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편
<-- 22. 또 넘어가 볼까요? -->
빠아앙!
귀를 찢는 경적 소리에 에리나가 흠칫 놀랐다. 초록 불 한 칸을 남겨두고 횡단보도로 뛰어든 남학생들을 향한 경고였다.
“깜짝이야.”
에리나의 어깨에 팔을 두른 케일이 그녀의 팔뚝을 쓸어주었다.
“다른 생각 중이었어?”
“이 정도 소음에 저런 아찔한 상황이면 놀라는게 당연해.”
케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 에리나를 달랬다.
성녀일을 하고 있는 동안, 직업상의 특권인 ‘차원의 문’을 자유자제로 열어 종종 대한민국으로 넘어가 생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왕성에 남아있을 류드 걱정에 길어야 반나절 정도였지만, 에리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현 세계의 모든 것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케일도 이제는 아주 완벽히 적응중이다. 아니, 조금은 도가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사회이슈나 국제정세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는 상태다. 에리나는 케일을 향해 “무서울 정도의 적응력” 이라며 혀를 내둘렀고, 비렁뱅이로 대한민국에 떨어졌어도 주식부자로 성공했을 케이스라며 박수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 오면 코스처럼 늘 행하는 순서가 있다. 우선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한식으로 배를 채웠다. 에리나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건 케일도 그렇게 느꼈기에 메뉴의 선택은 전적으로 에리나에게 맡겨졌다. 청국장부터 시작해서 막창, 김치찌개 등 마왕성에선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주를 이루었다. 음식값으로 지불할 돈이나 경비 같은 것은 주신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구할수 있었고(소위 삥을 뜯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세르데벨라를 포함하여 전대 성녀들도 주신에게 자금을 받아왔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늘은 아주 맵다고 소문난 떡볶이를 골랐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눈물 콧물 쏙쏙 빼가며 흡입하는 에리나 때문에 옆에서 물 챙겨주랴, 휴지 뽑아주랴, 옷에 튄 소스 닦아주랴 케일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이렇게 든든히(에리나만) 배를 채우고 나면 도서관에 들리거나 영화관에가 문화생활을 즐겼고, 어느 날은 목적지 없이 거리를 빙빙 돌아만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빠지지 않고 들리는 어느 카페에 가서 늘, 앉는 1층 창가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단골이 된 케일과 에리나는 이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벌써 4번째 바뀌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곳을 고집하는 이유가 커피를 유달리 잘 내린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도 손님이 바글바글하네. 줄이 어디까지 있는 거야?”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위치한 한식당집 때문이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은 테이블로 시작했던 곳이 점차 확장하더니 이제는 2층까지 전부 차지해 버렸다. 오랫동안 지켜볼 만큼 관심이 있는 음식점이라면 가서 맛을 보는 것이 맞는 것이겠지만, 차마 뻔뻔하게 정체를 밝히고 먹을 순 없는 처지라 이렇게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도윤이 오늘 죽어나겠어. 아주머니는 아르바이트생 안 늘리고 뭐하는지 몰라.”
“투덜대는 것 치곤 표정이 밝은데?”
“간판 불 켜진지도 모르고 파리만 날리는 것보다야 낫지. 잘 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발 뻗고 자지도 못했을 거야.”
“흐음, 만약 잘 안됐으면 정체 다 밝히고 에리나라도 손님으로 찾아 갔을 거야?”
“찾아가기만 해? 너 앞에 세워두고 마법쇼라도 시켜서 관심이라도 끌게 만들지.”
“나 잘할 수 있어.”
“그럼. 누구 남편인데 당연하지.”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케일이 입동굴을 만들며 환하게 웃었다. 에리나가 손을 뻗어 올리자 자연스럽게 고개가 내려갔고, 머리위에 따뜻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을 잡아끄는 외모 덕에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케일이 에리나 앞에서 마치 잘 훈련된 대형견과 같은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라 아랑곳 하지 않고 도윤을 지켜보는데에만 전념 했다.
도윤은 검은 앞치마를 둘러메고, 가게 밖까지 뛰어나와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핸드폰 한 번 확인할 틈 없이 바쁘게 일하다가도 문득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살펴 볼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가 썰렁해진다.
“와, 방금 들킬 뻔 했지?”
빠른 반사 신경으로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간 에리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반면 창가에서 등만 돌린 채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앉아있는 케일은 행여나 모서리에 에리나의 머리가 찌일까 손으로 꼼꼼히 가려주었다.
“나도 검은 머리로 염색하고 올까봐.”
때 아닌 고생에 머리카락을 붙들고 툴툴거렸다.
“불편하면 모자라도 살까?”
“오늘은 됐고, 다음부턴 그렇게 하자.”
음료의 플라스틱 잔이 바닥을 보인지 한참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한두 명 씩은 꼭 있는 진상을 제외하고는 에리나와 케일의 도움이 필요할만한 별다른 큰일도 없을뿐더러 더 이상 지체했다간 마왕성으로 돌아가 류드를 볼 시간이 늦어졌기에 미련 없이 카페를 나왔다.
그런데 에리나가 카페 앞에서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에리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아랫입술을 꽉 물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댄다.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으려 입을 뗀 순간 에리나의 손이 덥썩 올라와 케일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잠깐, 일어서니까 배가…”
“응?”
“죽을 것 같아. 한계야.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로 발을 꼬아가며 다시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매운 떡볶이를 그렇게 먹어댔으니 대장이 요동을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졸지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케일은 카페 문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서 멀뚱멀뚱 에리나만 기다렸다.
생각했던 것 보다 화장실에서의 용무가 큰 것인지, 에리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열 번 이상 했는데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웬 이상한 놈들만 꼬이고”
“네, 뭐라고요?”
명함을 내밀던 연예 기획사 디렉터가 물었으나 케일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내 밀어진 손이 민망하게도 케일은 철저히 그를 무시했고, 디렉터는 머쓱해하며 엉거주춤 물러났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다 싶으니 욕을 해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생긴 것들이 얼굴값 한다고, 퉤! 재수 없어라!”
디렉터는 열 걸음마다 새똥을 맞게 될 자신의 운명을 예상하지 못했다.
디렉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여성 두 명이 볼을 발그레하게 밝히며 수줍게 걸어왔다.
“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불편 하시다면 제 연락처라도 드릴게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기에 케일은 이번에도 가볍게 무시…
“수아야!”
하려고 했으나, 음악 소리가 차창을 뚫고 나올 정도 까지 크게 틀어 놓은 붉은 스포츠카 한 대가 섰다. ‘수아’라 불린 여자가 몸을 흠칫 떠는 것을 보니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주차장도 아니건만 멀쩡히 영업하고 있는 카페 정문 앞에 차를 떡하니 세워 놓고는 남자 하나가 내렸다. 검은 반팔 아래로 문신이 그득하고, 촌스러운 금목걸이에 머리는 기름을 잔뜩 발라 올린 남자는 꽤나 험상궂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최수아. 내 전화 왜 안 받아.”
“헤어진 남자친구 전화를 내가 왜 받아?”
“뭐? 누구 마음대로 헤어져? 이게 또 까분다.”
키는 작지만 땅땅한 몸의 남자는 여자 입장에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럼에도 여자는지지 않고 따박따박 따져가며 남자의 말에 대항했다.
여자의 기세에 욱한 남자가 욕을 퍼붓기 시작했고, 그 불똥이 옆에 있던 케일에게 까지 튀었다.
“네년이 그렇게 깝치는 이유가 이놈 믿고 그러는 거냐?”
“왜이래, 오늘 처음 본 사람이야”
“그런데 그렇게 헤벌쭉 하게 웃으면서 꼬리를 쳐?”
“내가 마음에 들어서 번호 좀 따려고 그랬다. 왜!”
남자는 더 이상 여자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케일에게만 집중했다. 키가 큰 케일을 올려다 보는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괜히 어깨를 쫙 펴가며 목을 꺾어 우두득 소리를 내보인다.
“남의 여자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겠… 아악!”
내지른 주먹이 가볍게 잡혔고 손목이 반대로 꺾인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자가 고통어린 소리를 지르며 아파하자 붉은 스포츠카 안에서 장정 3명의 남자가 우르르 뛰어 나왔다.
“너 이 새끼!”
“자, 잠깐. 나 팔 나가 아아-!”
일단 크게 한번 내질렀으나, 붙잡혀있는 남자의 애원에 차마 다가가진 못 하고 그저 에워싸고 있을 뿐이다. 틈을 타 여자들은 자리를 떴고 케일은 썩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이면 에리나에게 혼날 것 같고, 적당히 두들겨 패기엔 적당히가 어느 정도 일까 고민이 되었다. 그냥 꺼져주면 좋으련만.
이때 머지않은 곳에서 에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차를 이따구로 세워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