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날은 종일 미팅의 연속이었다. 거래처 회의실에서 나와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하지만 식사를 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 이번 거래처의 공정 프로세스의 기술이 우리에게 수출하는 제품과 호환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직접 공장에 가서 확인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사원들이 전부 같이 갈 필요는 없어서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인원에는 한정헌도 끼어 있었다.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라 일은 금방 끝났고 우리는 같이 밖으로 나왔다.
“차 가지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민규가 동료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갈 차를 가지러 주차장으로 사라진 사이, 난 잠시 정헌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바깥에 서 있었다.
하필이면 어색하게 단둘이었다. 어차피 말도 안 붙여올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등을 돌리고 가져온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정헌은 다른 이들과 달리 정장을 입지 않았다. 어디서 골랐는지 궁금해지는 국방색 셔츠는 사이즈가 두 사이즈쯤 커 보였다. 그러고 보면 그는 옷을 항상 크게 입는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꼭꼭 잠근 정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양이 이렇게 뜨거운데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그와 달리 나는 햇볕 때문에 거의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 무거운 상자를 낑낑대며 옮기기 시작하니 더욱 그랬다. 상자를 들었다 내려놓는 커다란 소리가 들리자 정헌이 그제야 힐끗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두 번째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을 때도 정헌은 가까이 온다거나 도우려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냥 물끄러미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내가 짐을 옮기는 꼴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꼭 도와달라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표 부장님이라도 짐을 옮기고 있으면 내 일 아니어도 거들어 주고 그러겠다! 그리고 안 도울 거면 쳐다나 보지 말지, 왜 계속 빤히 보고 있어? 빈정 상하게!
나는 마치 햇빛 때문에 그런다는 듯 인상을 팍 쓰고 노려보며 정헌에게 말했다.
“한 박사님.”
“네.”
“저 눈이 너무 부셔서 그런데요.”
그냥 한정헌이 얄미워서 별것 아닌 심부름이라도 시켜보자는 생각이었다. 두 손에 들고 있는 짐을 한껏 어필하면서 눈짓으로 바닥에 있는 내 가방을 가리켰다.
“제 가방에 선글라스가 있는데 그걸 좀 꺼내 주시겠어요?”
가벼운 부탁이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쳐낼 수도, 힘들어서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사소한 부탁. 납득했는지 정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가방을 들어 올렸다.
“어디에 들어 있습니까?”
“그 안에 좀 커다란 핫핑크색 파우치 있을 거예요.”
“이 형광 분홍색 말입니까?”
“네, 맞아요. 지금 손이 부족해서 그런데 파우치에서 선글라스만 좀 꺼내 주시겠어요? 고맙습니다.”
정헌이 파우치의 지퍼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뒤를 돌아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선글라스를 건네줄 줄 알았던 정헌에게선 짐을 모두 내려놓을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 파우치를 연 소리까지는 들렸는데 왜 등 뒤에서 침묵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을 향해 내리꽂히는 직사광선에 좀 짜증이 나서,
“거기 없어요?”
하며 정헌을 휙 돌아보았다. 그런데,
팔뚝만한 사이즈의 딜도를 손에 든 한정헌의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해져 있었다.
정헌이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새빨갛고 커다란 나의 5호 장난감 딜도였다.
“…시발.”
그리고 난 철없던 십대 이후로 끊었던 욕을 육성으로 내뱉고 말았다.
***
그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그 후로 수십 번은 돌이켜 생각해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만큼 내가 처한 상황이 노답이었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잠시였겠지만 나에게는 억겁과도 같았던 시간 동안 정헌과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등 뒤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저게 왜 내 출장 가방 속에 딸려 들어온 걸까.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액세서리와 선글라스를 넣은 파우치가 저것과 비슷한 색깔의 핑크였다. 짐을 꾸릴 때 해외 출장에 신이 나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저놈의 파우치를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던 나의 손목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길까? 나는 섹스 토이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여자들도 스스로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건강한 성생활을 위해서는 혼자 쓰는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잡지의 칼럼을 읽은 것은 2년 전쯤이었다. 한창 마음이 힘들 때였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어서, 호기심이 생긴다는 이유로 첫 번째 토이를 구매했다.
첫 장난감은 기본적인 기능만 있는 바이브레이터였다. 사귀었던 남자가 여럿 있었던 만큼 경험은 있었지만 도구를 처음 썼을 때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랬다, 그건 남자와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그만두라고 신음을 내질러도 전원이 on인 이상 내 의사를 무시하고 끝까지 달려 나가는 무자비한 매너, 절정에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져도 미안해하거나 서먹할 필요 없는 일정한 톤의 성실함까지!
그 후로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 도구들이 지금은 옷장 안에 여러 개였다. 요즘은 해외 직구에도 손을 대어 예쁘고 귀여운 디자인이 늘어났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섹스를 위한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5호 딜도는 하필이면,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거대한 크기도 그랬지만 5호는 귀두의 모양이 리얼하게 표현된 것은 물론이요, 주름이라든지 돌기라든지…. 빼도 박도 못하는,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어, 저기, 어, 그러니까….”
그래서 새하얗게 질려선 딜도를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한정헌을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한 가지였다.
“에잇!”
손에 들고 있던 짐을 팽개치고 달려가 그의 손에서 나의 5호와 가방을 매처럼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방향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뜨거운 태양빛이 사정없이 꽂혔지만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세상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머리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죽자! 죽어! 하필이면, 왜 하필이면 한정헌한테 이런 걸 들키냐고!
- 10년 전
짜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도는 마무리 포즈와 동시에 정확하게 음악이 끝났다. 박수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굴에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언제나 이 순간이 가장 뿌듯했다. 난 활짝 웃으면서 셀 수 없이 모여 있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수고했어, 다비야!”
“완전 멋있었어! 이번 축제 역대급이다.”
“송 단장이 잘 해서 그렇지. 박수 소리 완전 컸어.”
같은 응원단 동기들이 추켜세우는 말이 싫지 않아 눈을 접으며 웃었다.
난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학내 응원단 활동에 푹 빠져 살았다. 친구를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점점 열성적으로 빠져들어 나중에는 단장까지 맡았다.
치어리딩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다니. 무대에 올라 참가자들을 힘껏 응원하며 모두의 힘을 북돋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누군가 응원 동아리라고 부르면 꼭 학생회 산하기구인 응원단이라고 고쳐줄 만큼 애정과 자부심이 넘쳤다.
오늘은 5월 축제의 첫날이었다. 축제의 즐거움에 들떠있는 학교 안에서 내 마음도 괜히 들썩거렸다. 같은 기수이자 친구인 은지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은지는 아까부터 대기실 바깥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왜 그래? 누구 기다려?”
“남친 오기로 했거든.”
“정말? 웬일이야. 요즘 맨날 공부하느라 만나지도 못한다더니.”
“그래서 오늘 꽃다발 사 들고 오라고, 안 오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했거든? 그런데 정말 안 오면 어떡하지?”
은지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귀여웠다. 그녀는 R대에 다니는 남자친구에게 푹 빠져서 첫사랑을 겪고 있었다. 뭐라고 응원을 해주려는데 반쯤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두 명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장미꽃을 든 은지의 남자친구가 은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쑥스럽게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하지만 나는 두 손을 부딪칠 정신이 없었다. 은지의 남자친구 뒤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정말 놀랍도록 내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 * *
<저 먼저 와있으니 오시면 전화 주세요^^>
마침내 디데이였다. 나는 만나기로 약속한 레스토랑에 앉아서 손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남자의 이름은 한정헌이라고 했다. 소개를 부탁하자 은지는 잠깐 눈을 크게 뜨고 머뭇거렸지만 내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니 이내 번호를 넘겨주었다. 난 그날 바로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았다.
사실 누구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늘 대시를 받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발랄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다닐 때가 많아서인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도서관에 가면 내 자리에 항상 쪽지와 음료수가 있었고, 같이 조별과제라도 하면 꼭 고백을 받았다. 연락해오는 남자가 하도 많아서 이름과 얼굴을 매치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몇 차례 해본 연애는 사실 모두 시들했다. 진심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마음이 끌린 사람은 한정헌이 처음이었다.
“아, 여기예요.”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군요.”
마침내 도착한 정헌은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으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어떡해, 잘생겼다. 너무 잘생겼어!
희고 갸름한 얼굴에 높은 코, 매력적인 입술. 얼굴의 윤곽이 단정하고 반듯하게 생긴 것이 기막히게 내 취향이었다. 미남이라기보다는 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피부가 하얘서 어딘가 서늘해 보이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순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려운 날카로운 미인.
촘촘하고 빼곡하게 머리카락이 들어찬 이마라인을 보면서 나이 들어도 머리 빠질 걱정은 없겠구나 생각할 만큼 나는 이미 마라톤 거리쯤 앞서 나가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송다비예요.”
…음, 그런데 저 옷은 좀 아니지 않나? 처음 봤을 때는 과 잠바에 면바지를 입고 있어서 무난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안 어울리는 커다란 갈색 체크 남방을 입고 그 위에 청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상의는 그렇다 쳐도 하의까지 청을 입을 필요는 없잖아? 체크 남방과 청재킷과 청바지의 톤이 전혀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의는 사이즈가 너무 컸다.
“한정헌입니다.”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잘 생겼으면 된 거야! 패션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뭐. 나중에 사귀게 되면 내 스타일로 꾸며주면 되니까. 얼굴 하나로 모든 것이 용서되다니 내가 이렇게 외모를 밝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너무 좋은 티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음식을 주문했다.
“R대 물리학과 다니신다고 들었어요. 공부 되게 잘하셨나 보다. R대 축제는 어때요?”
“글쎄요, 축제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 축제기간이지 않아요? 저희 학교 축제에는 오셨었죠? 그 날 응원단 무대 보셨어요? 저도 거기 올라갔었는데.”
“못 봤습니다.”
“무대 못 보셨어요? 그날 은지 남자친구 분이랑 같이 오셨길래 관중석에 계시다가 온 줄 알았어요.”
“거기 있었지만 안 보고 책을 읽었습니다.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 네….”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무엇보다 그가 내 눈을 전혀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 크리티컬했다. 대화는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정헌에게 더 말을 붙여보았다. 은지 남자친구와는 언제부터 친했는지, 들은 수업 중에 제일 좋았던 것은 뭐였는지 등등 시답지 않은 질문들. 그런데 짧은 단답을 하며 밥을 먹고 있던 정헌이 갑자기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할 때는 식사에 집중하는 것이 소화에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즐겁게 대화하면서 먹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면 하나도 제대로 못하게 되곤 합니다.”
“아… 네… 드세요….”
뭐지…? 정헌은 그 말을 끝으로 식사에 몰두했다. 나는 입맛을 잃었다. 아무래도 한정헌 씨는 나에게 관심이 1g도 없어 보였다.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을 뿐이었다. 전화했을 때 싫은 기색은 아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마음에 안 들었나?
기대했던 소개팅이 망했다는 생각에 나는 시무룩해졌다. 입맛을 잃고 접시에 놓인 것을 오랫동안 깨작거렸다. 그는 자신의 접시에 있는 것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도 도통 말을 붙이려 들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약간은 무서운 얼굴로 내가 밥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의 무게에 체할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도 무뚝뚝한 태도에 짧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다 먹고 나니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위장이 쓰렸다. 내 인생 최고로 불편한 식사였다.
이미 실패한 만남이라 그럴 것 있나 싶었지만, 정헌은 매너를 지키려는지 굳이 근처에 있는 카페로 나를 이끌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표현해주는 게 낫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봄의 대학가라서인지 특히나 연인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은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자 정헌의 눈이 내 시선을 따라왔다.
“저런 광경이 불쾌하면 자리를 옮길까요?”
“아, 아뇨!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거, 저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렇게 마음이 통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와, 처음으로 공감하는 말을 들었어! 그게 뭐라고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내친김에 대화의 물꼬를 텄다.
“정헌 오빠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오빠요?”
“아 저보다 한 살 많으시잖아요. 그래서 오빠라고 불렀는데…. 안 되나요?”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그, 그렇구나…. 그럼 선배라고 할까요?”
“같은 학교도 아니니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나이에 누구누구 씨 하는 거 약간 어색하지 않나요?”
“씨 자는 안 붙이셔도 됩니다.”
“그럼 정헌아?”
난 농담 삼아 짤막하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스스로 그 어색함을 느끼며 까르르 웃었다. 정헌 역시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헌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말씀하세요.”
“… 나이 많은 사람 이름 부르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외국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됐어요….”
아, 나 개그 코드 안 맞아. 망했네.
나는 지쳐서 말 붙이기를 단념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난 충분히 노력을 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공을 던져 봐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호감이 없다 못해 날 떼어버리려 한다고 생각하게 된 건 그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말없이 커피만 쪽쪽 빨고 있는데 갑자기 정헌이 옆의 의자에 올려 두었던 가방으로 몸을 돌렸다.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커다란 노트북을 꺼내더니 종이 뭉치를 나에게 넘겼다.
“뭐예요?”
“발표용 요약본입니다.”
“네? 이건 갑자기 왜요?”
“제가 이번에 시작한 연구입니다. 최근 실험이 종료되었는데요. 먼저 연구 동기 및 목적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장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립자의 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제가 흥미를 가진 건 이 운동의 방향 값이….”
정헌은 노트북을 열고 PT화면을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놀랐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두 번째는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내 귀에는 외계인의 언어로 들렸기 때문이다.
“#@$RSQDasdtt #@%%FSD!^&&…”
뜬금없이 이걸 왜? 정헌이 건넨 발표 요약본 역시 수식과 처음 보는 단어가 가득한 영어 문장들이라 읽을 수가 없었다. 운동량이 어쩌구, 가속화가 어쩌구, 실험 결과와 리뷰가 저쩌구.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이걸 왜?? 그의 심중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삼십 분이 지난 후에는 그냥 포기했다. 그가 떠들기 시작한지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 아까부터 혼자 무슨 말 하는 거야?”
“모르겠어, 그런데 끝도 없이 말하네.”
“앞에 앉아 있는 여자 표정 봐, 넋이 나갔어. 불쌍하다….”
“야, 나 저 소리 들리니까 머리 아파. 나가자.”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비참해졌다. 식사 자리에 이어서 떨어져 나가라고 쐐기를 박는 행동인 모양이었다. 내가 얼마나 별로면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표현하면 되잖아.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실컷 하면 내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말 거절하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도망쳐야겠다. 결국 결심을 하고 타이밍을 살폈다. 커피는 이미 다 마신지 오래였고 슬슬 논문도 결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잠시 숨을 돌린 틈을 잽싸게 파고들며 벌떡 일어났다.
“와, 정말 흥미로운 얘기예요! 그런데 아쉽지만! 제가 이제 그만 들어갈 시간이네요. 통금이 있어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결론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녁이라 어두우니 편하신 곳까지 바래다 드리겠,”
“아뇨, 괜찮아요! 그럼 먼저 갈게요.”
말을 끊고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왔다. 갑자기 숨통이 트였다. 세상에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자리는 처음이었다. 정헌이 있는 카페 안을 힐끔 돌아보았다.
자리에 그대로 앉은 정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나를 쫓아냈다고 생각하는지 얼굴이 개운해 보였다. 그 눈빛에 가슴이 쓰려서 나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음부터는 얼굴에 쉽게 현혹되지 말아야지. 난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지, 진짜로 이상한 남자였다.
“그치, 그 오빠 좀 이상하지?”
은지가 격하게 공감해 주었다. 그녀는 소개팅 다음 주 월요일이 되자마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며 나를 끌고 응원단실로 향했다. 소개팅에서 겪었던 무참한 기억들을 읊어주자 은지는 캑캑 소리를 내며 웃었다. 특히 두 시간이 넘도록 물리학의 뭐시기 입자와 시뮬레이팅에 대해 들었다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폭소했다.
“아 너무 웃기다!”
“부럽다, 난 웃음도 나오지 않았거든.”
“나도 정헌 선배 몇 번 오빠랑 같이 본 적 있거든. 처음 봤을 땐 진짜 잘생겨서 놀랐어.”
“그 잘생긴 얼굴에 혹했다가 나 같은 꼴을 당하는 거야.”
“안 그래도 오빠한테 정헌 선배 인기 되게 많겠다고 그랬는데 별로 안 그렇다는 거야. 어떻게 저 얼굴로 인기가 없을 수가 있지? 했거든. 근데 몇 번 말 섞어보니 알겠더라고. 진짜 희한해.”
“인기가 없대?”
“여태 한 번도 여자 친구 사귀어 본 적 없댔어.”
“모태솔로라고? 진짜?”
은지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쫓아 버리려고 그렇게 행동한 줄 알았는데 그게 평소 성격인가 보다. 하지만 아무리 성격이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잘난 얼굴을 하고는 한 번도 애인이 없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어, 사실 소개팅도 이번이 처음일걸? 본인이 싫다고 다 거절한댔어. 오빠가 그랬는데 같은 건물에 인기 엄청 많고 여신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었대. 그런데 그 여자가 다른 남자들 다 제쳐놓고 대놓고 정헌 선배한테 대시했는데 정헌 선배가 거들떠도 안 봤다더라. 그 여자 얼굴이 연예인 급이어서 오빠도 뭐라고 했대. 눈이 얼마나 높길래 저렇게 이쁜 애랑 안 사귀냐고.”
“그랬더니?”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 그랬대. 그 여자 말고도 고백 많이 받았는데 하나같이 거절했고 맨날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다나. 그래서 이번에 너랑 소개팅한다고 했을 때 무슨 심경의 변화냐면서 주변 사람들도 다 놀랐다더라. 그래서 난 너한테 반했구나! 싶었는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헌은 나를 만나기 전에 내 얼굴도 몰랐는데? 응원 무대에 올라갔던 것조차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기껏해야 약속을 잡았던 전화 한 통이 다였는데, 그것도 별 내용이 없었기 때문에 심경의 계기가 됐을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만나기 전에는 나름대로 기대감이 있었나 보지. 그런데 막상 나 보니까 영 아니었나 봐. 대화도 제대로 안 하고 혼자 논문만 읊은 거 보면.”
“흠, 그런데 내가 보기엔,”
착한 은지가 위로를 하려는지 이야기를 꺼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은지는 잠깐만, 하는 손짓을 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어? 정말로? 그치만 내가 듣기론…. 으응, 알았어.”
은지는 목소리를 낮추고 통화하더니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다비야, 있잖아, 우리 오빠한테 전화 온 거였는데.”
“응.”
“정헌 선배가 너 마음에 든다고 그랬대.”
“응?”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어 한다던데?”
“엥?”
그때 내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한정헌이었고 메시지의 내용은 짧았다.
‘이번 주말 1시에 시간 있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