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감동적인 크기
* * *
“송 대리님, 여기요!”
새벽의 공항은 기분이 들뜬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것도 아니지만 공항의 공기는 괜히 새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묘한 기대감을 준다. 비행기가 뜨는 묵직한 소리나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조곤조곤한 발음의 안내 방송.
아무리 그래도 가을인데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은 건 좀 오버였나? 오랜만의 해외 출장이 즐거워서 좀 설레긴 했다. 저녁에 떨어지는 이박 삼일의 짧은 일정이었는데 24인치 캐리어를 가득 채워 왔으니까. 면세점에서 찾아야 할 화장품을 즐겁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송 대리님, 한 명 빼고 다 모였어요.”
그 말에 온도가 뚝 떨어졌다. 같은 부서 주임이자 직속 후배인 민규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의 시간을 확인하자 곧 출국 수속을 밟아야 했다. 모여 있는 회사 사람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도 안 왔다고? 누구?”
“한 박사님이요.”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이면. 처음 프로젝트팀에 함께 배정되었을 때부터 말 한마디 섞을 일이 없도록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번 출장에 같이 가는 것부터가 싫었다. 연구직은 굳이 현장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돌려서 의견을 내보았지만 공장에 가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이유가 생겨 가드에 실패했다.
“전화는? 연결 안 돼?”
“꺼져 있는데요. 혹시 주무시는 거 아닐까요?”
“말이 돼? 아무리 새벽이라지만 출장 앞두고 늦잠을 잔다는 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번 출장의 스케줄을 짠 매니저는 나였다. 문제라도 생겼다간 팀원들 케어도 못하고 뭐했냐며 대차게 까일 것이 분명했다.
“다시 전화해 봐. 받을 때까지!”
하지만 몇 번을 다시 걸어도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정말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와 민규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본 다른 동료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다시 걸면서 손톱을 물었다. 어제 새로 받은 파란색 네일이 입안에서 뭉개졌다. 그러다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시간이 되어, 우선 민규에게 다른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라고 했다.
“아, 미치겠네.”
연락이 안 되는데 먼저 들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 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발을 동동거렸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목이 타들어 갔다.
불안이나 걱정보다 먼저 고개를 든 감정은 짜증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정헌에게 이렇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민규가 회사 사람들의 항공권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서 잠시 전화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라도 계속 전화를 해봐야겠다 싶어 민규에게 다가갔다.
“번호 좀 불러봐.”
“한 박사님 번호요? 010-0000-0000.”
뒷자리의 두 번째 숫자까지 눌렀을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미친 새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떴다. 얼른 화면을 감추었지만 민규는 이미 봤는지 눈을 크게 떴다.
“번호 저장되어 있으셨네요?”
“응… 아니, 뭐… 그냥.”
난 민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더 나올까 봐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몇 년간의 사회생활을 거친 민규는 체득한 눈치로 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론 한정헌이 왜 미친 새끼인지 궁금해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긴 했지만.
민규가 불러준 번호는 내가 예전에 저장해둔 번호와는 끝의 한 자리가 달랐다. 불러준 것으로 전화를 했지만 역시 꺼져 있었다. 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저장되어 있던 예전 번호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혹시 집이나 가족과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어?”
그때였다. 수신자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 대신 통화 연결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연결음이 통상적으로 듣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연결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몇 번 신호가 가고 마침내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 …송 대리님.
“여보세요? 한 박사님?”
- 네.
정헌의 목소리는 약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목소리가 그에 비례하듯 커지고 입에서 따발총처럼 말이 쏟아져 나갔다.
“한 박사님 대체 어디세요? 계속 전화했는데!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 거예요?”
- 새벽 두 시에는 보통 잡니다.
“뭐라고요? 아니 자는 시간이라도 출장 전인데 비행기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야…. 그런데 방금 뭐라고요? 새벽 두 시요?”
이 사람 술에 취했나? 황당해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에서는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여기는 한국이랑 시차가 다섯 시간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 지금 한 박사님 한국이 아니란 말이에요?”
- 두바이입니다.
정헌은 한없이 덤덤했다. 그 말에 갑자기 목이 턱 막혔다. 나는 겨우겨우 틈새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지금 출장지인 두바이에 먼저 가 계신다, 그 말인가요?”
- 예.
“아니… 왜요?”
- 사적인 이유라서요. 말씀드려야 합니까?
세상에! 옆에 서 있던 민규가 불안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가시는 걸 같이 출장 가는 팀원 중 누구에게라도 말씀하셨어요?”
- 왜 얘기해야 합니까?
“얘기를 해주셔야 다들 알죠!”
- 이틀 먼저 오긴 했지만 주말은 제 사적 시간이라 보고 의무가 없는 데다, 어차피 두바이로 오시면 합류할 테니 업무에 지장이 갈 일은 없을 텐데요.
“개인 스케줄이라도 공유를 안 해주시면 다들 아무것도 모르고 기다리잖아요!”
버럭 내지른 내 목소리는 과하게 컸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머리 뚜껑이 열렸기 때문이다. 민규가 놀라 숨을 죽였다.
사 년째 같이 일하고 있지만 그는 내가 이렇게 화난 모습을 처음 봤을 것이다. 누구에게 큰소리를 지른 것도 처음이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생글생글,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것이 그의 직속 선배인 HC에너지 해외영업팀 송다비 대리의 지론이니까.
정헌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내겐 기다려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됐고요. 일단 가서 뵙죠. 끊어요!”
전화를 끊고 민규에게 눈짓을 했다. 뛰자! 그리고 캐리어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리 주문한 면세품은 포기해야 겨우 컷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시간이었다. 캐리어 바퀴가 끌리는 소리처럼 으득 이가 갈렸다.
* * *
“아니 다 같이 가는 출장이잖아. 스케줄 공유는 기본 아니야? 그거 말 한마디 해주고 가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대?”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두바이는 예상대로 더웠다. 게다가 습도가 높은 편이었다. 에어컨 바람 아래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공기가 푹푹 쪘다. 비행기에서부터 공항에서 짐을 찾아 빠져나오면서 회사 동료들은 한정헌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수다를 떨었다. 열 시간쯤 동료들의 성토를 듣고 나자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누가 한또이 아니랄까봐, 그쵸?”
직설적인 말을 잘 해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인경 씨가 옆으로 다가와 소곤거렸다. 그 말에 그만 웃음을 터졌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고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공항 출구를 나왔을 때였다.
“송 대리님.”
정헌이 서 있었다. 커다란 키와 목소리가 아니면 못 알아볼 뻔했다. 에스닉한 무늬의 커다란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저렇게 촌스러운 것을 주워 입었지 싶을 만큼 희한한 옷이었다. 정헌은 내 앞까지 가까이 걸어왔다. 그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왜? 어째서 이런 인간이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가진 거야?
하얀 피부에 높고 반듯한 이마와 코, 색이 약간 옅은 눈동자에 굳게 다문 입술까지. 한정헌은 그야말로 이지적인 엘리트 미남이었다. 그 외모의 위에 씌워진 서늘한 인상까지 합하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 잘 생겼다.
물론 그건 저 희한한 성격 탓에 한정헌을 만난 지 단 10분 만에 깨져버린 환상이었지만. 뭐라고 쏘아대고 싶었지만 겨우 기분도 좋아진 참에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서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놀랐잖아요, 한 박사님? 먼저 오실 거면 그렇다고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누가 뭐라고 하나요. 저희 다 걱정하잖아요.”
“…걱정하셨다고요?”
“그럼요.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들인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아침부터 얼마나 놀랐다고요. 뭐 위급한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죠?”
“네. 사파리 사막의 별을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 인간이 장난하나? 안에서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지만 난 어른이다, 한정헌과는 달리 사회화가 된 사람이다,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러셨구나. 어쨌든 미팅은 내일부터니까 미팅만 제대로 참여하면 됐죠 뭐.”
“예, 그렇죠.”
그렇죠는 무슨 그렇죠야! 고개까지 끄덕이는 정헌이 너무 얄미웠다.
“다들 호텔 펍에서 밥 먹고 맥주라도 한잔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세요.”
“전 괜찮습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오래 마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뇨, 저는 술을 안 마시는 데다 따로 가고 싶은 가게가 있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사람들 몇 명이 붙잡는 시늉을 했지만 정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절하더니 렌트카를 몰고 가버렸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다들 나와 똑같았다. 그게 우스워서 깔깔 웃어 버렸다. 한정헌 앞에서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된다.
방에 짐만 놓고 호텔에 딸린 노천 펍으로 향했다. 더웠던 공기도 해가 지기 시작하니 제법 시원해졌다. 전망이 아름다운 노천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 떠드니 술이 절로 들어갔다. 메인 안주는 당연히 한정헌이었다.
“먹고 싶은 거 따로 있다고 혼자 차 타고 가버리는데 진짜 황당해 죽는 줄 알았잖아요.”
“가끔 보면 회장님의 숨겨진 아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니까.”
“송 대리님이 보살이야. 나라면 보자마자 화냈을걸. 어휴, 정말 한또이.”
“전부터 궁금했는데 한또이가 뭐예요?”
경영지원팀의 윤 주임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눈을 반짝 빛냈다.
“한또이 모르세요? 한정헌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모두가 와르르 웃었다. 그리고 불붙은 듯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맞아, 한 박사 정말 이상한 소리 많이 하지.”
“오늘만 해도 그래요. 사막의 별이 어쩌고 너무 웃기지 않아요?”
“그리고 그 티셔츠 대체 뭔데, 나 일침병 돋을 뻔해서 혼났잖아.”
“본인은 멋있다고 생각하고 입었을 것 같은데요.”
“너무 인생 혼자 사시는 거 아니셔? 마이웨이도 정도가 있지.”
“하여간 희한해요. 전 처음에 한또이가 한또라이의 줄임말인 줄 알았다니까요.”
아, 인경 씨가 던지는 직구가 정말 좋다니까!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처럼 시원했다. 마치 그 말이 나를 응원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분위기를 타며 나 역시 입을 열었다.
“아니 한 박사 마이웨이, 좋죠, 누가 마이웨이 나쁘대요? 그런데 누가 그거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냐고요. 돈 벌려고 회사에 일하러 나왔으면 사람들하고 관계를 형성해야 하잖아요. 그것도 매일 주기적으로 봐야 하는 사람들이면 더더욱!”
성토를 시작하자 아침부터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이제야 풀리고 있었다. 난 맥주를 들이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놈의 사적인 일입니다 타령! 애초에 공적인 공간에서 혼자 하고 싶은 대로 구는 게 다른 사람한테 민폐라는 것도 모르나 봐요. 자기 사고방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게 문젠데 왜 딴 사람한테 피해를 끼쳐요? 너무 세상 자기 멋대로 사는 거 아니에요?”
민규가 눈짓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미 터진 내 입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들 내 말에 동의하는지 분위기가 약간 조용해졌다.
“응? 안 그래요? 한또이는 왜 사람들의 분위기라는 걸 모르냐고요.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피하고 있는데 혼자서 잘난 척만 하고, 소외되는 게 안 느껴지나? 눈치라는 게 없나?”
“제가 좀 눈치가 없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돌아보니 한정헌이 거기 서 있었다. 얼굴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어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비어 있었던 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는 이미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어허허, 한, 한 박사는 다른 가게 가고 싶은 곳 있다더니?”
“가다가 돌아왔습니다.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주, 중요하지, 허허허, 팀워크가 중요해. 잘 왔어요.”
개중 가장 나이가 많은 팀장님이 더듬거리며 정헌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건배를 하자고 잔을 들어 보였다. 채… 챙,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힘없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살며시 일어났다. 앞에 앉아 있던 정헌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죄인처럼 눈을 피하고 급하게 화장실로 달아났다. 정헌의 얼굴이 안 보이니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찬물을 틀고 얼굴을 식혔다.
“…하필이면 그때 나타날 건 뭐야? 이러니까 나만 치졸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찬물을 끼얹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래 너무 분위기에 휩쓸리긴 했지… 회사니까, 싫은 사람이 있어도 너무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게 일반적인 공적 관계다. 좋아도 싫어도 티를 내지 않는 것. 그래서 공연히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복도에 정헌이 서 있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날 기다린 것 같았다.
도망칠 수도 없는 좁은 복도라 하는 수 없이 그에게 걸어갔다. 속으로 다짐했다. 한정헌이 무슨 말을 해도 제 잘못이요, 하면서 웃는 낯을 하고 납작 엎드리자고.
“한 박사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
“혹시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요, 아까 그건 제가 나쁜 마음을 품고 그런 게 아니라 술에 좀 취해서 그랬어요. 제가 술 취하면 헛소리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그래도 기분 나쁘셨을,”
“기분 안 나쁩니다.”
정헌이 말을 뚝 잘랐다. 구구절절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던 나는 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정헌이 입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복도에서 기다릴 정도면 할 말이 있는 거 아니겠어. 오늘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든지, 아까 일은 괜찮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못 참고 싸우러 왔다든지. 하여튼 이 상황에서 전개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헌은 ‘안 나쁩니다’ 한 마디를 끝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해. 왜 가만히 있는 건데? 1초가 1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정헌의 머리에는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는 기본 사회적 시스템이 탑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불편하고 어색해서 몸이 꼬이고 숨이 막히는 것을 참다못한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죄송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송 대리님, 제 예전 번호 가지고 계시더군요.”
다짜고짜 물어오는 말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걸 말하려고 기다리고 그렇게 뜸을 들였어?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뭐… 그렇게 됐네요.”
“그럼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겁니까?”
“…네.”
“저는 저를 몰라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아는 척할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전화번호는 별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말 앞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그냥 요즘엔 전화번호부도 다 연동되니까 딸려 들어왔을 뿐이죠. 사실 시간이 그만큼 흘렀으니 예전 번호를 지금도 쓰실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다급하니까 전화 걸어본 건데…. 그런데 휴대폰을 두 대 쓰시나 봐요?”
“무슨 말입니까?”
“회사 사람들한테 번호가 공유되어 있는 휴대폰은 아침 내내 꺼져 있었고, 옛날 번호는 켜져 있었잖아요. 그쪽을 더 자주 쓰시면 나중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제가 그 번호를 팀원들한테 공유해둘,”
“한 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안 씁니다. 그냥 번호만 살려둔 겁니다.”
“아… 그렇구나.”
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가 보죠.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쯤에서 적당히 끊고 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번호만 살려두고 쓰지도 않는 휴대폰을 왜 출장지에까지 가지고 오셨어요?”
정헌은 내 물음에 답할 생각이 없는지 몸을 돌렸다. 쫓아가서까지 물을 만큼 대단히 궁금한 건 아니어서 그가 멀어지는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어쨌든 정헌의 예전 휴대폰 번호를 지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뭐 좋은 기억이라고 안 지우고 가지고 있었을까? 옛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분통이 확 터졌다. 난 맥주를 마시는 척하면서 정헌을 슬며시 노려보았다.
몇 명이 정헌을 붙잡고 이런저런 회사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지만 그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대답도 거의 안 했고 상대방의 말만 들으며 그저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쩜 저리 변한 게 없을까. 세월이 흘렀으니 사회성이라는 게 어느 정도 길러졌어야 하는데 한정헌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고 탄산수 한 병을 다 비운 정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니 왜 벌써? 더 마시지 않고?”
“오래 있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내일 미팅 시간에 뵙겠습니다.”
모두 얼떨떨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정헌은 조금의 미련도 없는 깔끔한 태도로 펍을 나갔다. 누가 붙잡기도 힘든 속도였다. 시계를 보니 정헌이 펍에 도착한지 정확히 삼십 분이 흘러 있었다. 놀랍다, 저 맺고 끊음의 날카로움.
갑자기 분위기가 흩어졌다. 정헌이 바람처럼 사라진 후로 술맛도 흐지부지해졌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술자리를 파했다.
그대로 쉬면 좋았겠지만 내일 미팅 준비를 위해 민규와 준비할 것이 있어서 조금 쉬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상황에 입으려고 가져온 미니 점프수트를 입었다.
허전한 목에 목걸이라도 걸어볼까 싶어 선글라스와 액세서리를 담아온 핑크색 파우치를 찾고 있는데, 가방 안에 옷이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려웠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 주임?”
“네, 대리님. 저 민규예요.”
문을 열자 민규가 서 있었다. 머리를 감고 옷도 갈아입었는지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이라 보기 좋았다.
“다 씻으셨어요?”
“응, 지금 막 나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가져온 B 타입 상자 제 방에 없어서요.”
“그거 이 방에 있어.”
“무거운 거라 들기 힘드실 텐데 방에 함부로 들어가겠다고 할 수가 없네요.”
“제발 들어와서 들고 가주시겠어요?”
그 말을 하며 문을 열고 몸을 비켜주자 민규가 그럼 잠시 실례하겠다며 성큼 들어섰다. 스쳐 지나가는 민규에게서 나와 같은 호텔 바디 워시의 향기를 맡자 기분이 미묘해졌다. 민규는 순해 보이는 얼굴로 상자를 번쩍 들고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선배 그 옷 잘 어울리시네요.”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에서 민규는 담백하게 칭찬했다.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녀석이다. 그는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부터 모든 선배들이 김민규를 자기 밑으로 붙여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착하고 싹싹했다. 무엇보다 눈치가 빨랐으며 상식적이었는데, 그건 안 그래도 지금 한정헌에게 지쳐 있는 나에겐 너무나 귀한 미덕이었다.
“그치? 예쁘지?”
“보면 항상 예쁘고 어울리게 입으시는 것 같아요.”
“내가 소화만 잘하는 게 아니야, 고르는 센스가 뛰어나잖아. 나중에 김 주임 여친 생기면 선물 사는 거 도와줄게.”
민규가 작게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여자로 보고 건넨 칭찬이 아니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민규는 나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장점을 가졌더라도 철벽을 칠 이유는 충분했다.
사내연애만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두 번 다시 회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좀 놀랐어요. 평소에는 괜히 안 좋게 퍼지는 게 싫다고 다른 사람 뒷말 거의 안 하시잖아요. 아침에는 소리까지 지르시고. 송 대리님은 한 박사님한테는 조금 다르신 것 같아요.”
“…….”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면서 민규가 건넨 말에 찔려서 대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티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난 한정헌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