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편
<-- 21. 그리고 시간은 또 흘러 -->
이런 상황에서도 꼭 대답은 잘만 한다. 결국 에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침대에 벌러덩 누워 급격하게 몰려오는 잠을 받아드리고 있었다. 따뜻한 물수건을 가지고 나온 케일이 그녀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고는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 마사지 까지 해준다. 그녀의 단잠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써가며.
에리나의 의식중 절반 이상은 이미 무의식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케일의 말을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고만 있었다.
“마님, 마님. 영화에선 그렇게 하던데 나는 잘 안되네. 좋은 꿈 꿔, 나의 마님.”
머쓱하게 웅얼거린 그의 말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
잘 여며진 암막커튼 덕에 에리나는 날이 밝은 줄도 몰랐다. 몇 시 일까? 주인이 떠난 옆자리는 이미 차게 식은 지 오래다.
“뜨하앗”
시원하게 몸을 쭉쭉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확연히 선명해지는 시야 사이로 오전 10시를 가리키는 시계의 바늘이 보였고, 조금은 게으름을 피우며 밍기적 이불을 걷어냈다.
“거의 동면하는 곰 수준인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자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열자 강한 빛이 쏟아졌고, 절로 눈이 찌푸려졌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활기가 돈 달까.
늦장을 부린 주제에 마음껏 여유를 부리고 있는 에리나의 뇌리에 아들 생각이 튀어올랐다.
“오늘은 류드가 얌전하…”
쿵쿵쿵!
“마왕비님, 마왕비님!”
하지 않네.
성급한 노크소리에 문을 열자, 사색이 된 하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조금 의외의 장소였기에 ‘사고의 현장’을 확인하기도 전에 표정이 굳어갔다.
“이제 오십니까.”
특유의 나른하지만 날이 서있는 미성이 들려왔다.
“...피에르, 어떻게 된 거예요?”
“보시다 시피.”
류드가 깔깔 웃어대며 피에르 주위를 날아다녔고, 피에르는 머리부터 검은 잉크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무표정하게 에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는 에리나에게 하녀가 사건의 자초지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피에르님이 왕자님의 검은 머리카락을 칭찬하니, 이렇게 집무실까지 쫓아와서는…”
“검은 잉크를 쏟아버렸다. 이거군요.”
“예.”
“하아-”
평소에도 케일에 대해 깊은 동경을 가지고 있는 피에르였다. 케일의 핏줄인 류드가 태어나는 날 레이넌 보다 더 기뻐했던 것이 피에르였고, 육아에 대한 무지한 그가 밤을 세워가며 공부 했을 만큼 관심도 많았었다. 여느 때와 같이 류드의 방에 몰래 들려 한껏 귀여워 해주고 나서는데 새끼오리처럼 졸졸졸 자신을 따라오길래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책상위에 두었던 잉크들이 전부 천장 가까이 치솟더니 말릴 틈도 없이 레이넌의 머리에 끼얹어졌다. 몸이 젖는 것은 물론이오, 처리하던 서류까지 엉망이 되어버렸다. 반면 류드는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가 되었다며 신이나 웃어대는 중이다.
“류드, 피에르 삼촌 머리 그만 잡아당기고 엄마한테 와.”
류드가 단숨에 품으로 안겨 들어왔다. 에리나는 미안해서 딱 죽고만 싶었다. 직급상 에리나에게 한 마디도 따져 묻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건 정말 ‘직급상’ 그러는 것뿐이지 속에서는 잔뜩 화가 나 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말하지 마요. 치아 사이에 잉크 들어가는거 너무 잘 보이니까.”
“절 두 번 죽이시는 군요.”
피에르는 소매로 앞니를 스윽, 닦아 냈다.
안절부절 하는 에리나와 달리 피에르는 정말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만들어 주려고 했던 류드의 마음이 예뻤고, 이와 같은 지대한 관심은 벅찰 정도이다. 레이넌처럼 감정을 크게 표현 하지 않는 지라, 티는 잘 나지 않았지만 살기를 전혀 띄지 않고 오히려 산뜻한 기운까지 폴폴 풍기는 피에르는 최상의 기분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미안해요. 이 서류들은 제가 케일한테 말해서 잘 설명 할 테니까…”
“이미 한번 봤던 것들이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야, 이 사기적인 캐릭터는.
“그럼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을까요?”
“없습니다.”
여전히 앞니를 문지르며 답했다.
단호한 거절에 할 말이 없어진 에리나는 멋쩍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전에 등 뒤에서 ‘아’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한 가지. 왕자님께서 제 집무실에 놀러오는 것을 꾸짖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눈이 휘어진 것을 보니 웃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
한바탕 사고를 친 류드를 데리고 세자인에 내려가자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 케일이 보였다. 오늘은 마을이 꽤 한가한지 이른 시간 까지 집을 지키고 있다.
만나자 마자 격한 뽀뽀세례를 받은 에리나는 머슨의 입술에 오랫동안 입을 꾸욱 눌러 입맞춤 해 주는 걸로 답했다. 소일거리를 마친 케일과 함께 집에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한 통이 눈에 띄었다.
편지 입구를 잘 봉해놓은 붉은 셀은 이제는 익숙한 문장이었다.
“체닌?”
“아직 읽어보진 않았어.”
프리차일드 남작가를 상징하는 문장.
엄연히 고유의 영지가 있는 새 영주님은 쉽사리 세자인으로 넘어와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사람이 전부 죽어나간 폐허의 땅을 가꾸고, 이제는 길목마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풍요로운 영지로 둔갑한 베른은 해가 거듭될수록 이주민들이 많아져 곤란한 처지라고 한다.
남편의 일로 인해 체닌 또한 베른에 발이 묶여버렸다. 시간이 날 때 마다 틈틈이 세자인에 들린 다거나, 날을 잡고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묵는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다.
케일에게 류드를 맡기고, 의자에 앉아 천천히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영원한 친우이자, 존엄하신 마왕, 마왕비님께. 실로 오랜만에 소식을 적어 보내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첫 줄을 읽자마자 코웃음 쳤다.
“촌장님한테 귀가 닳도록, 질리도록 소식 듣고 있는데 뭘. 크흠. ‘류드 왕자님께선 잘 지내고 있는지요. 얼굴 뵌 지가 너무 오래돼서 애가 탈 지경입니다. 정말 다행히도 마왕님을 빼닮아 미색이…’”
꾸깃.
“에리나?”
“아, 미안. 왠지 글로 욕먹은 기분이 들어서.”
손 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다시 곱게 펴고 마저 읽어 내렸다. 문체만 경어이지 그 속에 숨어있는 장난 끼는 여전했다. 최근 마지막으로 본 1년 전 까지만 해도,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이상한 투로 대화하곤 했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반말을 해“ 라고 에리나가 얘기했으나,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라며 받아칠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더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대략 마지막 까지 편지의 내용은 비슷했다. 에반과 깨 볶아 가며 사는 소소한 일상과, 영지의 자잘한 사건사고들,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 여러 말.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에 가볍게 웃으며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줄을 읽기 전 까지는.
“‘...추신. 깜빡하고 이야기를 못 했는데, 저와 에반의 사랑스러운 2세가 태어났습니다.’ 뭐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름은 비앙카 프리차일드. 저, 체닌을 닮아 아주 예쁘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부디 영지에 들려주세요.’”
“딸인가 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번주에 온 편지에도 저저번주에 온 편지에도 임신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써 있지 않았는데?!”
“깜빡했나 봐.”
“깜빡할게 따로 있지! 게다가, 추신에 출산소식을 쓰는게 아니라, 본론에 써야하는 거 아니냐고! 촌장님은 아실까? 아니지, 그 입 가벼운 촌장님이 잠자코 있었을리 없어. 와, 이거 제대로 서프라이즈 인데?”
체닌과 에반의 결혼 8년 만에 본 아이였다. 한창 불타오를 신혼 때에도 영지에 관한 문제로 눈코뜰새 없이 바빠 섣부르게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질 즈음엔 바람과 달리 아이가 찾아와 주질 않았다. 부러 말하진 않았지만 체닌 부부 만의 걱정으로 자리 잡아 마음을 졸여왔음이 틀림없었다. 늘 무소식으로 일관하던 아이가 기승의 연결없이 이렇게 갑자기 뚝 하고 출산이라니.
에리나는 곧장 촌장님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촌장님이 편지를 부여잡고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류드엄마…”
“촌장님…”
거칠게 부둥켜안고는 촌장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사실 촌장님은 임신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다만, 지난 세월 아비츠백작가에 있었던 일들로 인해 체닌의 몸은 극도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고 최악의 경우 뱃속의 아이가 잘 못될 가능성도 있었다. 촌장님이 좋지 않은 소식을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헤픈 입은 아니었기에 모른 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 아닌 경사에 그날 밤 마을에서 즉석 잔치가 일어났고, 체닌의 몸이 괜찮아 지는 대로 아이와 함께 세자인에 들린다고 하니 모두들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다.
에리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베른에 가서 체닌과 아이를 만나보고 싶었지만, 이제 막 출산한 산모에게 너무 일찍 방문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 더 시간을 두기로 했다.
“류드, 친구가 생기겠네.”
“찌구?”
“응. 체닌 이모한테 딸이 태어났대. 나이로 따지면 류드가 오빠니까 잘 챙겨줘야 해?”
류드의 붉은 눈이 반짝 빛을 냈다.
“웅!”
생전 처음 듣는 ‘오빠’소리에 나름의 책임감 비슷한 것이 스며들었다. 베른 영지에서 갖게 될 새 만남은 류드에게도 작은 기대의 불씨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