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7)

***

슈엘은 눈을 뜸과 동시에 온몸이 쑤심을 느꼈다. 근육들이 전신에서 통증을 내보내고 있었다.

"으으······."

상체만 일으키려 했을 뿐인데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슈엘을 부축하며 토닥였다.

"깼어?"

디에고였다.

슈엘은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지난 밤 있었던 난잡한 관계를 떠올리고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해, 했어! 했다고! 마물이랑 끝까지 몇 번이고 했어!'

게다가 내가 기절했는데도 계속······.

당황한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며 어버버거렸다.

'그런데 아팠나······?'

아팠던 거 같지 않아. 분명 흉측한 게 두 개나 쑤셔지면 아파야 할 텐데······ 안 아팠어. 오히려 좋았던 거 같기도······.

슈엘의 눈이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자 그녀를 보던 디에고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슈엘, 어디 불편해?"

어딘지 누그러진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아, 아니요······ 그, 저, 저기······."

"응."

"제가 보, 보석······ 보석을 건드려서······."

"응, 알아."

"그게, 절대 고의가······."

슈엘이 말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디에고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 네? 정말요?"

"응."

언제는 절대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더니, 지금은 왜 괜찮다는 거지? 의심스러웠다. 슈엘이 의문의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디에고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디에고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걸 만진 덕분에 내 반려가 됐으니까."

"······네?"

"이제 나랑 섹스하면서 아파할 일은 없어."

슈엘에겐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슈엘은 디에고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제가 마물의 반려가 되다니. 듣도 보도 못한 경우였고,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한참 바보처럼 입을 벙긋거리는 그녀에게 디에고가 천천히 마물의 반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명 공유라든가, 다른 수컷과 짝짓기를 할 수 없을 것이라든가 따위의 것들.

멍하니 그 말을 듣던 슈엘은 결국 목 놓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희망 없던 인생이 더 시궁창으로 처박힌 기분이었다.

***

"이제 다 울었어?"

퍽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슈엘에겐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수명 공유를 한다는 말은, 제가 죽으면 디에고도 죽는다는 말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흔하디흔했던 갈색 머리도 어느새 디에고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건 마치 슈엘에게 '넌 더 이상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녀를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대답 안 해?"

"미워요."

"뭐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걸······."

"난 분명 말해줬는데?"

디에고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그 말대로 디에고는 던전을 떠나기 전 슈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또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괜히 궁금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아.'

말도 안 되는 논리였으나, 슈엘이 입을 삐쭉 내밀고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디에고였다.

확실히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쁜 건 아니었다.

디에고와의 섹스가 괴로운 것도 아니었고, 질 좋은 음식과 고급의류들을 입으며 고된 노동 따위 하지 않아도 됐으니 바깥 생활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난 인간인데······.'

이제는 정말 인간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해졌다. 그 사실이 슈엘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한껏 풀죽은 그녀를 보며 디에고가 작게 혀를 찼다.

"너무 우울해 하지 마. 응?"

우울한 슈엘과 달리 디에고는 묘하게 기뻐 보이기도 했다. 단순히 기분 탓일까?

"안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야."

슈엘이 눈을 뾰족하게 뜨고는 디에고를 째려봤다. 꽤 시건방진 태도에도 그는 너그러이 웃으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니까."

"······."

"던전 밖으로 나갈 수도 있어."

물론 내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디에고가 뒷말을 흘리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슈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바, 밖에 나갈 수 있다고요······?"

"응. 마계를 통해서 인간계로 넘어갈 수는 있거든. 아마 네가 인간이었다면 평생 마계는 발도 못 붙였겠지만······."

이젠 괜찮다는 듯 그가 말을 삼켰다.

"그, 그럼······."

"응?"

"그럼 당장 인간계에 보내 주세요."

슈엘이 훌쩍이며 디에고에게 부탁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묻어 애처롭기까지 했다.

안 된다며 단호히 굴 줄 알았던 디에고는 의외로 흔쾌히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의 모습에 슈엘은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

정말 디에고의 말대로 마계를 통해 인간계로 향할 수 있었다. 슈엘은 두 번 다시 밟지 못할 줄 알았던 인간계의 땅을 밟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흑, 흐윽······."

"왜 울고 그래."

"몰라요, 흑, 이제 저는 인간도 아니라면서요."

그 말에 디에고가 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건 그런데······."

그 순간일까.

엄청난 괴음과 동시에 시뻘건 불덩이가 디에고와 슈엘을 향해 날아왔다.

"꺄악-!"

놀란 그녀가 비명을 질렀고, 디에고는 손짓 하나로 가볍게 불덩이를 막아 냈다.

"무, 무슨······!"

예기치 못한 기습에 당황한 건 오롯이 슈엘뿐이었다. 디에고는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슈엘, 네가 들어왔던 던전 주변에 보초를 좀 세워 둔 모양인데."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몇몇 신관 마법사들과 사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는 슈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저자들이 여기에······!"

"슈엘!"

그들은 머리가 하얘진 슈엘을 곧장 알아보고는 공격 태세를 갖췄다.

"설마 했는데 살기 위해 마물 쪽에 붙은 거냐!"

뭐라는 거야, 저 미친놈이! 너네는 나 죽으라고 던전에 내던졌잖아!

슈엘이 욱한 나머지 말한 이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말한 이가 움찔하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도 꽤 강한 마물이 상주하고 있던 던전은 없앤 후로도 다시금 입구가 열리지 않을지 걱정하며 신전에서 한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주변을 경계했던 기억이 났다.

'내가 던전에 들어간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처리하기 버거운 던전이었으니 신전에서 아직 인력을 배치해 뒀던 모양이다.

"슈엘, 아는 것들이야?"

디에고가 눈썹을 씰룩이며 물었다. 슈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저를 던전에 밀어 넣은 자들이에요."

"흐음······."

그들은 무어라 숙덕거리며 디에고와 슈엘을 한껏 경계하는 듯 했따다. 그러더니 머지않아 고위 사제들도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독기가 느껴지는구나, 슈엘! 영혼을 팔아 마물이 되다니, 용서 할 수 없다!"

"뭐라고요? 용서할 수 없는 건 당신들이거든?"

사람을 죽으라고 던전에 내버린 주제에, 어찌 저리 뻔뻔한지. 슈엘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당신들이야말로 사람 죽으라고 던전에 던져 놓고 뭐 그렇게 잘났어-!!"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을 뿐."

"네가 그러고도 사제냐? 느그 신이 그렇게 시키든?"

"무엄하다!"

"무엄은 무슨 얼어 죽을 무엄!!!"

디에고는 꽤 얌전하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습적으로 몇몇 마법들이 날아왔으나, 모조리 막기만 할 뿐.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당신들 전부 용서 못 해."

슈엘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사제들을 훑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사제들이 몸을 흠칫 굳히는 게 느껴졌다.

"슈엘."

"······."

"슈엘, 울어?"

디에고가 허리 숙여 그녀의 눈가를 닦아 주며 물었다. 슈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가로저을 뿐이었다.

"전부 죽여줄까?"

"······네?"

"저것들, 전부 죽여줄까? 저것들뿐만 아니라 더 높은 윗놈들까지 모두 죽여줄 수 있어."

인간 황제라든가, 인간 교황이라든가. 따위의 말을 덧붙이며 그가 살포시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이라면 기함해야 할 디에고의 말에 기함은 커녕 인간을 죽인다는 그가 조금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단순히 죽어도 싼 자들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제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까.

슈엘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

마물이 된 슈엘에게 인간계에는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졌다. 원래도 하층민이었던 그녀의 입지는 형편없었는데, 이젠 더 형편없다는말이었다.

슈엘은 힘없이 디에고의 품에 안겨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놈들 왜 살려 둔거야?"

"그냥요."

"그냥?"

"······네."

슈엘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허리춤을 그러안고 다정히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는 그 손길이 퍽 부드러웠다.

"사실 픽 죽어 버리는 것보다, 저희가 언제 또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낼지 몰라 겁에 질려 발발 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슈엘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의 반려가 돼서 그런 걸까.

슈엘은 더 이상 디에고와 나누는 이런 자잘한 스킨십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저를 따스하게 감싸 안는 디에고의 품을 느낄 뿐이었다.

***

처음 슈엘이 던전에 떨어졌을 때, 그때는 낯선 침입자에 기분이 팍 상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디에고는 뛸 듯이 기뻤다. 설마 그녀와 제가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사실 슈엘의 성력이 원래부터 형편없던 건 아니었다.

좀 더 정확하게, 지금의 슈엘이 환생하기 전. 그때의 슈엘은 꽤 높은 고위 사제직에 속했다. 즉, 성력이 상당하다는 말이었다.

아마 그녀가 지방 사찰을 나갔을 때였을 거다. 수도와 꽤 거리가 떨어진 탓에 치안이 좋지 못했고, 덕분에 슈엘은 마을 사람들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곧장 멀리까지 홀로 순찰을 다니곤 했었다.

그러다 만난 게 디에고였다. 그때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갓 태어난 새끼 마물이었지만.

"어? 이 아이는······."

은발에 붉은 눈.

누가봐도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외형이었다. 슈엘은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독기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디에고가 마물이라는 걸.

인간 모습을 하고 상처투성이가 된 채, 외딴 숲에 버려져 있었지만 흘러나오는 독기로 보아 마물 중에서도 꽤 상급 마물일 게 틀림없었다.

'이를 어쩐다······.'

아이의 외형을 한 탓일까. 이성은 무방비하게 쓰러진 마물을 죽여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선뜻 숨을 끊지 못했다.

가만히 두기만 해도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데, 하필 발견해버린 탓에 슈엘의 마음만 불편해졌다.

죽이지 않자니 찝찝하고, 죽이자니 숨을 헐떡이며 살겠다고 기를 쓰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마······."

그러던 중, 아이가 버둥거리며 슈엘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

슈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력 때문이었을까. 디에고는 본능적으로 슈엘의 손을 붙잡고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마치 그녀의 성력을 뽑아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슈엘이 미안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미안해, 아가야."

모습은 작은 어린아이였지만, 대의를 위해 죽여야 했다. 슈엘이 이를 악물고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 엄마, 안아 조······."

하지만 슈엘은 결국 아이를 죽이지 못했다. 죽이지 못한 것에 그쳤으면 다행이지. 자꾸만 제 품을 파고 들어오는 디에고를 밀어내지 못하고 성력을 사용해 치료까지 해 주고 말았다.

신의 힘을 사용해 신에게 반하는 마물을 치료하다니.

그건 금기의 행위였다.

디에고는 슈엘 덕분에 살아남아 무사히 마계로 돌아갔다지만, 슈엘은 그날 후로 성력의 대부분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건 다음 생에도, 그 다다음 생에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

처음부터 곧장 그녀를 알아본 건 아니었다.

디에고가 어릴 적 만났던 슈엘과 지금의 슈엘은 여러모로 달랐으니까.

그때의 슈엘은 훨씬 더 성숙했고, 어른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의 슈엘은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소녀였다.

하지만 가까이서 그녀와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슈엘에게 남아 있는 아주 약한, 미미한 성력은 어릴 적 저를 살렸던 그 성력과 동일했으니까.

그 성력을 먹고 죽음에서 살아난 저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디에고는 잠든 슈엘을 내버려 둔 채, 곧장 마계로 향했다. 마계로 향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근래 방문이 잦았다. 이게 전부 슈엘 때문이었다.

"그때 그 여자, 그 여자가 내 던전에 왔다니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제 친우에게 조잘거렸다. 답지 않은 디에고의 모습에 친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어쩌려는 건데."

"반려, 반려 삼고 싶어."

"그럼 가서 네 심장을 만지게 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럼 미안하잖아. 슈엘은 날 살려줬는데······. 게다가 지금 슈엘은 별로 날 안 좋아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우리를 안 좋아하는 게 맞아. 널 살려준 그 여자가 미친거지."

심드렁한 반응의 제 친우를 보며 디에고가 답답하다는 듯 분통을 터트렸다.

좋은 방법이 없는지, 강제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반려 삼을 수 있는 의견을 내보라는 말 따위를 뱉으며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슈엘을 속이고 반려 삼았다가는 평생 미움을 받을지도 몰랐다. 수명을 공유하며 함께해야 할 텐데, 그 오랜 시간 동안에 그녀에게 미움받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디에고가 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도통 돌아갈 기미가 없어 보이는 그를 보던 디에고의 친우는 결국 마지못해 한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디에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우를 바라봤다.

"인간들은 하지 말라는 짓을 꼭 한다고 하더군."

"그게 뭐 어쨌는데?"

"그 인간에게 네 심장을 절대, 절대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는 거야."

친우의 말에 디에고의 눈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순진한 슈엘은 아직까지도 알지 못했다. 과거의 제가 베풀었던 선의가 어떤 식으로 돌아왔는지.

뭐가 됐든 지금 행복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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