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7)

-누구 말마따나 나는 못나서 남자친구 한 번 못 사귀고 엄마 아들 새끼한테 따먹힌 게 전부다 어쩔래, 이 개자식아!! 계속 그딴 말 할 거면 꺼져! 사람 속 벅벅 긁지 말고 집이나 가!!! 나도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 죽겠으니까!!!

그제야 아차 싶었다.

정권이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급하게 그녀의 이불을 젖혔다. 그러자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정아가 그를 째려봤다.

눈은 이미 붕어처럼 팅팅 부어 있었다.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으나 지금은 그걸 놀릴 상황이 아니었다.

"야, 서정아 너······."

정권은 목이 꽉 막히는 기분과 함께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정아가 그의 손을 쳐내며 뾰족하게 대꾸했다.

"뭐! 흑, 뭐 병신아! 뭐!"

"너, 너 설마, 너, 방금 처음이냐?"

"씨발, 그렇다면 어쩔 건데!! 꺼지라고 그냥! 꺼져! 집 가다가 차 사고나 내라! 비싼 외제차 들이받고 돈 몇백만원 훅 깨져버려라!!!"

정아가 씩씩대며 버럭버럭 소리쳤다. 정권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채 바보처럼 입술만 달싹였다.

"아, 아니······."

말을 해야 알지. 몰랐지.

그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제야 제가 했던 행동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세면대에 올려져 있던 딜도 때문이었을까. 정권은 당연히 그녀가 몇 번 경험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이었다니······. 방금 이게 처음이었다니!!!

"미친······."

정권이 바보처럼 말을 흘렸다. 머릿속에는 그녀를 놀리기위해 뱉었던 질 나쁜 농담들이라든가, 수치심을 주기 위해 수위 높은 단어들을 말하라 협박한 거라든가······ 정아를 배려하지 않고 후려친 엉덩이 따위의 것들이 둥둥 떠다녔다.

아무리 정권이라지만 그도 제대로 머리는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첫 경험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여자가 없다는 건, 그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황한 정권이 어버버 하는 사이, 정아는 다시금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훌쩍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망치로 제 머리를 쾅쾅 내려친 기분이 들어서, 정권은 한참을 벙찐 얼굴로 들썩이는 이불만 바라볼 뿐이다.

얼마나 더 그렇게 있었을까.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고 정아를 달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야, 그, 야 나는 몰랐지······."

"흡, 흐윽······."

"······미안해."

정권이 슬그머니 그녀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고, 시간을 돌릴수도, 지나간 처음을 다시 가져올 수도 없었다.

"흑, 씹새끼, 흐윽······."

"어······ 맞는 거 같아. 나 씹새끼 맞는 거 같아."

"알면, 흑, 꺼져 병신아."

"삐졌냐······?"

삐졌냐는 말에 정아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정권은 제가 실언했음을 깨닫고 재빠르게 헛기침을 뱉었다.

"큼, 크흠······ 미안."

"흑, 개새끼."

정권은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쓰려는 그녀를 말리고 엉망이 된 눈가를 제 옷소매로 닦아냈다. 그러자 정아는 별다른 투정 없이 가만히 그의 행동을 받기만 했다.

"그, 그 일단 울지 말아 봐. 응?"

울지 말라는 부탁의 대답은 늘씬한 가운뎃손가락이었다. 공격적인 그녀의 행동에 정권이 마른세수하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야, 그, 서정아."

"······."

"진짜, 진짜 미안해. 나는 그러니까 그 막 집에 딜도도 있고 하길래 당연히 경험 있는 줄 알았어."

정아는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정권을 외면했다. 덕분에 그녀의 머리맡에 걸터앉아 있던 정권만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살필 뿐이다.

"저, 정아야, 괜찮아?"

답지 않게 저를 걱정하려 드는 게 우스웠으나 그럼에도 기분은 영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정권도 더 이상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해가 잘 드는 널찍한 원룸 안엔 침묵만 흘렀다.

정아는 정권이 이럭헤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 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애당초 사과에 큰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둥글게 말아 접은 정아는 이불 밖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태 울어댄 탓에 숨소리마저 안쓰럽게 떨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정권이 한참 난잡하게 쑤셔댄 아래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몸이 무거웠다.

'짜증 나······.'

역시 혈육 같은 거, 쌍둥이든 뭐든 최악이라는 생각만 든다. 웬수 같은 엄마 아들. 못된 엄마 아들. 정아가 속으로 울분을 삭이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집에 가고 없겠지 싶어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 순간일까.

정권이 돌연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으며 곁에 함께 누웠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토닥이며 불렀다.

"정아야."

"······."

"서정아 씨."

그를 등졌던 정아가 못 이긴 척 힐끔 뒤를 돌아보자 정권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뺨에 쪽쪽거리며 입 맞췄다. 난데없는 뽀뽀 세례에 정아가 투정 부리듯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정권이 섭섭하다는 듯 눈매를 죽이며 물었다.

"정아야, 나 상종도 안 할 거야? 응?"

"······그렇다면, 흑, 어쩔래."

"미안해, 진짜 미안해. 많이 아팠어?"

정아는 대답없이 훌쩍이며 눈물만 닦았다. 그 모습을 보던 정권이 다급하게 제 손으로 그녀의 눈가를 훔쳤다. 그 손길이 퍽 다정했다.

사실 정권의 행위가 정말 싫었다던가 불만스러웠다면 진즉 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아는 그러지 않았고 어쭙잖게 장단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정권이 되지도 않는 저급한 말들을 늘어놓을 때도 제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거부했으면, 그는 순순히 물러났을 것이었다.

물론 조금 과격했던 정사라던가 따가울 정도로 맞은 엉덩이라든가 이런 것들도 내심 서럽긴 서러웠으나, 그래도 그건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정아도 아주 싫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막상 할 거 다 하고 나서도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태도의 정권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그러니까 정아는 정권이 저를 향해 최소한의 호감이라든가, 이성으로서의 마음 정도는 갖고 이런 행위를 한 줄 알았다.

그런데 관계 후 그의 말들이나 행동만 봐서는 호감은커녕 몸 하나만 보고 한참 뒹군 것 같지 않은가.

'나쁜 놈.'

뒤에서 정권이 안절부절못하며 제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으나 일부러 모른 체했다.

애써 정권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그가 둥둥 떠다녔다.

당연했다. 정아는 사실 원래도 정권을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잘 먹는 것도, 못 먹는 것도. 사사로운 취향이나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들까지 그대로 빼다 박은 것처럼 똑 닮은 정권을 정아가 싫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기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당초 정권은 어릴 적부터 여자얘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남자들은 곧잘 그를 질투하며 기새오라비라 불렀고, 여자들은 반반하고 호리호리한 정권에게 열광했다.

정아더러 대신 선물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친구들만 1년에 서너 명은 됐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그랬던 그였으니, 저 같은 건 여자로 볼 틈도 없었을 게 뻔했다. 어쩌면 대학 가자마자 여자친구를 사귀고 이런 행위를 잔뜩 했을 지도 몰랐다.

아니 어디 여자친구랑만 했을까.

허구한 날 주말에 친구들이랑 클럽이니 뭐니 가겠다며 까질러 나가던 것만 생각하면 소위 말하는 원나잇 경험도 잇을 것 같다.

깊게 생각할수록 괜히 기분만 나빠진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달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아야."

"······."

"미안해, 응? 내가 진짜 잘못했어. 미안해."

정권이 그녀를 어르고 달래듯, 발개진 엉덩이를 살살 문지르며 속삭였다.

"아니면 나 머리 박고 있을까?"

당장에라도 바닥에 머리를 박겠다는 시늉을 하며 그가 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아는 매몰찼다.

"······꺼져 쓰레기 새끼야."

한참 훌쩍인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 우스꽝스러웠다. 꺼지라는 말에도 정권은 꺼지긴커녕 더욱 정아에게 몸을 붙였다. 능청스러운 행동이 그답다고 느껴지면서도 미웠다.

"진짜 짜증 나······ 흑, 존나 억울해."

"뭐가 억울해. 응?"

"너 같은 쓰레기랑 한 게 억울하다 어쩔래."

정아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더욱 바짝 들어갔다. 등 돌린 그녀를 끌어안고 다정히 속살거리는 게 마치 연인 사이 같았다.

"나는, 흑, 처음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러웠다. 기껏 그쳐가던 울음이 다시금 비집고 새어나오려고 한다.

그런 그녀를 보던 정권은 한참 입술을 달싹이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그러다 이내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야, 그······."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정아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정권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나도 처음이야."

정아는 제가 들은 걸 믿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정권이 한 번 더 말했다.

"······ 방금 너랑 한 게 처음이라고."

"거, 거짓말-!"

"찐인데······?"

"그, 근데, 근데, 근데 왜 그렇게······."

놀란 정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권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참 그를 쳐다봤다.

"아, 아니, 근데, 왜, 왜, 그, 그렇게······."

믿기지 않아서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처음인데 그렇게 여체에 대해 능숙하다는 듯 애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좆을 흔들고, 보지니 자지니 하는 말을 내뱉는다고?

정아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은 정권이 제 기분을 풀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은 쪽으로 향했따.

"구라 치지마, 병신아. 안 속아."

"······진짜야."

다시금 돌아온 진짜라는 대답에도, 정아는 쉬이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너, 너, 그 클럽, 한참 가고 그랬잖아."

"야 그건 얘들이 얼굴마담 해 달래서 한 두번 간 거지. 그리고 나 그때 정관수술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라 어차피 하지도 못할 때야."

아, 맞다. 얘 정관 잘랐었지.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정아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보니 그 시기와 한창 클럽 다니던 시기가 조금 겹치기는 했다.

"여, 여자 친구는······?"

"너 내가 여자 친구 사귀는 거 봤냐?"

"하, 하지만 인기 많았잖아! 맨날 선물 받고!"

"그래서 그거 준 얘들이랑 사귀는 거 본 적 있냐고."

정권의 말에 옛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으며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없는 거 같다. 아니 없다.

항상 능구렁이 같은 얼굴로 살갑게 고맙다는 말만 뱉고, 누구 한 명에게만 특별하게 군 적은 없었다.

"왜, 왜······?"

이해할 수 없었다. 10대때부터 아이돌 연습생이니 뭐니 좀 예쁘다 싶은 얘들은 전부 정권에게 한 번씩 추파를 던졌었다.

지금이야 각자 다른 대학을 갔다지만 대학에서도 별반 다를 거야 없을 것이었다.

저 잘난 얼굴 어디 가는 거 아니니까.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잔근육은 정권이 쌀 포대만 걸쳐도 런웨이 같아 보이게 만들어 줬고, 190cm 가까이 되는 키는 웬만한 남자들의 질투 대상이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쪽 째진 무쌍 눈매와 뽀송한 피부를 타고났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까슬까슬하게 올라오는 턱수염은 정권에게 있어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막말로 그는 길 가다 아무 여자나 붙잡아도 먹힐 얼굴이었다.

꽤 여유 있는 부모님을 둔 덕에, 20살이 되자마자 선물받은 외제차만 해도 그랬다.

세상은 불공평하게도 정권은 완벽했고 이렇다 할 흠이 없었다.

하물며 직접 확인한 아래까지 완벽했다. 저렇게 잘났으면 2.9cm 소추남으로 태어날 법도 한데, 정작 다리 사이에 달린 건 팔뚝만 한 짐승이었으니, 대부분 남자들이 정권을 부러워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물론 그와 쌍둥이인 정아도 못난 건 아니었으나, 172cm라는 여자 치고 꽤 큰 키와 고양이 같은 눈매는 슬프게도 같은 여자들에게 인기였지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상은 아니었따.

대부분 기가 세 보인다든가, 키가 크다며 부담스러워했다. 저들이 땅딸보인 줄은 모르고.

"뭐가 왜긴 왜야. 안 좋아하니까 안 만났지."

정권이 묘하게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그, 그니까 왜 안 좋아해······?"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믿기도 어려웠다.

저 얼굴에 저 몸에 저, 저, 저 거시기를 가지고 21년동안 아무도 안 만났다고?

지나가던 길냥이가 웃을 법 했다. 정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내가 걔네를 좋아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그, 그건 없지만······."

머뭇거리던 정아가 점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안 좋아하는 여자랑 할 수도 있긴 하잖아. 네 주변엔 예쁜 얘들도 많으니까······."

말을 뱉다보니 자연스럽게 정권에게 치근대던 예쁜 애들이 떠올랐다. 당장 몇 주전만 해도 잘나가는 모델이 정권에게 sns를 통해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 일을 떠올리니 괜히 기분만 꽁기해졌다.

그리고 기분이 상한 건 정권 쪽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저를 뭐로 보면 안 좋아하는 애들이랑 그런 짓을 하고 다닐 것이라 오해한단 말인가.

"미쳤냐?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애랑 떡을 왜 쳐? 상상만 해도 극혐인데."

정권은 정말 싫다는 듯 오만상을 쓰고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문득 정아는 그 말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좋아하지도 않는 애랑 왜 하냐고? 상상만 해도 극혐이라고······?

그의 말뜻을 이해하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널뛰기 시작했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을 끔뻑이며 정아가 정권을 바라봤다.

"너, 너······ 그럼 나랑은 왜 했어?"

그러자 그녀의 질문에 정권이 순간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너 나 안 좋아하잖아. 근데 뭐 안 좋아해도 쌍둥이는 괜찮다 이거야?"

순간 이어진 황당한 말에 정권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무슨 개소리야."

그러고는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더욱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정아, 너는 눈치 중동 보냈냐?"

"뭐?"

"씨발, 세상에 롤 승급전 탈주하고 여동생 술 취했다고 데리러 가는 오빠가 어디 있어."

말투는 평소처럼 거칠었으나, 정권의 얼굴은 답지 않게 붉어져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왜 안 좋아해."

정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믿을 수 없었는지 반문했다.

"그럼?"

"······뭐?"

"그럼 뭔데?"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정권은 정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를 더욱 제 품에 끌어안을 뿐이었다.

뜨거운 숨결이 목을 간지럽혔다. 그녀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정권을 밀어내려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밀어내지 못하도록 더 세게 몸을 꽉 그러안기까지 했다. 어딘지 미묘해진 분위기에 정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래봤자 정권의 품 안이었지만.

"좋아해."

그녀의 움직임이 멎자 낮게 깔린 저음이 나긋하게 울려 퍼졌다.

"야, 장난······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둘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아는 마른 침을 삼켰고, 정권은 제가 뱉고도 민망했는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그 침묵을 깬 건 정아였다.

"야, 그래. 그럼 우리가 가족인데 좋아하지 안 좋아하냐?"

정아가 태연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정권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으나, 혹여 장난이었다며 키득거릴까 봐 일부러 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속을 정권이 모를 리 없다. 함께 태어나 자라온 세월이 몇 년인데.

괜스레 가족이란 변명을 둘러대며 회피하는 정아가 못마땅해서 정권은 일부러 못 박듯 다시 한번 말했다.

"가족으로 말고. 여자로."

"······."

"아직도 못 알아들었냐?"

"······뭐?"

"나 너 좋아한다고, 서정아. 가족으로 말고 여자로. 너만 보면 좆 서고 개새끼처럼 발정한다고."

어안이 벙벙해진 정아가 바보처럼 눈만 끔뻑였다. 그런 그녀의 뺨을 맞잡고 정권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쌍둥이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똑 닮은 고양이상 눈매가 서로를 응시했다.

"왜, 더 말해줘?"

"······뭐, 뭐를."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더 말해야 하냐고."

"······."

"좋아해,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진지한다는 건, 평소답지 않게 유독 빳빳이 굳은 입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정아 자신도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를 좋아한다 말하는 서정권. 분명 몇 번이나 홀로 망상했던 상황인데 현실이 되어 닥치니 입도 벙긋하기 어렵다.

"······거, 거짓말."

가까스로 뱉은 말이 고작 이거였다. 정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진짜야."

"왜? 왜 네가 나를 좋아해······?"

"나는 너 좋아하면 안 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정권이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의 등허리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엄청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

"너는 내 절반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유대가 좋았어. 내 눈에는 네가 제일 예쁘고 반짝이는 것만 같아. 그냥······ 늘 그랬어. 언제든지, 늘.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그랬을지 몰라."

떨림에 심장이 날뛰는 것과 별개로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현실성이 없기도 없거니와, 사춘기 즈음부터 저와 정권은 언제나 투닥거리며 다투기 바빴었기에, 그런 그가 제게 호감 섞인 감정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가족애적 감정이면 몰라도······.

정권이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 아니면 좆도 안 서고 다른 여자 만나고 싶지도 않은데······"

너는 다른 남자 아무렇지 않게 만난 줄 알고 심술 나서······. 그리고 어벙하게 굴면 괜히 전에 만났던놈들이랑 비교할까 봐. 그래서 일부러 짓궂게 굴었다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안절부절 못하며 정아의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혹 제가 너무 못되게 굴어 두 번 다시 상종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건 아닌지 초조하기도 했다.

"미안해, 정아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

"많이······ 그, 불편했어?"

정아는 아직도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다 슬그머니 정권을 올려다봤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제 눈치를 살피며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던 능글맞은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너, 너 진짜 나 좋아해?"

여기까지 온 마당에도 그녀는 정권이 사실 거짓말이었다든지, 몰래카메라였다든지 이따위 말을 뱉을까 봐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물었다.

"······진짜야."

"너 롤 계정 걸고?"

"야이씨······ 그렇게 못 믿냐?"

귀까지 붉어진 얼굴로 뭐 마려운 개처럼 쭈뼛거리는데 농이 아님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눈앞의 정권이 혹시 외계인은 아닌지, 누군가가 빙의를 한 건 아닌지 수천, 수만가지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그러다 재빠르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우리 생일 말해봐."

"······7월 1일."

"우리 혈액형은?"

"B형."

"내 가슴 사이즈는?"

"80A."

"야 이 변태 새끼야, 너 내 속옷 훔쳐봤냐?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제야 아차 싶은 정권이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정아를 꽉 끌어안고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몰라, 정아야 사랑해."

"야, 너, 너······!"

정아는 괜히 그에게 버럭버럭 소리치고 있었지만, 내심 두근거리는 심장을 숨길 수 있어 안도했다.

그러다 이내 정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쿵쿵대는 가슴을 달래여 했다.

'미쳤나 봐.'

서정권이 나 좋아한대.

정권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정아가 금요일 밤마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는 이유에 그가 9할 정도 차지했다.

불금이랍시고 클럽이니 감주니 헌팅이 난무할 장소에 나가 노는 게 영 탐탁잖아서, 그래서 일부러 나가지 못하도록 자정 넘어 늦은 시각까지 술을 들이켰다.

아무리 정권이 철벽을 친다 한들, 그는 동네 술집만 가도 온갖 테이블의 여자들이 힐끔거릴 정도로 잘생겼으며, 몇몇 이들은 노골적으로 다가와 추파를 던지기도 했고, 남자인 친구들은 곧잘 헌팅 목적으로 그에게 얼굴마담을 부탁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불금에 클럽, 감주 따위에 가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몸을 부대껴 올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정아는 일부러 정권이 금요일에 마음 편히 나가 놀지 못하도록, 되지도 않는 혼자만의 심술로 매주 친구들과 술을 들이켰다.

제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면, 정권은 곧잘 저를 데리러 와줬으니까.

친구들과 술자리에 있다가도 데리러왔고, 피시방에 있다가도 데리러 왔고, 클럽에 있다가도 데리러왔다.

정아는 그게 좋았다.

정권에게 제가 그것들보다 우선순위라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그게 그렇게 만족스러웠다.

"나는······."

정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 미워."

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숨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정권이 시무룩한 얼굴로 정아를 바라봤다.

"미안해."

"······너 못됐어."

정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말로는 그러면서도 정권의 허리춤을 끌어안고 꼭 안겨 있었다.

"······너때문에 허리 아파."

"······."

"아래도 홧홧하고 쓰라리고 따가워."

"그, 그게······"

"맨날 말도 밉게 하고······."

"하······ 미안해. 미안해, 정아야. 응?"

납작 수그리고 제게 잘못을 비는 정권은 낯설었다. 설설 기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승리감과 우우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애교 부려봐."

그래서 뱉은 말이었다. 그가 제게 무리한 요구를 했듯이, 똑같이 수치심을 주려고.

"애교도 부리고 나 아픈 곳도 호 해 봐."

정아가 악마처럼 이죽이며 그를 바라봤다. 정권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왜, 못하겠어?"

"······누님, 넓은 아량을 베풀어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응, 안돼. 안 바꿔 줘. 돌아가."

마지못한 정권이 시무룩해하며 조심스레 이불을 들쳤다. 그러고는 제가 한창 때려댄 엉덩이를 살폈다. 뽀얬던 엉덩이는 우악스러운 손자국과 함께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 모습에 정권이 죄책감을 느끼며 미간을 구겼다.

"하아······"

슬그머니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난잡하게 쑤셔댄 구멍까지 살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미친······."

제가 싸질러 놓은 정액에 옅게 붉은 피와 함께 섞여 있었다. 당황한 정권은 말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아니······ 미쳤어, 미친놈. 서정권 미친놈, 개쓰레기 새끼."

그러다 스스로의 뺨을 세게 내려치고는 곧장 정아를 일으켜 세웠다.

"저, 정아야 우선 업혀 봐."

난데없이 일으켜진 정아는 갑자기 뭐 하자는 건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뭐? 갑자기?"

"아, 아, 옷부터. 우선 옷부터 입고."

정권이 빨랫대에 널려 있는 옷들을 집어다 막무가내로 그녀에게 입혔다. 당황한 정아가 버둥거리며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야, 그······ 어떡하지. 일단, 그, 일단 맞을게. 일단 맞을 테니까 나 좀 때려 봐."

"아니 갑자기 왜 그러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정아가 인상을 구기고 물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를 향하자, 죄책감인 건지 정권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피 나."

"뭐?"

"너, 그, 밑에서 피 나······."

정권의 말에 정아가 잠시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널브러진 핸드폰을 들고 달력을 살폈다.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정아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때리는 거 다 맞을게. 우선 병원부터 가자. 응?"

그가 발을 동동 구르며 허겁지겁 차 키를 챙기고 겉옷을 챙겼다.

"거, 걸을 수는 있겠어? 허리 안 아파? 업어 줄까? 업히자. 그게 좋을 거 같아."

잠시 핸드폰을 보던 정아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아래에서 피가 난다는데도, 표정은 여전히 여상스러웠다.

"아, 생리할 때 됐었네."

"······어?"

이어진 말에 순간 온갖 호들갑을 떨던 정권이 멈칫했다.

"지금 시작하나 보다."

"······아?"

정권은 바보 같은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건지 얼간이처럼 되물었다.

"그, 그럼, 그, 처, 처음 해서 피 난 거 아니야?"

그 물음에 정아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는 듯 오만상을 쓰고는 혀를 찼다.

"뭐래, 멍청아. 야망가 좀 작작 봐. 현실에서 무슨 피야, 피는."

평소처럼 툭툭대듯 말한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나 씻는다."

정권만 거실에 덩그라니 남아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