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7)

*** ㅇ ㅜ ㅅ  수 ㅇ 숭

"너희 요즘 웬일이야? 싸우지도 않고."

그들의 엄마 명숙이 웃으며 정아와 정권에게 말했다. 둘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태연하게 말했다.

"뭐 우리도 이제 다 컸으니까."

"맞아, 싸울 나이는 지났지."

세상 다 산 어른처럼 말하는 둘을 보며 명숙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방학했으니 둘디 유럽 여행 가겠다고?"

"응, 여자애들이랑 가는 것보다 낫잖아. 엄마도 걱정 덜 되고."

정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정권도 옆에서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구한 날 티격태격 다투기 바쁘더니, 근래 들어 잠잠하다 싶은 둘이었다. 명숙은 드디어 애들이 철들었나 싶은 마음에 흔쾌히 허락했다.

"기분이다. 엄마 아빠 모아 둔 항공 마일리지도 써."

"헐, 진짜? 그럼 우리 비즈 타도 돼?"

명숙의 말에 정아가 손뼉 치며 연신 돌고래 소리를 뱉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부터 정권은 거의 정아 오피스텔에서 살다시피 했다. 핑계도 좋았다.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그러다 최근엔 유럽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한다며, 며칠씩 정아 집에서 자고 가곤 했다. 모처럼 정권이 집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정아도 함께였다.

"야, 나 파리 가고 싶어."

정아가 뒹굴뒹굴하며 말했다. 그러자 곁에 누워 있던 정권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거기 냄새난대. 난 런던 가고 싶은데. 가서 축구 보면 안 되냐?"

"아 싫어, 런던 물가도 비싼데 왜 가. 그리고 나 축구 관심도 없어."

겉보기에 둘은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자주 티격태격했고, 여전히 자주 툴툴거렸다.

"멍청아 그럼 파리는 싸냐? 그 동네도 비싸거든?"

"멍청이? 서정권 너 돌았냐? 지금 나한테 멍청이라 그러게?"

그래도 조금 달라진 점은 있었다.

"아니, 아니 그 뜻이 아니라······ 귀여워서."

"언제부터 멍청이가 귀엽다는 뜻이었냐?"

"우리 정아는 멍청해서 귀여운데?"

"야이씨, 그거 욕이잖아!"

정아가 꽥꽥거리며 소리치자 정권이 배시시 웃으며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아아, 미안해. 미안해 정아야, 응?"

예전과 달리 조금만 정아가 목소리를 키워도 정권은 곧잘 그녀에게 져줬다. 자주 살갑게 애교부리며 정아의 기분을 능숙하게 맞춰줬다.

"아니면 비엔나 갈까?"

"빈?"

"응, 보니까 거기도 네가 좋아할 거 같은 궁전 많던데······."

정권이 살갑게 그녀의 뺨에 입술을 쪽쪽거리며 속삭였다.

"사실 난 정아 너랑 가는 데면 전부 좋아."

"으음······ 그건 나도."

"진짜?"

"응."

쿡쿡거리며 웃는 정아의 목소리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을 붉혔다.

"사랑해, 정아야."

"응, 나도."

그녀의 짧은 대답에 정권의 표정이 묘하게 시무룩해졌다.

"끈데 왜 너는 사랑해, 까지 말 안 해 줘?"

"그냥."

"나 안 사랑해?"

"그건 아닌데······."

"그럼 얼른 사랑해, 까지 말해 줘. 응?"

그러더니 고양이처럼 뺨을 마구 부벼대며 살갑게 아양을 피웠다. 그 모습이 아직 낯설기도, 귀엽기도 해서 정아가 실없이 웃었다. 웃을 때면 한쪽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이는 것도 어쩜 그리 똑같은지, 둘은 한참을 꺄르륵거렸다.

"바보 같아."

"응, 나 바보 맞아. 정아밖에 모르는 바보."

"와, 실화냐. 개오글거려."

정아가 인상을 구기며 슬그머니 정권을 밀어냈다. 그러자 재미 들린 그가 일부러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정아의 허리춤을 붙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잉, 자기 너무행."

"아악!! 미친! 하지 마! 존나 소름 돋아!"

"말넘심······ 야 그건 좀 마상이다. 애인한테 존나 소름이라니."

그가 입을 삐죽 내밀고 서운하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뾰족 귀가 있다면 기운 없이 축 쳐졌을 법한 얼굴로 원망 섞인 말을 토했다. 그러자 정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좀 심했나······'

미안한 마음에 정권의 양 뺨을 쥐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괜스레 툴툴대듯 말을 뱉었다.

"야, 너, 그,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수줍은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가 귀여웠다. 정권은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눈매를 얄궂게 접으며 웃었다.

"응, 알아.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치?"

"맞아, 우린 반쪽이잖아."

정아가 그의 목을 그러안자, 정권은 화답하듯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몇 번 쪽쪽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은근슬쩍 그녀의 옷을 벗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근데 우리 이러는 거 엄마가 알면 어떡하지?"

그 말에 정아의 속옷 틈으ㅗ 파고들던 손이 멈칫했다. 침음하는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정권이 난감하다는 듯 대꾸했다.

"······일단 나 차 뺏길 듯."

"난 오피스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 둘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그러다 머지않아 서로 눈이 마주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안 들키면 되지."

"근데 안 들킬 수 있을까?"

"글쎄······."

"언젠간 들키겠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정아를 보며 정권이 걱정 말라는듯 살포시 웃었다.

"우리가 좋다는데 뭐."

"그래도······."

"왜, 서정아 너 설마 엄마가 다른 남자 만나라 그러면 나 버리고 바로 갈아탈 거냐?"

"뭐? 하, 나 참. 야, 서정권······! 넌 내가 그런 애로 보이냐?"

정아가 말도 안된다는 듯 펄쩍 뛰어오르며 반박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그럴 생각인가 보지? 그런 걸 묻게?"

"미쳤냐? 난 네가 다른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도 안 놔줄 건데? 정아야 우리 가족인 거 알지? 법적으로 부모 사이보다 형제 사이가 손절하기 훨씬 힘들다?"

"그래서 뭐, 어쩌게?"

"그래서 뭐 어쩌긴, 이미 나랑 질척하게 엮였다는 거지. 우리 사이는 이혼하는 것보다 한참 더 골치 아파서 끊어 내지도 못해."

정권은 농담 아니라는 듯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혹여 그녀가 먼훗날 후회하는건 아닌지 약간 우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그의 고민이 무색하게 정아는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맞받아쳤다.

"잘됐네. 그럼 아주 자알나신 서정권님께서 내 뒤통수치고 다른 여자 만날 일도 없겠어."

"뭐래, 내가 널 두고 다른 누굴 만나."

"혹시 모르지."

"혹시 모르긴."

정권이 작게 혀를 차며, 통통하고 말랑한 뺨을 매만졌다. 그러다 이내 신호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둘은 서로가 서로의 반쪽인 걸 증명하듯, 눈매와 콧대 그리고 입술까지. 정말 빼다 박은 것처럼 똑 닮아 있었다.

정권도 정아도. 단순하게 행복하다는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낯선 벅차오름을 느꼈다.

말캉한 잇새로 뜨거운 혀가 들어와 뒤엉켰다. 방 안에는 다급하게 옷을 벗기는 소리 그리고 점점 젖어 들어가는 신음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꽤 오랫동안 서로의 입 안을 탐하고 타액을 뒤섞던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눈을 떴다. 그러자 똑 닮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들은 그것마저 기분 좋다는 듯 배시시 웃으 보였다.

"사랑해, 서정권."

"나도 사랑해. 정아야."

정권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팬티를 벗겼다. 정아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 손길을 받으면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갈 거야?"

"빈 갈까?"

"응, 그럼 프라하도 갈래."

"이러고 있으니까 신혼여행 가는 기분이다."

"바보."

정아가 키득거리며 정권에게 쪽쪽 입을 맞췄다. 마치 여름의 장맛비처럼 쏟아지듯 그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었다. 정권은 이미 한껏 부푼 앞섶을 그녀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급하게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일상이었다.

정권과 정아 사이에는 단순히 사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타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단단하고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마음을 확인하고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건 고작 3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30년을 만난 부부보다도 서로를 잘 알았다.

"우리 나중에 진짜 신혼여행은 어디 갈까?"

"음······ 몰디브?"

"좋네, 바다 보면서 섹스하는 것도 황홀할 거 같아."

"뭐라는 거야, 변태. 넌 머리에 들은 게 그거밖에 없냐?"

정아는 투덜거리듯 말하면서도 입가에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눈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제 형제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는지 뺨을 맞대고 부비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기라도 하는 것처럼 꽉 끌어안고 살을 맞댔다. 그 행동에서 어딘지 출처 모를 편안함이 찾아왔다. 마치 아주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좋다······.'

이런 설렘, 이런 행복, 이런 사랑, 이런 믿음.

결코 일반적인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그 무엇보다도 견고하고 촘촘한 관계.

태어나기도 전부터 둘은 함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둘은 함께일 것이었다.

그들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서로의 반쪽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1.1 쌍둥이 에필로그

정권이 18살 때의 일이었다.

정아와 정권은 초등학교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 으레 남매들이 그러하듯 둘 또한 학교에서는 그다지 친한 척을 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면 정권은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축구를 했고, 정아는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산책을 하며 수다를 떨었다.

"아 오늘 급식 너무 부실했어."

"맞아, 코다리 진짜 싫어. 맛도 없고."

정아가 투덜거리며 매점에서 사 온 빵을 크게 한 입 물었다. 생선을 싫어하는 탓에 그녀는 코다리가 나오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매점 빵으로 배를 채우곤 했다.

그날도 운동장에 쭈그리고 앉아 친구와 함께 매점 빵을 먹고 있었다.

저 멀리 정권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축구를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해맑게 웃으며 공을 쫓아다니는 모양새가 흡사 개새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쟤는 저런 게 뭐 좋다고 하나 몰라.'

땀나서 찝찝하게.

정아가 속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축구를 구경했다.

한참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정권은 예비종이 울리자 수돗가에서 자연스럽게 세수를 했다. 사실상 말이 세수지 머리까지 흠뻑 적시고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친구들과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학교에서 꽤 논다 하는 여자아이들도 제법 얼쩡거리고 있었다. 정권에게 조금이라도 친한 척을 하려는 건지, 그는 별다른 대꾸도 않는데 꾸준히 말을 붙이는 게 용하다 싶었다.

그 장면을 보던 정아가 묘하게 미간을 구기고는 정권을 보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괜히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보고 있으면 기분만 언짢았다.

그런데 그 순간일까.

"야, 서정아."

익숙한 목소리가 정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정아가 저도 모르게 반응하듯 고개 돌리자 어느 틈에 온 건지, 정권이 머리에 묻은 물을 털며 정아에게 말을 붙였다.

"또 매점 빵 먹냐?"

"아, 물 튀어 병신아. 꺼져."

"너 다이어트한다며, 내가 도와줄까?"

꺼지라는 말에도 정권은 눈 하나 꿈쩍 않고 자연스레 허리를 숙였다. 순식간에 둘의 얼굴이 훅 가까워지며 눈높이가 같아졌다. 예기치 못한 행동에 정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얼굴이 붉어진 것도 잠시. 그녀가 어버버 거리는 사이 손에 들려 있던 따끈한 매점 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아의 입에서는 새된 비명이 흘렀다.

범인은 정권이었다. 그가 순식간에 정아의 빵을 낚아채 간 것이었다. 당황한 정아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정권은 키득거리며 도망쳤다.

"고맙다, 빵 잘 먹을게!"

뒤늦게 제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깨달은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이, 미친놈아-!! 내 빵 돌려줘!!! 나 점심도 못 먹었다고!!!"

그는 정말 빵이 먹고 싶었던 건지, 적당히 장난치고 돌려줄 법도 하건만 반 정도 남았던 빵을 모조리 제 입에 욱여넣었다.

"아, 개존맛."

"저, 저, 저 미친······!"

정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짓씹었다.

야속하게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까지 울렸다.

결국 정아는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교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서정권.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

5교시 수업이 끝나자, 정권은 기다렸다는 듯 제 친구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야, 나가자."

그러자 정권의 친구가 기겁하며 되물었다.

"지금? 나가자고? 미쳤냐? 어디 가게?"

"편의점만 후딱 갔다 오게."

"아 미친, 너 혼자 가. 나 이번에도 걸리면 벌점 쌓여서 징계라고."

"그럼 담 넘는 것만 도와줘."

"아니 편의점은 왜 가는데? 그냥 매점 가."

단호한 거절에도 정권은 제 친구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는 편의점과 가까운 학교 담장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담을 넘었다. 그러나 친구는 절대 무단 외출은 하지 않을 거라며, 담장 근처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겼다.

결국 정권은 혼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으로 향하는 와중에 문득 운동장 구석에 앉아 매점 빵을 깨작거리던 정아가 떠올랐다. 축구를 하면서도 빵을 오물거리는 그녀가 귀여워서 도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골이라도 넣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제 발을 원망하며, 바삐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녀가 매점 빵을 먹고 있던 이유.

'보나 마나 뻔하지.'

오늘도 코다리 나왔다고 급식 안 먹은 거.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유난히 음식을 가리는 그녀가 조금은 신기했다. 그러면서도 뻔히 몸에 안 좋은 매점 빵만 좋다고 사 먹는 게 영 거슬렸다.

'걔는 먹거리v파일도 안 봤나.'

그런 거 다 안 좋은 불량 식품이랬는데.

속으로 혀를 찬 정권은 편의점에서 바나나와 세척 과자 따위를 잔뜩 골라 집었다. 그러고는 정아가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까지 샀다.

매점 빵에 비하면 이런 게 훨씬 낫다며 신나게 담장으로 돌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편의점 봉투를 먼저 건네고, 담을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 어, 거기 누구야! 무단 외출!"

하필 교문 밖을 단속 중이던 선생님들이 정권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정권이 도망치려 하며 말했다.

"야, 야, 너 그거 편의점 봉투 서정아 전해 줘라."

정권은 편의점 봉투와 함께 친구에게 그 말만 남긴 채 다급하게 선생님들을 피해 도망쳤다.

그래봤자 얼마 가지 못해 잡혔지만.

***

"어라, 이거 뭐지?"

화장실에 다녀온 정아가 제 책상 위에 놓인 편의점 봉투를 보며 갸웃거렸다. 그러자 정아의 친구들이 대신 대답했다.

"아, 그거. 어떤 남자애가 너 자리 어디냐고 물어보더니 놓고 가던데?"

"엥? 그래?"

"응, 너 먹으라고 주면 된다더라."

정아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봉투 안을 살폈다.

봉투 안에는 제가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와 함께 바나나와 함께 세척 사과가 들어 있었다.

"혜민아, 혹시 이거 놓고 간 애가 서정권이야?"

"아 너 쌍둥이? 걔는 아니야."

"맞아, 서정권이면 우리가 바로 알아봤지!"

정아의 친구들이 곧장 대답했다.

말도 안 돼. 서정권이 아니면 대체 누구지?

정아는 혼란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다 이내 오렌지 주스를 뜯어마셨다.

'에라, 몰라.'

배고팠는데 잘됐지 뭐.

***

여느 때처럼 평범한 날이었다. 배고픈 탓에 정권은 수업에 제대로 집중도 않고 책상에 늘어져 잠만 잤다.

그러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된 건지, 시끌벅적한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잠에서 깼던 정권이 다시금 눈을 붙이려는 찰나였다.

"서정아? 아, 서정권 쌍둥이?"

"어, 걔 몸매 좆 되던데."

"나 중학교 때 들었는데, 걔 걸레래."

"엥 리얼루?"

"응, 뭐 선배들한테 몸 대주면서 담배 구했다던데?"

그러다 문득 들려온 정아의 이름에 정권이 감았던 눈을 떴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정아의 이름만이 또렷하게 그의 귓가에 울려왔다.

"걔 고등학교 오고 나서 이미지 세탁한 거임."

"맞아, 원래 존나 놀던 애랬음."

"근데 세탁해도 놀게 생겼어."

"솔직히 정권이도 대놓고 나쁜 짓만 안 하지 어울리는 애들은 좀 그렇잖아."

들릴 듯 말 듯하게 조잘거리는 말소리에, 정권은 엎드렸던 몽믈 일으키고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화의 주인공들은 반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존재감 없는 남자애들이었다.

그들은 정권이 잠에서 깬 줄도 모르고 연신 입을 놀렸다.

"근데 서정아는 왜? 너 설마 걔한테 고백하려고 했냐?"

"미쳤냐? 고백은 무슨 고백이야, 걍 먹버지."

"인정, 걸레긴 해도 한 번 대주면 이따다끼마······."

그러나 신나게 입을 놀리던 남학생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퍼억-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동시에 정권이 종알거리던 남학생의 머리를 책상에 처박았기 때문이었다.

정권은 머리를 으깨 없애 버릴 듯한 기세로 남학생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책상에 내리꽂았다. 그러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들아,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시원하게 째진 눈매가 살짝 접히며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생겼다. 분명 정권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어딘지 서늘한 기운이 흉흉하게 내뿜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연신 조잘대던 남학생들은 정권의 말에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합죽이처럼 곧장 입을 다물 뿐이었다.

살벌한 정권의 행동에, 시끄럽던 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주절대던 남학생들이 제 질문에 대답을 않자, 정권이 웃고 있던 표정마저 지워 버리며 다시금 물었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냐고."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정권은 제가 책상에 내리꽂은 남학생의 머리채를 쥐고 다시금 들어올렸다. 남학생은 코가 부러진 건지 피가 줄줄 흘렀다. 그가 고통 섞인 신음만 내지르며 발발 떨었다.

그런 그에게 정권이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씨발아, 다시 입 털어 봐. 뭐? 서정아가 걸레?"

정권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남학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미 코가 박살 나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에 무자비하게 주먹을 갈겼다.

"아악!"

그러자 얻어맞은 남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럼에도 정권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함께 떠들던 다른 이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서정아 먹버 한다고 한 새끼는 누구냐."

살얼음판처럼 차가운 정권의 물음에 아이들은 당연히 누구도 먼저 나서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냐고."

그가 짜증 난다는 듯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게 정권의 화를 더 돋운 건지, 참다못한 그가 막무가내로 아이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서정아가 뭐? 몸을 대주고 담배를 얻어?"

"으, 아윽-! 미, 미안, 나, 나는 그냥 들은 거······!"

퍽, 퍽 둔탁한 소리가 교실 가득 울렸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정권을 말리지 못했다.

"이상하네, 우리 정아 길에서 담배 냄새만 나도 혐오하는데."

아이들의 얼굴은 어느새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정아가 담배를 피운다고? 진짜 이상하네."

정권은 비속어 하나 섞지 않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웠다. 무심한 얼굴로 사람 하나 잡아 죽일 듯 주먹질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보통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을 때린다는 것에 잠시 갈등하거나, 머뭇거릴 만도 한데 정권은 그런 것마저 없었다.

"나보다 서정아 잘 아는 애가 있을 리도 없고. 응? 그렇지 않냐?"

교실 바닥에 널브러진 아이들은 덜덜 떨며 정권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읊조렸다.

그나마 정권과 친하다던 남자애들이 다가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너네가 뭘 안다고 우리 정아 얘기를 해."

웃음기 하나 섞이지 않은 얼굴엔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교실 주변에는 이미 다른 반 아이들까지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

"정아야! 너 쌍둥이 싸운대!"

"엥? 서정권이? 싸운다고? 누구랑?"

친구들과 조잘거리던 정아는 누군가가 외친 말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어지간하면 모두에게 살갑게 굴어 주는 성격 좋은 정권이었기에, 그가 싸운다는 것이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정아는 곧장 정권의 교실을 향해 달려갔다.

정권의 반에 도착한 순간, 싸운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교실 주변에는 아이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야, 누가 선생님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니냐."

"쟤네 반 반장이 담임 부르러 갔대."

뒤숭숭한 분위기에 당황한 정아가 아이들을 헤치고 정권을 찾기 위해 기웃거렸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정권이 누군가와 싸운다는 게 도통 이해 가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과 압도적인 피지컬로 자연스럽게 좀 논다 하는 애들이 정권에게 먼저 친한 척 접근하기는 했어도, 적당히 어울려 주되, 그들과 어울려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던 정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에서 싸우다니? 대체 왜? 누구랑?

어안이 벙벙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나, 정권은 정말로 싸우고 있었다. 아니 이걸 싸운다고 해야 할까.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패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장면에 정아가 당황하며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정권은 한 남학생의 위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피해 학생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폭력의 정도가 꽤나 심했다.

그에게 깔린 남학생은 얼굴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피떡이 되어있었다. 정아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서정권!"

그러자 그제야 정권이 주먹질을 멈추고, 정아를 바라봤다. 언제가 능글맞게 웃고 있던 눈매가 오늘따라 차가웠다. 살짝 구겨진 미간과 좁아진 눈가가 이질적이었다.

"아, 정아야······."

그러다 정아와 눈을 마주하자 정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평소처럼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기괴했다.

"너, 너, 지금 싸웠어?"

당황한 정아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때마침 선생님들 또한 다급하게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결국 그날 정아와 정권의 엄마는 학교로 불려 와야 했다. 그때 물어준 치료비와 합의금만 해도 꽤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문득 옛날이 떠오른 정권이 제 곁에서 색색거리며 잠든 정아를 바라봤다.

'귀여워.'

그녀의 양 뺨을 쥐고 사랑스럽다는 듯 조물조물 매만졌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쪽쪽거리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으으······ 뭐야. 너 안 자?"

"아, 미안. 깼어?"

"왜 안 자고 있었어."

정아가 졸음이 잔뜩 묻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옛날 생각나서."

"옛날? 무슨 옛날 생각?"

"우리 학교 다닐 때 생각."

정권이 정아를 품에 끌어 안으며 기분 좋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랑해, 정아야."

"뭐야, 갑자기. 바보. 나도 사랑해."

뭐가 됐던, 지금 행복하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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