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둘은 후에도 몇 번 더 몸을 섞었다.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다이닝 룸에 단둘만 남게 되면 아타나시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그녀에게 입을 맞췄고, 벨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나 오롯이 그뿐이었다.
그 속에 사랑을 속삭이는 말이나 미래를 기약하는 말 따위는 없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단순히 쾌락을 원했고, 벨라는 그의 마음이 저와 같길 원했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다.
"오, 오라버니······."
"응, 누이야."
그날도 새벽 내내 그와 몸을 섞고 난 후였다. 벨라는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이러다 한낱 코르티잔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지면 어쩌지, 라는 걱정.
"좋아해요······."
그래서 제가 먼저 그에게 호감을 내비쳤다.
그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지, 아타나시우스는 알지 못했다.
단순한 섹스 파트너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애정. 부디 그가 저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 벨라의 두려움을 키웠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좋게 말해 자유분방한, 나쁘게 말해 가벼운 사내였고, 저를 옭아매는 것을 싫어했다.
하룻밤 여인들이 조금만 집착하려 드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게 그였으니까.
그럼에도 사랑 없이 몸만 섞는 관계는 자신의 마음을 좀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마음을 토해냈다.
좋아한다는 네 글자에 꾹꾹 담긴 진심을 그가 알아주길 바랐다.
"나도 누이가 좋아."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끝까지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했다.
벨라와 몸을 섞는 행위는 만족스러웠지만,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성의 없이 대꾸하고 말았다.
그런 아타나시우스의 행동에서 벨라는 느꼈다.
그는 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걸.
***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벨라 앞으로 혼담이 들어왔다.
상대는 에스멜 왕국의 2왕자였다.
에스멜 왕국, 그곳은 전 대륙에서 사용하는 마력석중 80%는 이곳에서 생산해 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왕국치고 꽤 거대한 자본을 가진 곳이었다.
벨라를 제 신부로 맞게 해 준다면, 제국에는 현재 절반 가격에 마력석을 수출하겠다는 약조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본력이 넘치는 대신, 국방이 약했다. 그렇기에 혼인으로 동맹을 맺고 싶은 눈치였다.
일개 왕국 주제에 황녀를 보내 달라 요구했다가는 오히려 황제의 반감만 살 수 있으니 황족이되 황제의 직계 혈통은 아닌, 조카에 불과한 벨라를 지목한 모양이었다.
벨라는 데메른 대공이 건넨 공문을 찬찬히 읽어 내렸다.
에메른 왕국의 2왕자라면, 언젠가 연회 때 오다 가다 마주친 기억이 난다.
매사에 모자라 모지리라고 소문이 자자한 저와 달리, 그는 정중하고 성품도 좋은데다가, 생깃 것 또한 미남으로 유명한 사내였다.
사실 아타나시우스가 압도적으로 완벽한 것이었지, 에스멜 2왕자정도만 돼도 수많은 여인들이 매달리는 신랑감이었다.
벨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언제까지 아타나시우스의 노리개로 그가 하자면 하고, 벌리라면 벌리는 삶을 살 수는 없었다.
그는 제게 진정한 사랑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대공 또한 노골적으로 보채지는 않았으나, 내심 그녀가 혼인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마력석을 절반 가격에 수입해 올 수 있다는 이점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서 모지리로 유명한 벨라가 이만한 신랑감을 찾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뗐다.
"하, 할게요······ 혼인."
그러자 대공이 잘 결정했다는 듯 싱긋 웃었다.
"대, 대신······ 오라버니께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벨라, 에스멜 왕국의 사절단이 정식으로 황궁에 방문해 혼담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면 아타나시우스도 참석해야 한다."
"그, 그럼······ 사절단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요······."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대공은 이내 알았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는 손에 들린 혼담 공문을 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괜찮아, 잘 선택한 일이야.'
아쉬운 건 에스멜 왕국 쪽이었으니, 왕국에 가더라도 극진한 귀빈 대접받으며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실제로도 공문에 에스멜 왕실은 벨라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겠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비록 아직까지는 아타나시우스를 향한 마음 탓에 가슴께가 욱신거리며 불쾌했으나, 이런 감정 또한 혼인 후 그와 멀어진다면 자연스레 사라질 감정이 거라 믿었다.
애써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을 달랬다.
*********
"누이, 요즘 바빠?"
아타나시우스가 노크도 없이 멋대로 벨라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놀란 그녀가 파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오라버니······ 여긴 어쩐 일로······."
당황한 그녀가 벙긋거리며 허겁지겁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숨겼다.
편지의 발송인은 에스멜 2왕자였다.
혼담에 긍정적인 회신을 보낸 후, 머지않아 인사차 제국에 방문한다는 내용의 다정한 편지였다.
그는 단순히 국가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연회를 오며 가며 마주친 벨라에게 적당한 호감도 갖고 있는 듯 했다.
이 정도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혼인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조금의 애정도 없이 혼인하곤 했는데, 에스멜 2왕자는 저를 향한 적당한 호감과 극진한 대우까지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벨라는 아타나시우스를 잊기 위해서라도 그와 정말 잘해 보려고 했다.
그녀의 손이 다급하게 무언가를 숨기는 걸 본 아타나시우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벨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 하고 있었어?"
"그, 그냥 있었어요······."
"요즘 통 마주치기 힘드네."
"······."
"무슨 일 있어?"
그의 질문에도 벨라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흐음······."
아타나시우스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명백히 노골적인 뜻을 담고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어딘지 야릇한 손길이었다.
"흣, 오, 오라버니······."
"응, 누이."
"······이, 이러지 마세요."
그런데 평소와 달리 벨라가 그를 밀어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언제나 제 손길에 발갛게 얼굴을 물들이고 수줍어하던 벨라였다.
낯선 반응에 아타나시우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 갑자기?"
당황한 그가 물었으나 벨라는 대답이 없었다.
"누이."
"······."
"누이야."
"······네."
"왜 갑자기 변했어?"
아타나시우스가 허리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채 물었다. 벨라는 우물쭈물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자 그는 억지로 벨라의 시선을 제게로 돌려놓았다.
"벨라."
그러고는 어딘지 그르렁대는 듯한 낯선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대답해, 벨라."
"네, 네, 오라버니······."
"무슨 변덕이 들어서 하지 말라는 건데?"
저와 똑 닮은 자색 눈동자가 꿰뚫듯 벨라를 마주했다.
"저, 저희는······ 나, 남매니까······."
"그래서?"
"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타나시우스가 이죽대며 말했다.
"아니. 이 세상에 내가 못 할 건 없어."
오만방자한 말이었으나, 그는 꽤 진지해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천하를 발아래 둔 황제처럼 방종한 아타나시우스였으니까.
"같잖은 변명 집어치우고 똑바로 말해."
"······."
"누이야, 갑자기 왜 나를 피해?"
그가 몇 번 더 대답을 독촉했으나, 벨라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아타나시우스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상한 낌새를 느긴 그가 그리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제 마음 한 조각이라도 얻고 싶어 설설 눈치만 보던 제 답지 않게 구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다음주에 에스멜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니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대공의 말에 아타나시우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에스멜 왕국에서 사절단이 오는데 제가 왜 맞이해야 합니까."
시큰둥한 그의 반응을 보던 대공이 흐음, 콧소리를 내며 제 턱을 만지작거렸다.
"벨라가 아직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자 아타나시우스가 곧바로 대공을 바라봤다.
"그래, 너도 이제 슬슬 알아야겠지."
너도 이제 슬슬. 대공의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대공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벨라는 조만간 에스멜의 2왕자와 혼인할 거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아타나시우스가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벙긋거릴 정도로.
"그게 지금 무슨······!"
"이미 다 정해졌다."
"아버지-!!"
"목소리 낮추거라."
"이런 일을 제게 상의도 없이 진행한단 말입니까!!!"
"어느 집 오라비가 제 누이 혼담에 이러쿵저러쿵한단 말이냐. 답지 않게 구는구나."
대공이 쯧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쯤 도착한다고 하니, 너도 미리미리 준비하거라. 그사이 괜히 또 사고 치지 말고."
***
아타나시우스는 그 길로 곧장 벨라에게 향했다. 노크도 없이 그녀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방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소파 위에도, 발코니에도, 침대에도. 그 어디에도 벨라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 요동쳤다. 심장이 쿵쿵 널뛰었다. 불쾌한 감정이 온몸을 지배하려 들었다.
그러던 중 그의 시야에 벨라의 책상이 들어왔다. 언젠가 허겁지겁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숨기는 듯했던 그녀의 행동.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타나시우스는 곧장 그녀의 책상을 뒤졌다. 책상 위, 책꽂이, 서랍 온갖 곳을 다 뒤졌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쌓인 편지 더미가 나타났다. 그는 곧장 그것들을 집어 들고 발신인을 살폈다.
편지에는 에스멜의 2왕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벨라가 조심조심 페이퍼 나이프로 개봉했던 게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씨발!"
짜증이 치밀었다.
영악한 계집애. 겉으로는 그렇게 나 없이 못 살 것처럼 굴더니, 뒤로는 제게서 벗어날 궁리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들자, 내용은 가관이었다.
2왕자가 벨라에게 호감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온통 벨라에 대한 걱정과 그녀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수줍음으로 가득했다.
당장 편지를 찢어 버리고 싶어졌다. 불쾌했다.
이 기분대로라면 당장 에스멜 왕국과의 전쟁을 일으켜도 모자랐다. 그깟 왕국 하나쯤이야, 작정하고 짓밟으면 될 노릇 아니던가.
"오, 오라버니······?"
정신없이 다른 편지들도 꺼내 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아타나시우스는 곧장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당황한 듯한 벨라가 엉거주춤하게 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이."
"여, 여기서 뭐 하시는······."
"누이-!"
"······."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렇게 묻고 싶은 건 오히려 벨라 쪽이었다. 주인 없는 침실에서 남의 책상은 왜 뒤지고 있는단 말인가.
"하지 마."
"네, 네······? 뭐, 뭐를요······."
"혼인하지 말라고."
아타나시우스가 절박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이미 벨라는 이미 2왕자와 혼인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 놓고,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혼담을 파기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시, 싫어요."
그녀의 대답에 아타나시우스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처음이었다. 벨라가 제게 단호한 거부를 내비친 건.
"저, 저는 에스멜에 가, 갈 거예요."
덜덜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마쳤다. 그러고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아타나시우스를 마주했다.
그 시선이 결연하고 단호했다.
"왜? 왜, 간다는 건데?"
"그, 그야······ 혼인을 할 때가 됐으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오라버니가 좋아서, 그런데 오라번는 날 안 좋아해줘서.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그런 구질구질한 걸 싫어했다.
벨라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사랑을 갈구하다 버려진 여인들만 해도 황실 연회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제 혼담 소식을 듣고 이리 길길이 날뛴단 말인가.
"안 돼, 가지 마."
게다가 답지 않게 생떼까지 부린다.
"······가, 가야 해요."
"왜? 왜 가야 하는데?"
"······."
"그쪽에서 억지로 누이를 달래?"
"그, 그런 거 아니······."
"그럼 내가 죽여줄게, 전부."
"오라버니!"
"그깟 왕국, 작정하고 쳐들어가면 한 달, 아니 일주일이면 충분해. 말만 해, 벨라. 너를 위해서라면 그깟 전쟁 수십 수백 번도 더 일으킬 수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벨라를 붙잡은 손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갔다. 그녀는 아타나시우스에게 붙잡힌 팔이 아파 옅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제국이라 한들, 별다른 외교적 이유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건 다른 나라들의 비난을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아타나시우스의 말만 들어 보면, 비겁하게 기습이라도 할 기세였다.
"혼인하지 마."
그가 명령조로 사납게 말했으나, 목소리 끝은 형편없이 떨렸다.
벨라는 눈앞의 오라비가 낯설어서, 17년 내내 그와 함께 저택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만 마구 가로저었다.
"이, 이러지, 흑, 마세요······."
겁에 질린 그녀의 뺨을 타고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좋다고 할 땐 외면하더니 왜 이제 와서 저를 붙잡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누이, 누이야, 왜 울어. 응?"
그녀가 울자 아타나시우스 또한 어쩔 줄 몰라 하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저, 저는······ 흑, 싫어요."
"뭐가? 뭐가 싫어? 말만 해. 전부 없애 줄게. 누이가 싫어하는 것들 전부, 두 번 다시 누이 앞에 코빼기도 못 비치게 해 줄게."
아타나시우스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이며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기괴했다.
"지금 기분으로는 누이에게 천하를 가져다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의 말에 벨라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처박혔다. 기껏 억누르고 잠재웠던 마음이 다시금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왜 이러지······?"
혼란스러운 건 아타나시우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누이가 혼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곁에서 그냥 평생······ 나랑만 있었으면 좋겠어."
벨라는 입술을 꾹 짓씹었다.
눈앞에서 저를 갈구하는 오라비를 보고 있자니 낯설었다. 낯설고 믿기지 않았다. 마치 처음 그와 몸을 섞었을 때처럼.
"빌어먹을, 여자에 미쳐서 나라 말아먹은 한심한 황제들이 조금은 이해될 거 같아. 어쩌지, 어쩔까, 내가 어찌해야 할까. 누이야. 응?"
제가 뱉고 나서도 아타나시우스는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이 말들, 전부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들이었다.
-저하, 저하를 사랑해요.
-제발 저를 떠나지 말아 주세요.
-다른 연인들에게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하 제발······.
과거에 제게 매달리던 여인들이 사랑을 갈구하며 애원할 때나 뱉던 말들이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벨라가 저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혀 왔고, 그녀가 다른 사내 곁에 서서 혼인식을 올린다면 그 혼인식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었다. 게다가 몸을 섞는 사내가 제가 아닌 다른 사내라면······.
"벨, 벨, 안 돼, 벨······."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하지 마."
그녀는 입술만 달싹일 뿐, 대답이 없었다.
"나, 나 벨이 가버리면 2왕자를 죽일지도 몰라. 아니 죽일 거야. 그 새끼가 누이에게 닿을 살점 한 조각 남지 않도록 전부 찢어발길 거야."
아타나시우스가 분노했음을 대변해 주듯, 자줏빛 오러가 그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기세만큼은 당장 에스멜까지 뛰쳐 가 2왕자의 목을 잘라낼 기세였다.
"그러니까 가지 마."
"왜, 왜······ 흑, 왜 이제 와서 그래요······."
기껏 꾹꾹 눌러 담아 정리한 감정이 애절하게 매달리는 아타나시우스를 마주하니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나왔다.
혼란스럽고 선택할 수 없었다.
결국 벨라는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다.
제가 좋아한다 말할 땐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더니, 그땐 몸만 원한다는 듯 굴어 놓고, 기껏 정리해 떠나려 하니 다시금 발목을 붙잡아 제 곁으로 끌어당겨 가둬 두려 한다.
"흑, 미워, 미워요······ 아흑, 오, 오라버니가 미워요."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아타나시우스는 허둥거리며 벨라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진작, 흑, 진작 그렇게······ 흡, 말했으면······."
한 달 가까이 그를 향한 마음을 억눌렀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품에 안겨 있으니 한없이 약해졌다.
그는 벨라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가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누이야. 내가 몰랐어. 내가 몰랐던 거 같아."
두서없이 말을 내뱉으며 마구잡이로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내가 전부 미안해. 잘못했어. 응? 내가 너무 안일했어. 누이가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안일하게 굴었나 봐."
벨라의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
"가지 마, 누이. 제발."
아직 남아 있는 울음기에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였다.
"누이가 하지 말라는 건 전부 안 할게. 코르티잔들도 안 만나고, 살롱도 안 가고, 마약도 안 하고, 담배도 끊고, 술도 안 마실게. 응?"
절박한 애원에도 벨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울음 섞인 딸꾹질을 뱉으며 훌쩍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더욱 초조해지는 건 아타나시우스였다.
"또, 또 뭐 하지 말까. 말만 해. 시키는 대로 할게."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버려질까 두려운 긴장감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내가······ 내가 개새끼라 그래?"
스스로를 개새끼라 폄하하는 게 싫어 벨라가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워낙 미약해 아타나시우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 차라리 누이의 개새끼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목줄 차고 다닐까? 누이가 제 발로 기라면 기어 다닐 수도 있어."
"그, 그게 무슨······."
"연회장에도 개 목줄 채워서 질질 끌고 다녀.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누이는 다 돼. 그러니까 누이야, 제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아 오는 감각에 벨라가 눈을 감았다.
"가지 마, 응? 혼인이 하고 싶은 거면 나랑 하자."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제국은 근친혼이 합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
"사랑해."
애달픈 중저음이 귓가에 속삭였다.
"진심으로 사랑해, 벨라.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못 살거야, 죽어 버릴지도 몰라."
아타나시우스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살거리는 것도, 이런 감정을 갖는 것도 전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벨라, 가지 마. 나를,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 그냥 곁에만 있어 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니. 그냥 곁에만 있어 달라니.
벨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럼에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라니.
저는 차마 그럴 수 없어 그를 떠나려 했는데, 아타나시우스는 제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그저 곁에만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줄게. 천하를 내게 바칠 수도 있어. 진심이야. 당장, 당장 전쟁을 일으켜 온 대륙을 통합할까? 그리고 그걸 전부 누이가 갖는거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원래도 아타나시우스는 같잖은 허세 따위 없는 사내였다. 애당초 허세를 떨 이유도 없었다. 말마따나 정말 귀찮아서 가만히 있을 뿐, 세상은 모두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심장이 철렁했다.
이러다간 정말 지도사에 나라가 하나밖에 남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 오라버니, 우, 우선 진정하시고······."
벨라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살짝 밀어내자 아타나시우스는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그와 눈을 마주한 벨라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언제나 오만하고 고압적이기 그지없던 그의 눈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 아타나시우스는 벨라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울고불고 매달렸다. 벨라는 그런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애당초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아타나시우스를 정말로 좋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