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편
<-- 21. 그리고 시간은 또 흘러 -->
구름 같이 흰 뺨을 아프지 않도록 꼬집었다.
“아빠 보러 갈까?”
케일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밀린 집무 때문에 잠도 못자고 서류에 사인만 해가는... 줄 알았으나, 에리나와 류드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세자인이었다.
이제 텔레포트 정도의 마법은 숨 쉬는 것처럼 쉽게 시전 했다.
오두막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아빠 케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 류드가 꺄르르 웃어댔다.
“어, 어”
아빠를 찾기 위해 공중으로 기어가는 류드를 간신히 안아 들었다.
“여기선 마법 금지라고 했지.”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보기에 성장이 한참이나 늦은 류드는 마을사람들을 만날 때면 투명한 물색의 마법 약을 먹어야 했다. 8살의 나이에 맞게 외향을 변화시켜주는 약인데, 지속시간은 길어야 반나절 이고, 외향을 변화시켜 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성장도 진행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말을 하는 법이라던가, 사고하는 능력, 인내 같은 것 말이다.
쾌활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류드는 약을 마실 때면, 어쩔 수 없이 소심한 아이로 변해야 했다. 에리나의 다리 뒤에 숨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수줍음 많은 아이가 된다. 이것도 에리나가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위장이었지, 아니었다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마을을 활보하다가 맘껏 즐긴 후 졸음이 쏟아질 즈음에는 세자인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으리라.
에리나에게 꼼짝없이 잡힌 류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오밀조밀 작은 입을 움직였다.
“마마?”
아빠는 어디에 있냐는 물음이었다.
평소 같으면 단숨에 달려와 에리나와 류드를 안고는 애정담긴 키스를 퍼부어야 할 케일이었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려주듯 오두막은 한적하기만 했다.
“잠깐 일 나갔나보다. 조금만 기다려 보다가, 늦는 것 같으면 우리가 마중 나가 보자.”
알아듣기는 척척 잘도 알아듣는 류드가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게 됐다.
씩씩한 류드를 귀여워 해 준지 10초도 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여름의 따가운 빛이 들어 왔다.
“머슨!”
“마스!”
에리나가 부르자 류드가 따라 목소리를 내었다. ‘아빠’ 라는 말 보다 ‘마스!’라는 말을 먼저 익혀 케일을 부를 때면 늘 저 호칭이다.
오래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고, 오늘 아침 마왕성에서 같이 식사까지 했으면서 몇 년 보지 못한 가족처럼 반가움과 그리움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류드가 케일을 향해 두 손을 뻗었고 에리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케일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너 뭐야?”
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에리나가 물었다.
“지금은 안을 수 없어.”
“지금이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안아주고 싶다는데 때가 어디 있어?”
“아니야, 그래도 지금은 좀…”
케일이 울상 지으며 에리나를 막듯이 두 손을 뻗어 왔다.
“류드 완전히 속상하겠다. 아빠 보고 싶어서 인간계 까지 내려 왔더니, 아빠는 정작 자식과 부인한테 내외 하는 꼴이라니.”
“마스!”
케일이 안절부절 하며 에리나 쪽으로 발을 떼었다가 다시 멈췄다가를 반복한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만 봐도, 타는 듯 한 더위가 느껴지는데 케일은 선뜻 오두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태양 빛을 그대로 받으며 밖에 서있는 상태다.
“어허?”
에리나가 인상을 쓰며 소리 내자 케일이 힐끗 뒤를 돌아본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크리에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여 들어가 씻지 않구 뭐혀~ 날도 더워서 고생혔을텐디. 이따가 색시랑 저녁 먹으러 오드라고!”
에리나는 크리에타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야 케일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케일은 본업이 마왕인데도 불구하고 젊은 인력이 없는 세자인에 남아 간간히 일손이 되어 주었다. 마왕성의 간단한 일처리는 늘 그랬듯이 충직한 신하인 레이넌이 맡아 주었고, 마왕의 동의가 꼭 필요한 사안 같은 경우는 마족들이 직접 세자인으로 내려와 사인을 받아갔다. 뿐만 아니라 마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위급한 상황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자인에만 주구장창 있는 것은 아니었다. 류드가 태어나고부터 잠은 꼭 마왕성에서 잤고, 잊지 않고 행하는 마계 간행과 더불어 매일 같이 집무실에 들려 전 날 레이넌이 결제한 서류를 살펴보기도 했다. 오전의 마왕성 일과가 끝나면 출근하듯 세자인으로 떠나는 것이다.
왜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냐며 레이넌이 그를 말렸지만 이미 이것은 에리나(절대권력)와 상의가 끝난 문제였기에 레이넌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처음 세자인에 왔을 때처럼 일을 도왔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하위 마족들도 인간으로 위장을 하고선 세자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케일이 꼭 오전부터 세자인에 붙들려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이렇듯 케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자인에서 일을 도왔고, 저 멀리서 크리에타의 감사 인사가 들린 것을 보면 오늘은 외양간에 갔다 왔음이 틀림없다. 에리나도 몇 번 겪어 봐서 알 듯이 하는 일은 소들은 엄청난 변을 치우는 것. 그의 몸은 땀과 그 외 여러 가지가 섞인 오물들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뒤에 서있던 크리에타로 인해 마법으로 씻지도 못했을 것이다.
“흐응”
에리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물 범벅인 채로는 부인과 자식을 안아 줄 수가 없다는 뜻.
“알겠어. 들어와.”
“안지 않을 거야?”
“물론.”
케일은 보았다. 에리나의 눈에 스친 참을 수 없는 장난끼를. 그러나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선한 얼굴을 하고선 문 앞에서 몸을 틀어 주자, 순진한 마왕은 방금 전에 본 것을 잊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 섰다.
“류드 잠깐 여기에 앉아 있어. 착하지?”
쿠션이 깔린 푹신한 아기의자에 류드를 내려 놓았다.
케일이 문을 닫으려는 순간 덮치듯 에리나가 달려들었다.
“에리나 잠깐…”
목을 끌어안아 상체를 내리고는 입술과 뺨에 ‘쪽’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도록 뽀뽀를 퍼부었다. 당황한 케일이 그녀를 떼어놓으려 해도, 에리나가 다칠까봐 힘을 주진 못하고 애꿎은 옷자락만 잡을 뿐이다.
“귀여워, 귀여워”
“냄새 나, 에리나… 으읍, 그만!”
케일은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에리나의 거침없는 애정표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손이 더럽지만 않았어도 당장에 두 뺨을 쥐고는 작은 입안을 오랫동안 맛봤을 것이다.
케일이 귀가 빨개진 채 당황하고 에리나가 재밌어 웃자 그 모습이 우스운지 류드의 입도 귀에 걸렸다.
‘쪽!’
케일의 입술에 조금은 긴 시간동안 입술을 마주 대다가 부러 큰 소리를 내며 떼어냈다.
“아, 즐거웠다.”
"하아..."
‘탓!’
케일이 손가락을 튕기자 피부위에 닿은 꿉꿉한 감각과 역겨운 냄새들이 사라지며 청량함이 머리카락 사이사이 까지 맴돌았다.
마법으로 몸도 씻었겠다, 걸릴게 없는 케일이 이번엔 오히려 에리나의 허리를 느긋하게 감아왔다. 어느덧 욕망을 숨기지 않고 뇌쇄적이게 변한 눈동자에 에리나의 얼굴이 가득 담긴다.
케일이 키스할 것처럼 고개를 꺾으며 얼굴을 내렸다. 그러나 입술은 닿지 않았고 그의 뜨거운 숨결만이 퍼질 뿐이었다.
“이제 내 차례지?”
반쯤 내리깐 눈 위로 보이는 긴 속눈썹이 자극적이었다. 닿을 듯 말듯한 입술 사이로 야릇한 긴장감이 흐른다.
에리나가 허리위에 닿은 케일의 손등을 쓸었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검지를 슬쩍 떼어낸다.
“아니, 이제 류드의 차례야.”
“...”
“마스!”
피융! 소리와 함께 어느새 공중으로 뛰어오른 류드가 재빠르게 케일의 품에 안겨 제 보드라운 뺨을 비벼댔다.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으나, 왜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허전함이 먼저 찾아 들었다. 에리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숨기지 않고 푸하! 웃어보였다.
========== 작품 후기 ==========
*한 편 더 올라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