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편
<-- 22. 또 넘어가 볼까요? -->
자동문이 아니었다면 문을 밀고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몸을 건물 외벽에 바짝 붙인 채로 게처럼 기어나가고 있는데, 몸이 전부 빠져나가기도 전에 케일이 보였다. 웬 질 안 좋아 보이는 남자에게 위협받고 있는 케일이.
묵은 변을 흘려보낸 후의 해방감도 잠시. 에리나의 눈에는 순하디 순한 어린 양 같은 케일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우리 남편한테 떨어져!”
에리나가 버럭 소리치자 일제히 고개가 돌아갔다. 끙끙 대며 몸을 비집고 나오는 폼이 꼭 성난 황소 같았다.
“뭔데, 떼로 몰려와서 우리 남편 겁을 주고 있어?”
어느 모로 보나 당하고 있는 쪽은 건달 같은 차림새의 남자들이었지 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꺾고 있던 케일이 남자의 손은 놓지 않으면서 오히려 반대쪽으로 손을 꺾었다. 마치, 케일이 당하고 있었던 것처럼.
“이, 이새끼 왜이래?”
손을 빼내려고 해도 악력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벙찐 표정으로 케일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종지부라도 찍으려는 것처럼 케일이 짧게 한 마디 내뱉었다.
“아야.”
“...?”
순간 벼락처럼 튀어나온 에리나가 남자의 팔과 옷깃을 잡고 가뿐히 업어치기로 땅에 내꽂았다.
“아흑, 커헉!”
약간의 이성은 남아있어 힘 조절은 했던지라,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지만 당장의 고통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패인 남자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몸의 상태를 살폈고, 정작 내쳐진 남자는 자신의 상태보다 수치심이 더 큰 듯 했다.
서둘러 남자를 부축해 차에 탄 무리들이 괜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경적소리와 함께 창밖으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해댔다.
등 뒤가 꽤 소란스러웠지만 에리나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일의 손목을 붙잡고 이곳저곳 살펴가며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급급했다. 팔이 잘려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던 케일의 모습은 새하얗게 잊은 건지 에리나의 쓸데없는 걱정은 표정위로 훤히 드러나 있었다.
부부는 닮는 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듯 서로에 대한 과보호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괜찮아? 뻐근하지 않아?”
“조금 욱신거리는 것 같아.”
“맙소사.”
에리나의 나라 잃은 표정에 케일이 참지 못하고 결국 웃어버렸다. 따지자면 소꿉장난 같은 이 유치한 행동들이 에리나 입장에선 그 어떠한 정극보다도 진중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아내를 품안에 안고 찡그린 얼굴 위에 입을 맞춰댔다.
“아앗, 야.”
“난 괜찮아, 에리나.”
“간지러워. 잠깐 멈춰봐. 어쩌다 저런 놈들이랑 휘말리게…”
“누나!”
에리나의 목소리가 먹혀들어갔다. 둘만의 세계에 심취해 있던 탓인지, 소란스러운 주위를 무시할 만큼 무신경했던 탓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 어떤 이유든 간에 에리나와 케일은 한 가지 상황을 간과하고 있었다.
“...미미 누나, 맞죠?”
이곳이 도윤의 가게 바로 앞이라는 것을.
*
해명해야 할 것.
하나, 인사도 없이 살아진 것. 둘, 텔레포트(마법) 시전 하는 걸 들켜버린 것. 셋, 도련님이라 소개했던 남자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던 것.
카페에서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카페테이블 위에 앉아있는 신세가 되었다. 도윤은 바쁜 가게를 뒤로 할 만큼 에리나와의 만남이 중요했기에, 남겨진 아르바이트생들의 원성을 사고, 보너스를 두둑하게 챙겨준다는 조건하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 안부와 같은 인사말은 오가지 않았다. 에리나야 늘 도윤을 지켜봐 왔으니 궁금할 것이 없었고, 도윤은 가만히 에리나가 주절주절 내뱉는 말을 듣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다 할 리액션이 없는 도윤 때문에 에리나는 괜히 입술이 말라갔다.
플라스틱 잔의 둥근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도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두 분은 부부였고, 이름도 가짜. 외국인 노동자라고 했던 것도 가짜라니.”
“나쁜 의도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에요. 그때 내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모든 걸 제대로 설명하기가 벅찼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에리나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네. 전부 이야기해주기엔 너무 멀고, 많은 것들이 그 속에 존재해요.”
도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 탓한다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날 밤. 빛 속으로 사라지는 걸 봤을 때. 마치 천사가 왔다 간 것 같았어요.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몇 가지 시험을 치르게 한 뒤 그 보답으로 보석을 남겨두고 사라지는 천사. 덕분에 이렇게 가게도 내고 감사합니다. 어머니한테 제가 본 걸 말씀드렸더니 그 주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라고요. 생전 종교 한 번 가져보지 않던 분이. 가끔은 수호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말씀도 하시곤 해요.”
“종교라…. 종교는 자유지만 우리 때문에 그럴 필요는 없는데. 사실 우리는 조금 더 덜 신성한 쪽이거든요. 어쩌면 많이 덜 신성할지도.”
“여전히 제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들이네요.”
에리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도윤은 많이 혼란스러웠지만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당장의 궁금증 보다는 에리나를 만났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고, 한편으로는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또 홀연히 떠나버릴까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럼, 늘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저와, 어머니 모르게.”
“매일은 아니고 시간이 날 때만 가끔. 만약 우리가 진짜 수호천사라고 치면 이 정도의 책임은 져야하는게 아닌가 해서…”
“그럼, 앞으로도?”
“의식하진 말아요! 들켜버렸으니 이제는 이것도 그만 하려고요. 그리고 충분히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고.”
그저 먼발치에서 아주머니와 도윤이 잘 살고 있는 모습만 보면 되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아주 조금만 도와주는 쪽으로. 그러나 지켜만 보겠다고 한 것도 뜻처럼 되지 않았으며 아주머니와 도윤은 에리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무리 하듯 이야기하자 도윤이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모, 모르는 척 할게요. 그냥 잠깐 꿈을 꿨다고 생각할게요. 그러니까, 조금 더 지켜봐줘요.”
“응, 꿈이에요. 전부 꿈. 그러니 언제까지 잠만 잘 순 없잖아요. 돈도 많이 벌었으니까 이제 그만 이사도 하고, 우리 기다리는 거 그만해요.”
에리나는 알고 있었다. 도윤과 아주머니가 그 낡고 허름한 집에서 10년 가까이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것을.
혹 다시 길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다 돌아오지 않을까, 한번쯤 얼굴을 보러 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차마 이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끔, 정말 가끔 보러와 줘요. 그… 조카도 궁금하니까.“
“류드예요. 지금은 너무 말썽장이라 데려올 수 없지만 좀 더 자라면 삼촌 얼굴 보러 한번은 와야겠죠.”
그제야 도윤의 안색이 밝아졌다. 언제 다시 만나자는 대략적인 날짜 하나 없었지만, 이 약속이 허구한 날 내뱉는 밥한 끼 하자는 가벼운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윤과 에리나의 가족은 꼭 다시 재회하게 될 것이다.
이어 몇 마디의 말이 더 오갔다. 에리나는 여전히 도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도윤의 감정이 상하지도 않았다. 집에서 아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도윤은 더 이상 붙잡지 않고 일어났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하룻밤만 자고 갈수는 없는 거냐고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8년만에 이렇게 갑자기 만났는데도 우리를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도윤씨가 그렇게 여기듯 내 삶에 있어서도 도윤씨와 아주머니를 만난 건 기적이에요. 이곳에서의 인연이 두 분이라 참 다행이에요. ”
에리나가 진심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짧은 날 동안 전달 받았던 따뜻한 온기를 에리나는 아주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
도윤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랬다간 아이 같은 응석이 나올 것 같았다. 에리나의 머릿속에 글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스크래치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야 남몰래 지켜봐준 사람이 ‘헛된 일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테니.
꾸욱, 참고있는 도윤의 앞으로 에리나가 다가왔다.
“오늘 만남은 아주머니한테는 비밀로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쉬워하실라.”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차, 그리고 꿈 이야기는 남한테 하는게 아닌거 알죠?”
작은 소리로 속삭인 에리나가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제 부적과도 같은 꿈. 물거품으로 만들긴 저도 싫어요.”
에리나의 만족어린 웃음.
지난 번 처럼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진 않았지만, 햇빛 쏟아지는 유리문을 열고 인파들 사이에 끼어 자연스럽게 걸어 나갔다. 야무지게 트레이까지 카운터에 가져다 준 뒤 말이다.
가게로 돌아온 도윤은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가게가 북적한 와중에 실수를 하면 일이 배가 되니 제 뺨을 툭툭 쳐대기도 했지만 정신이 차려지진 않았다. 화장실에가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니 조금 나은 것 같다.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새삼 이질적으로 보인다. 아니, 이질적인건 오히려 그쪽이였지.
“하나도 늙지 않았었어.”
8년. 인간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앳된 티를 벗어낸 도윤과 흰머리가 늘어간 아주머니는 시간속에 살고 있는데, 마치 에리나와 케일은 그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들처럼 여전했다.
“하아, 꿈이야 꿈.”
도윤은 중얼거리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는 못했다. 에리나와 케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어서 감사했고, 특별한 비밀은 지루한 일상 속에서 가슴을 뛰게 만드는 벅찬설렘으로 바뀌어갔다.
*
마주 잡은 손과 남은 손에는 아이스크림. 몸의 반동에 따라 흔들리는 그네에 가볍게 몸을 싣고 익숙한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리나의 옆에선 케일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었다.
“위로 올라가서 볼래?”
“아니야, 됐어. 이제 이정도면 충분해.”
대한민국 코스의 마지막은 바로 에리나의 옛집을 보는 것이다.
언니, 오빠들은 결혼해서 분가한지 오래고 좁아보였던 집이 이제는 넓게만 느껴진다.
주말이고 평일이고 할 것 없이 자주 들리는 언니, 오빠들 덕분에 남겨진 부모님 걱정이 한시름 줄긴 했다.
“머슨. 도윤씨 말이야. 죽어서 영혼이 되면 볼 수 있는 걸까?”
“눈에는 확실히 보여. 그런데 우리를 기억하진 못 할거야.”
“왜?”
“천계에 갈 테니까. 천계로 가는 영혼들은 이승에서의 기억을 잃게 되거든. 그러니 미련도, 걱정도 없이 새 삶을 천계에서 보내는 거야. 마지막 생을 잘 못 보내서 지옥불에 떨어진다면 하루에 수십 만 건에 달하는 명부에서 이름을 찾아 지옥문을 열고 만나는 방법도 있긴 해. 그런데 에리나가 그곳엔 안 갔으면 좋겠어. 보고 견디기에 너무 끔찍 할거야.”
“죄를 지은 영혼들은 기억을 가진 채로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거네”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하니까.”
“잠깐, 그렇다면 머슨 너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 아니야? 영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듣지 않았지. 지옥불에 관심을 두는 마족은 없어. 거긴 독립된 죄인들의 공간.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주신이 명부를 넘기면 문지기들이 문을 열고 영혼을 빨아들이면 돼. 그걸로 우리의 일은 끝이야. 죄지은 영혼들이 고통 속에 소리친다 해도 아무도 듣지 않아.”
깍지 껴 잡은 에리나의 엄지를 살살 쓸어주었다. 저음의 미성을 달콤했으나 말하는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막대를 타고 손을 적시는데도 에리나는 가만히 그것을 들고있기만 했다.
“그렇구나. 지옥불에 가면 잊혀지고, 천계로 가면 잊는 거였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 백년쯤, 아니 오십년쯤 지난 다면 가족들과 딸로서, 막내로서 대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침울했고, 시린 좌절감이 얼핏 찾아 들었지만 느껴오는 감정들을 받아드리진 않았다. 심장 안속으로 파고들려 할 즈음 숨을 크게 먹고 훌훌 털어버렸다. 그러나 잔잔한 아픔은 떨어지지 않았다.
“녹아.”
에리나의 앞을 가린 케일이 무릎을 굽히곤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된 에리나의 손가락을 핥아 주었다. 자꾸만 흘러내려 핥아도, 핥아도 금세 끈적해지고 만다.
“괜찮아. 너 머리카락에 묻어.”
케일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아이스크림을 쥔 손목을 잡는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거야.”
반 이나 남은 아이스크림이 전부 녹아 없어질 때 까지 케일은 멈추지 않았다. 에리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붉은 눈동자는 오로지 에리나 만을 담았고, 끈질기게 따라 붙은 시선 끝에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응.”
에리나는 케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핥아 올리며 제발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이 가엽게 느껴졌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에리나는 분명히 대답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너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하게 돼버렸어.’
고개를 숙여 케일에게 키스했다. 아이스크림의 단 맛과 시원한 촉감이 혀에 달라붙는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주신에 의해 틀어져 버린 인생이었지만 케일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에리나의 선택이었다.
어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새벽마다 가족들 생각이나 울컥하겠지만 이것도 에리나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에리나는 지금껏 잘 견뎌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새 가족이 생긴 지금. 행복할 날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