“들으니까 월차 낸 사람도 몇 명 있던데요.”
“아 그래요? 누구요?”
“박 대리님도 내신 것 같고요, 아 그리고 한 박사님도 월차 내셨대요.”
정헌의 이름이 나오자 철렁했다.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한 박사님 월차래요?”
“네. 여름휴가도 안 내시고 주말에도 매일 풀 출근하시더니 의외죠.”
“그… 그러게요. 출장이 피곤하셨나?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맞아요. 출장 끝나고도 좀 이상하셨어요.”
인경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뭐, 뭐가 얼마나 이상하셨길래요?”
“아, 송 대리님 그때 먼저 가셨지. 한 박사님이 되게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다고 해야 하나? 평소에 워낙 마이웨이라서 사람들도 그냥 내버려 두잖아요. 그런데 짐 찾으면서도 계속 어디 부딪치고 넘어지고 그러셔 가지고, 오죽하면 과장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니까요.”
“그, 그래요…? 그랬더니 뭐라고 했는데요?”
난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뭔가 유추할 수 있는 말이라도 한 건 아닌가 심장이 바짝 졸아들었다.
“되게 충격적인 일이 있으셨다고 하시던데요.”
“…….”
“한 박사님한테 충격적일 만한 일이 뭘까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실 것 같지도 않은데.”
내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자 인경과 윤 주임은 까르르 떠들면서 앞서갔다. 역시 한정헌에게도 그 일이 충격이긴 한 모양이었다. 오늘 월차를 냈다니 당장 얼굴은 마주치지 않겠지만, 정헌은 집에서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일을 반추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겠지.
혹시라도 덮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기엔, 나와 정헌은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장 나는 출장지에서 뒷담을 하다가 걸리지 않았는가. 그가 나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리 긍정적이려고 노력해도 정헌이 딜도 사건을 공론화시킬 확률이 다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이라면 사내 성윤리 위원회에 찌르고도 남지 않을까? 변태로 찍히고 강제로 퇴사 당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 주임.”
“네 송 대리님.”
“혹시 우리 프로젝트 처음 들어갈 때 경력사항 이력서도 같이 받았나요?”
“예, 모아놨을 거예요.”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저한테 좀 보내주실 수 있어요?”
* * *
지금 번호는 꺼져 있어서 예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무시할까봐 걱정했는데 정헌은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한 박사님, 저 송다비예요.”
“…네.”
“저 박사님 집 근처 카페 ‘로맨틱 커피’에 와 있어요.”
“……네.”
“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잠깐만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정헌의 집 근처 카페는 한적했다. 반차를 낸 오후 시간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리고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오랫동안 기다릴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정헌이 카페로 들어섰다. 집에 있다가 급하게 나왔는지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가 부스스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평소보다 훨씬 괜찮아 보이는 게 아이러니했다. 정헌은 곧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다. 미리 주문해 놓은 커피를 내밀었다.
“아메리카노 드시죠? 대화를 방해받기 싫어서 미리 주문했어요.”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저희가 이야기를 나눠야할 게 있잖아요. 오늘 회사도 안 나오셨던데 그거 혹시 저 때문인가요?”
“…….”
“정말인가 보네요. 저 이해해요! 그런데 박사님, 오해예요.”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실 안마기거든요. 제가 어깨가 자주 뭉쳐서 도구의 힘을 빌리곤 해요. 이렇게 어깨에 대고 누르면 피곤이 싹 풀리곤 한답니다.”
“…….”
“물론 모양이 좀 그래서 오해를 하셨을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아는 대로 보인다고 하잖아요, 혹시나 이상한 물건으로 보였다면 그 사람이 음란한 것 아닐까요…?”
“…….”
“하하, 어떤 제정신 아닌 여자가 출장지에 성인용 장난감을 들고 왔겠어요? 그리고 만약 그 물건이 그게 맞았다 쳐요. 제가 왜 한 박사님한테 꺼내달라고 했겠어요? 그쵸? 정말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조곤조곤 말하고 있는 중간이었다. 갑자기 정헌이 자신의 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내 얼굴 앞으로 쑥 화면을 내밀었다. 폰 화면에는 ‘작은 자극은 느끼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압도적인 크기! 당신의 밤을 뜨겁게 불태우세요!’라는 낯 뜨거운 문구와 함께 내 5호 장난감의 사진이 요란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정헌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벌써 찾아봤잖아! 틀렸어, 거짓말도 안 통해!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난 앓는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역시 그게 맞나 보군요.”
정헌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왜 한국은 마취 총을 갖고 다니지 못하는 걸까? 이럴 때는 쏴버리고 도망쳐야 할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더는 회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고개를 들었다.
“원하는 게 뭐예요?”
“예?”
“제가 한 박사님한테 뭘 해드리면 입 다물어주실 거냐고요.”
정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송 대리님은 제가 그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나 봅니다.”
“이걸 검색까지 해보셨잖아요!”
“어쩐지 시치미를 떼실 것 같아 확실한 증거가 될 팩트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시치미를 떼는 걸 알면! 좀 모른 척해주면 어디가 덧나요?”
“송 대리가 그걸 제 손에 쥐여준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려 한 겁니다.”
“아니 쥐여주긴 누가 쥐여줘요? 그냥 짐이 섞여서 어쩌다 보니 재수 없게 흘러 들어간 거죠! 제가 미쳤다고 알면서도 그걸 한 박사님한테 보여줬겠어요? 아무튼 다 됐고요! 한 박사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하세요.”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송 대리님이 왜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줍니까? 대리님이 어떤 장난감을 갖고 얼마나 뜨거운 밤을 보내든 그건 프라이버시의 영역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정헌은 흔들림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도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난 누구한테 약점을 잡혀 있는 게 너무 싫어요. 저는 이제 사람이라는 존재를 안 믿기로 했거든요.”
정헌은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만 하고 넘어가면 한 박사님의 호의에만 기대야 하는 거잖아요. 전 또 언제 그 얘기가 터질지 몰라서 한 박사님 주변에서 전전긍긍하겠죠. 그러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뭔가 대가를 드리고 거래하는 게 제 마음이 편해요.”
그는 어쩐지 새로운 연구 대상을 발견한 것처럼 흥미 있는 눈치였다. 계속해서 나를 빤히 보는 눈빛에 갑자기 핫, 하고 정신이 들었다. 잠깐 이렇게 말하면 혹시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얼른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입막음 대가를 드린다는 게 절대 이상한 뜻은 아니에요. 제가 성인용 장난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몸이 굶었으니 아무 남자와 자고 싶어 미치겠다는 의미는 아니거든요?”
“아, 네.”
“정말이에요! 하필이면 들킨 물건이 딜도라서 오해하실 수도 있지만, 그냥 제 취향인 데다 여심을 사로잡는 트렌디한 장난감이라 소장하고 싶어서 갖춰 놓은 거지, 남자가 없어서 이걸로라도 채워보겠다는 뜻은 아닌… 데….”
아아.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졌다. 이미 자기변호가 아니라 자기 무덤을 파는 수준이다.
망했다 망했어. 경력 6년 차 냉정하고 차가운 커리어 우먼, 열심히 쌓아 올린 사회적 이미지가 순식간에 우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나 있습니다.”
그때 정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 대리님이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
“그게 뭔데요?”
나는 손을 얼굴에서 치우면서 황급히 물었다. 정헌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잘생긴 제 턱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저랑 관계를 맺읍시다.”
뭐라고?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관계를 맺어? 관계? 에이 내가 뭘 잘못 들었겠지 설마.
“귀가 이상한가 봐요. 제대로 못 들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세요.”
“저랑 관계를 맺읍시다.”
그는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똑같은 톤으로 대답했다. 한 번 더 듣고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길 몇 차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아무리 약점을 잡혀 있는 상황이라도 그렇지!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저런 거래를 제안해?
“하! 그러니까 약점 잡은 김에 같이 한번 자보자 이 얘기예요?”
“그게 아니,”
“한 박사님 장난하세요? 제가 본의 아니게 한 박사님을 성희롱한 것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튀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분명히 그랬죠, 섹스 토이를 갖고 있다는 건 눈에 띄는 어떤 놈팽이랑 몸을 섞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고!”
말하다 보니 점점 더 화가 났다.
“아니 사람을 얼마나 쉽게 봤길래,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요? 혹시 대학교 때 얼굴 봤던 사이라고 만만해 보이고 그래요? 짜증나고 이상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내가 계속해서 쏘아대는 동안 정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분노에 가득 찬 말을 하다가 숨이 차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한 관계는 오픈 릴레이션쉽입니다.”
“…네?”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다른 사람과도 자유롭게 데이트할 수 있는 관계.”
“데이트… 요?”
“네, 데이트.”
“갑자기 그게 무슨.”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의 사례에서 대입해보기엔 송 대리님이 약점이라는 조건을 지불했으니, 평면적인 데이트 메이트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겠군요. 굳이 따지자면 애인 대행 서비스 관계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저기요,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정헌이 테이블 위로 자신의 두 손을 깍지 꼈다. 덥수룩하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일직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중요한 여자분을 만날 계획이 있습니다.”
“여자…요?”
“네, 제 인생이 걸렸을 만큼 중요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이에요.”
정헌의 표정이 당황스러울 만큼 생소했다. 그가 만나고 싶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지독하게 안 어울렸다. 놀라웠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아까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면서 정헌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런데 송 대리님께서 가장 잘 아시겠지만 저는 여자와 매끄럽게 교제하는 것에 그다지 재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 네, 잘 알죠.”
“지금까지 많이 서툴렀지만 이번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아요.”
“…….”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실패 확률을 줄일 수 있도록, 충분한 트레이닝과 준비 기간을 거치려고 합니다.”
“트레이닝? 준비기간?”
“그러니까 앞으로 한 달.”
정헌이 엄지를 뺀 나머지 손가락을 펴 보였다.
“네 번의 주말 데이트를 제안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 달 뒤에 한정헌은 중요한 여자를 만난다. 오랫동안 짝사랑한 여자인 건지 첫눈에 반했는지 하여튼 정말 잘 되고 싶은 사람인 거다.
그런데 정헌은 성격답게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었다. 지금 정헌의 스탯으로 나가면 분명히 실패할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한정헌은 잘난 얼굴을 제외하고는 매너, 화술, 패션이 뒤떨어졌고 사회성과 친화력은 제로 수준이었다. 그는 확실히 여러 분야에서 트레이닝과 레벨 업이 필요한 남자였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데이트 트레이닝을 제안한 거고.
내가 잠시 침묵하자 정헌은 끼고 있던 손깍지를 끼고 얼음이 녹아 미지근해진 컵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어쩌지, 생각하면서 손끝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정헌의 손가락이 살짝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웨이 한또이, 한정헌이 긴장하고 있었다. 만날 여자가 그 정도로 중요한 여자인가 보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면서 경계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저렇게 다른 여자에게 열중하고 있는 남자라면 나에게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퇴사까지 각오했던 마당에 데이트 네 번이 그리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가 데이트 메이트가 되어서 미래의 소개팅녀 역할을 대신해달란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회사 사람이잖아요. 그러다 사내에 공연한 소문이 나면 곤란해요.”
“우리의 관계는 주말에만 적용됩니다. 주중에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회사 동료로 지내며 사내에서는 오직 공적인 대화만 가능, 사적인 이야기는 절대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불필요한 신체접촉도 전부 금지하는 것으로 하죠.”
“……좋아요, 제 장난감에 대해서 모두 잊어주신다면 받아들일게요.”
정헌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을 지정해서 삭제하는 방법은 제가 알기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송 대리님께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가서 보셔야 할 것 같으니 일단 일어나시죠.”
* * *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지금 한정헌과 성인용품 샵 앞에 서 있다니.
갑자기 갈 데가 있다는 정헌의 말에 얼떨떨하게 따라오긴 했지만 설마 이런 곳을 오자고 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히 문과 창문을 시트지로 꽁꽁 바르고 ‘19’조명을 단 어두운 가게는 아니었다. 밝고 세련되어서 꼭 뷰티용품을 파는 매장처럼 보이는 요즘 유행하는 성인용품 샵이었다.
“두 사람의 조건 값은 똑같아야 마땅하죠. 그러니까 저도 성인용품을 하나 구입해서 가지고 있겠습니다.”
“…….”
“이러면 제 약점이 송 대리님과 똑같아집니다. 똑같은 입장이 되는 거죠.”
“아니, 무슨….”
“타인에게 들키면 가장 치욕스러울 종류로 하나 골라 주십시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변태처럼 보이는 것으로요.”
정헌은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깔끔하게 끝내더니 아무렇지 않게 성인용품점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고 나서도 잠시 주변의 시선을 살피며 망설였다. 정헌과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정말 잘하는 짓일까?
이런 도구는 정말이지 ‘취향 존중’의 영역이라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다수인 탓에 애인에게도 숨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애인도 그럴진대 남남인 직장 동료 정헌과 함께 성인용품 쇼핑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소름 돋게 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걸어 들어갔다. 점원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나와 정헌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커플이신가요? 커플용 아이템 보시겠어요?”
“아닙니다.”
“커플 아니에요!”
“아, 따로 오신 거예요? 저는 같이 오신 줄 알고. 그러면 각각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남성분은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이쪽 분이 제가 쓸 만한 것을 잘 골라주실 거니까요.”
“예?”
“그, 모르는 사이는 아니고, 아는 사이긴 해요. 그런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정헌의 말이 너무 이상하게 들려서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하지만 점원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지 표정이 애매해졌다. 그래, 아마 나라도 같은 반응이겠지. 그래서 무슨 사이라는 거냐고 묻고 싶을 거다.
하지만 직장동료의 약점을 만들기 위해서 성인용품을 골라주러 왔어요, 라고 사실대로 말해도 아마 이해 못 하기는 마찬가지일 거예요.
얼른 정헌을 데리고 남성용품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나씩 사 모은 여성용 기구들은 내 취향에 맞춰 핑크핑크하고 디자인도 귀여운 것이 많은데, 남성용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이건 애인과 함께 봐도 민망할 것 같은 수위인데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이인 한정헌과 함께 보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내가 그러고 있든 말든 정헌은 물건들을 보고 있었다. 성적인 도구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도 낯빛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한정헌다웠다. 누가 연구원 아니랄까봐 뚝 잘라내어서 보면 실험실에서 새로 나온 소재를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건 어떠세요?”
에라 모르겠다. 딜도까지 들킨 마당에 이제 와서 더 쌓을 흑역사도 뭐가 있겠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골라줘야지.
나는 초심자에게 거부감이 들 만한 물건들을 지나치고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눈앞에 있는 본디지 의상을 집어 들어 보여주었다. 검은 가죽끈으로 만들어져 최소한의 부위만 가리고 관절 부분을 묶을 수 있는 제품이었는데,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것이라 쓰여 있었다. 정헌은 진지한 얼굴로 자세하게 살폈다.
“이걸 입는 겁니까?”
“그렇죠.”
“속옷 없이?”
“네, 여길 이쪽의 끈으로 조여서 손목을 이렇게 묶고,”
“손목이 아프진 않습니까?”
“아무래도 좀 아프겠죠?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요. 이건 SM 쪽이라서 안 맞는 사람은 아예 안 맞을 거예요. 이쪽 취향이 아니시면 다른 걸로 고를게요. 음, 이런 건 너무 하드하죠?”
“괜찮습니다. 비주얼이 충격적일수록 약점의 기능이 높을 테니 우리의 의도와 부합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인형은 어떨까요?”
난 정헌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마네킹처럼 완벽하게 생긴 섹스돌이 앉아 있었다. 초심자 주제에 제일 하드코어한 걸 골랐어!
“아… 아니, 잠깐만요, 너무 하드한 건 집에 두기 좀 그렇잖아요…. 간단한 도구도 이쪽에 있어요. 작은 사이즈로.”
“글쎄요. 어차피 사용을 안 할 텐데 상관없으니 큰 걸로 고르셔도.”
“왜요? 안 쓸 물건을 사면 돈 아깝잖아요. 이런 물건들 어지간하면 수입이라서 생각보다 비싸요. 어차피 살 거라면 취향에 맞는 것을 사야 언젠간 쓸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취향을 말씀해 보세요.”
정헌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저는 제 취향을 잘 모릅니다.”
“네?”
“경험이 없어서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게 뭐 문제는 아니지만 너무 쿨한 거 아니야?
갑자기 알게 된 동료의 동정 사실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는 동안, 정헌은 아까 내가 내밀었던 본디지 의상을 두 손으로 잡고 벽에 붙은 거울에 비춰 보았다.
그 끈이 제 몸에 감기는 상상을 하는지 정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껄끄러워하면서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에 나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걸로 하세요. 적당해 보여요.”
“송 대리님이 추천해 주시니 이걸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좀 밋밋하네요.”
앞에 있는 개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가죽에 체인이 박힌 물건이었는데 맹수를 묶어놔도 끊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게 생긴 것이었다. 정헌은 왜 여기에 동물용 물건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개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그 개목걸이를 직접 정헌의 목에 걸고 용도를 알려주는 상상을 했다. 난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야, 송다비 이 답도 없는 변태야! 이런 쪽 상상력만 풍부해서 어떡할 거야!
구입한 물건을 가지고 나왔을 때였다. 정헌은 붙어 있는 건물의 계단이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포장을 풀더니 개목걸이와 가죽 의상을 손에 들고 보여주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물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사진 찍으시죠. 그래야 나중에 제가 발뺌하더라도 송 대리님에게 증거가 남지 않겠습니까.”
완전 철저하네. 발뺌을 할 것 같지도 않은데.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데 애써 거부하는 것도 이상해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SM플레이용 기구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고 무뚝뚝했다. 정헌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만약 송 대리님의 딜도에 대해서 소문이 퍼진다면, 제 변태적인 성적 취향에 대해서 가차 없이 소문을 내시면 됩니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이왕 하기로 한 거니까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 여자분이랑 잘 되실 수 있게요.”
나는 거래가 성립될 때 으레 그랬던 버릇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아차 오버했나, 싶어서 거두려는데 정헌이 그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 표정이 조금 기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