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은 18세 미만 구독불가 였습니다-168화 (168/170)

168편

<-- 23. 드디어 마지막 입니다. -->

엄숙해야할 장내가 훌쩍거리는 소리로 요란이었다. 성전의 단상위에 선 에리나가 머쓱하게 코를 매만졌다. 잠겨 오는 목을 풀기 위해 몇 번의 기침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우, 울지 마세요. 오늘 저는 마지막이지만 새 성녀, 아니 성자분이 오시잖아요. 그분이 저보다 훨씬 더 이 자리에 어울리는 분이실 거예요. 애초에 마왕비인 성녀라니 웃기잖아요. 아니, 울지 말라니까 그러시네. 처음엔 그렇게 욕을 하시던 분들이 왜 이러실까”

성녀로서의 마지막 미사가 끝이 났다. 신자들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아쉬움에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지라 에리나도 이곳에 남게 되어 버렸다.

“가지 마세요, 성녀님!”

“딱 10년만 더 해주세요!”

“마왕님 잘 생긴 얼굴 한 번만 보여주세요!”

감동의 흐름을 깨는 마지막 말에 에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10년 전. 이례적인 성녀의 등장에 신전 안은 파란의 연속이었지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에리나의 진심과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짐을 느낀 주신이 자주 등장해 줌으로써 신자들의 마음이 다시금 한 방향으로 모였다.

다른 성녀들 보다 인간적인 에리나의 면모에 신자들과의 유대감도 돈독해졌고, 궁금했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 물어 볼 수 없었던 마계의 일까지 종종 들을 수 있어서 색다른 흥미도 느끼게 해주었다.

10년이 된 지금에서야 겨우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온전히 에리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됐는데 이렇게 떠나버린다니.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었지만 아주 짧게도 느껴졌다. 간만 보고 말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음 성자님이 잘생겼다고 하니까 마왕은 그만 찾으시고. 사실 이 곳에서 마왕을 찾는다는 게 웃기잖아요. 전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주신께서 노하세요. 나쁜짓 하지 마시고, 지옥불에서 저 만나지 마시고. 꼭 신의 가호가 있기를.”

팟!

맑은 날의 구름처럼 하얀 빛이 에리나를 집어 삼켰다.

“인사말이 너무 길어.”

주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보았던 바다의 망망대해 위가 아닌 금빛 잔디가 끝없이 수놓아진 언덕 위였다. 초록의 잎이 무성하고 지름이 넓은 바오밥나무 한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 있을 뿐이었다.

“예고좀 하고 이동시켜 줄래요?”

“예고할 시간이 어디 있어. 철부지가 엄마 보고 싶다고 난리인데.”

“마마!”

반가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케일이 류드를 안고 활짝 웃으며 서있었다. 손을 뻗자 류드가 날아들어 에리나의 품에 폭 하고 들어간다.

“역시 아빠를 닮았어.”

주신이 폭 하고 볼을 찌르자 류드가 손을 낚아채 입안에 넣어버린다.

“이도 없으면서 깨물기는.”

“류드 안 돼. 지지야. 지지.”

“내가 왜 지지야?”

류드가 베에엑- 하고 손을 빼더니 주신을 외면했다.

“어라? 너네 엄마가 너 가진지도 모르고 몸을 막 썼을 때 구해준 은혜를 모르고.”

“구해주기는. 게다가 딸이라면서요? 그 말만 믿고 이름이랑 옷이랑 다 여자 아가들 걸로 준비해놨었는데. 완전 돌팔이.”

“난 삼신 할매도 아니고 아기를 물어다주는 황새도 아니야. 이제 막 수정된 작은 콩같은 녀석을 내가 무슨 수로 성별을 확인해? 그냥 저녀석이 원하니까 그렇게 얘기해준거지.”

주신이 케일을 가리키곤 말을 이었다.

“태몽도 에리나가 원하는 방향대로 꾸게 해 줬잖아?”

“그래. 내가 믿을 신을 믿어야지.”

장난스럽게 말한 주신이 웃음을 거두지 않고 류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곧 각성하겠네. 이건 거짓말 아냐. 류드, 네발로 날아다니는 거 이제 질렸다 이거지?”

마족은 인간처럼 서서히 신체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총 세 번의 각성을 통해 외형이 변하는데 그 주기는 가지고 있는 마력에 반비례 한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의 모습으로 나누어 변하고, 성인의 모습은 각각 다르게 구현된다. 인간의 나이대로 따지면 20대가 될 수도 있고 70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모습은 젊은데 그 자식은 주름 지긋한 노인인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마족들이 각성을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은 에리나도 알고 있었다. 보통 1차 각성은 20년 주기로 찾아오기에 류드는 한 15년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건만, 그 보다 5년 빠른 시점에서 각성의 징조가 보인다니...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요?”

“아빠를 닮은 건 외모뿐만이 아니지. 당장 오늘 밤이나, 내일 각성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겠어. 대뜸 큰 아이가 찾아와서 엄마라고 해도 놀라지 마. 애 상처받으니까.”

“세상에 류드!”

쪽쪽 큰 소리가 나게 뽀뽀하자 기분이 좋아진 류드가 꺄르르 웃어댔다.

“자자, 오늘 여기로 부른 건 가족 경사때문이 아니라고.”

“아차,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요?”

케일이 다가와 에리나의 품에서 류드를 안아들었다.

주신이 나뭇잎 아래로 들어가 햇빛에게 숨더니 나무를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렸다. 세게 치지 않았건만 가지가 흔들리며 나뭇잎이 살랑거린다.

“짜잔, 성자 최초 공개. 이제 나와도 돼.”

“아, 그럴까요.”

허?

눌린듯한 목소리와 함께 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놀랍게도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니 지금껏 거기에 숨어있었던 거야 뭣하러?! 되게 멋없어’

본능적으로 들었던 의문은 찰나였고, 에리나는 모습을 드러낸 자의 미모에 잠시 동안 넋을 놓았다. 케일에게 단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몇 분이고 멍하니 굳어있었을 것이다.

“...아니, 성자라면서요? 왜 여자 분이 나오시죠.”

“어허, 성별을 착각하는 건 실례야. 이래봬도 어엿한 남자라고.”

언덕위에 햇빛이 녹아들어 머리칼이 된 듯, 성자의 금발은 눈이 부셨다. 그 아래로 백옥 같은 피부는 아기인 류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고, 투명한 연갈색 눈동자는 유리를 박아 넣은 것처럼 인조적인 아름다움을 풍겼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자 릭 바렛, 성녀님의 뒤를 이어 주신을 섬기겠습니다.”

“아니요, 전 별로 주신을 섬기지 않았…”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 어때 내가 새로 뽑은 성자가.”

“성녀는 외모순이었네.”

희대의 악으로 기억되지만 벨라의 미모 하나는 여전히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할 정도였다. 눈 앞의 릭도 벨라에게지지 않을 만한, 아니 오히려 이질적인 신비스러움 까지 더해져 벨라가 잊혀질 정도의 미(美)임이 분명했다.

“케일이 마왕만 아니었다면 다음 성자로 지목했을 거야.”

에리나가 주신을 경계하며 케일의 몸을 가로막고 섰다.

“하하! 날 너무 미워하는거 아니야? 슬퍼지려고 그러네”

“그럼 웃지 말고 우는 척이라도 해요”

“오늘처럼 좋은 날에 눈물은 안 어울리지. 그렇게 진저리 쳤던 성녀의 마지막 날이 아닌가”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요. 10년의 정이 있는데. 꼭 나쁜 사람 같잖아요.”

죽기보다 하기 싫었던 성녀. 일 자체 보다는 주신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 싫어서 였다. 그러나 자신을 찬양 하라는 주신의 말을 듣지 않고, 신자들과 에리나 본인 자체로서 만나 대화 하는건 꽤 좋았다. 그 시간이 10년 동안 이어지자 애착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나름 시원섭섭해 하고 있는데 무슨 짐 덜었다는 듯 몰아세우는 말은 불편했다.

“흐음-”

주신이 에리나의 어깨를 느리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왜 이래요?”

“수고했어. 물론 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녀 뽑아놔서 고생좀 했지만. 어찌됐든 신자들의 마음을 다시 신전으로 모으는 건 훌륭하게 성공했으니까 말이야.”

“10년 일했는데, 퇴직금 안줘요?”

에리나가 한 손을 내밀고 빨리 달라는 시늉으로 파닥 거리자 주신이 피식 웃었다.

“주신 권한 특별 퇴직금이 있지.”

“오오, 뭔데요? 웬만한 금액으론 어림도없어요. 내 남편 엄청 부자라 금을 산처럼 쌓아준대도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저”

“억만금의 배를 준대도 못사는 것. 성녀의 능력을 너에게 남겨줄게. 문을 열 수 있는 거 말이야.”

에리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실 성자가 누가 됐든 간에 주신 몰래 찾아가 빨리 문을 열으라고 협박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런 수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이만큼 만족스러운 퇴직금은 아마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요? 무르기 없기야!”

“대신사고 치면 당장에 능력 회수야. 인간 세상에 너무 관여하지도 말고. 도윤이 일은 그냥 한 번 넘어가 주는 거야. 심성이 맑고 고운 영혼이기에 다행이지.”

들킨걸 알고 있었구나. 민망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처음으로 에리나쪽에서 먼저 주신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잘 쓸게요!”

에리나가 그러는 것이 나쁘지 않아 주신도 손을 빼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때 에리나의 옆으로 무언가가 휘릭 날아갔다.

“어억”

“류드!”

케일의 목소리 덕분에 바람처럼 지나간 것이 류드인 것을 알았다. 류드는 릭의 품에 안겨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를 처음 안아보는 릭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세까지 엉거주춤 변해갔다.

“별일이네. 처음 본 사람한테는 잘 안 안기는데.”

릭이 제 주먹 보다 작은 얼굴의 아이를 내려 보았다. 예쁜 붉은 눈이 루비처럼 반짝인다.

“이름이 류드 군요.”

그렇게 방실방실 잘 웃던 류드가 웃지도 않고 멍하니 릭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손을 위로 쭉 뻗었으나 차마 얼굴에 닿질 않자 칭얼대기 시작했다. 놀란 릭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고 고사리 같은 손이 신기한 것을 만지듯 얼굴을 푹푹 눌러댄다.

“형아가 그렇게 좋아?”

에리나가 웃으며 묻자 류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릭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 주신이 턱을 쓸더니 한마디 툭 내뱉었다.

“첫 눈에 반했네.”

말을 듣고 놀랐지만, 에리나의 마음은 금세 아들의 귀여움에 사랑으로 물들었다.

“예쁜 형아가 좋았구나-. 우리 형아 보러 자주자주 놀러가자?”

재고 따지는 것 없이 본인의 감정에 솔직한 아이들은 하루에 몇 번씩 사랑을 하고, 늘 그 상대가 바뀌어 간다. 에리나는 이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할 때에도 조금은 끈질기게 릭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에는 릭에게 폐가될까 당황 했지만, 에리나가 짐짓 무섭게 이름을 부르니 금세 쪼르르 날아왔다.

릭은 남몰래 식은땀을 닦으며 마왕 가족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종종 이쪽으로 놀러와. 무료하니까. 류드녀석 각성 하면 꼭 들리고. 케일의 성장기를 다시 보는 것 같아서 눈이 즐겁다.”

“류드는 관상용이 아니거든요. 그럼 저희 이만 가요"

"그래, 푹 쉬어"

흐드러지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녀로서 주신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고, 눈 앞의 성자가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길고 길었던 여행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리나의 주위에 또 다른 사건들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고, 긴 삶을 사는 동안 이와 같은 여행이 두번은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바람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언제 어디서든 불 수 있었으며, 지평선 너머 아득히 먼 곳까지 뻗어간 푸른 물결위의 쪽배는 열심히 여행자를 태워 떠날 것이다.

"다음에 뵐게요. 성자님도 안녕히. 이제 가자, 머슨.”

그러나 지금은 집으로 돌아 갈 때이다. 바람은 잠시 멈춰서 나뭇잎 하나 흔들지 않았고 대지 가까운 곳에서 발목의 옷자락만 가볍게 스치고 있었다.

*

팟!

푸른 빛과 함께 마왕가족이 사라졌고, 릭은 그제야 깊은 숨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잠깐 안고 있었던 것 뿐인데 힘드네요. 혹시나 다칠까봐 계속 신경쓰느라 그런가.”

주신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옆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릭, 앞으로 고생 좀 할 거야. 마왕 혈통 이라는 게 말이야. 집착이 조금 남다르거든.”

“예?”

릭이 반문했으나 주신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기분이 좋아져서 폴짝 폴짝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갔다.

“주신님!”

릭의 외침은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공기 중에 흩어져버렸다.

〈그 책은 18세 미만 구독 불가 였습니다〉 -끝-

========== 작품 후기 ==========

*확인 못하고 올려요, 오타 엄청 많을거예요 죄송합니다ㅠ

수정과 함께 독자님들 코멘트, 후기는 내일 찾아 뵐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