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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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신자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벅벅 비비기도 하고, 머리를 거세게 내려치기도 한다. 여느 주와 같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신전 안으로 온 것까진 좋았으나, 단상 위에 성녀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늘 보아왔던 분홍머리의 성녀는 보이지 않고, 이례적인 검은 머리의 붉은 눈을 한 남자가 엄청난 위엄을 뿜어대며 서있었다.
본능 적으로 몸이 굳고 털이 쭈뼛 섰다. 남자의 표정은 험악했다. 좁혀진 미간과 굳게 다문 입술은 묘하게 비틀렸다.
성가를 부르던 자들도 가사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할 만큼 남자의 눈치를 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하아-”
남자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오자, 그에 맞춰 음악도 소리를 내던 목소리도 뚝 끊겨버렸다. 성전 안에 들어찬 모든 이들의 몸에서 폭포수와 같은 땀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매서운 눈을 하고선 성가 지휘자에게 말했다.
“뭐하나, 계속하지 않고.”
“예, 옙!”
쫓는 사람도 없는데 노래가 급격히 빨라졌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지휘봉이 격정적인 오페라를 연주하는 그것과도 같았다. 세 곡을 4분 만에 단숨에 내리 부른 성가대가 헥헥 거리며 도망가듯 퇴장했다.
“다음 진행.”
남자, 마왕 케일은 미사가 일찍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리나의 출산이 임박하자 세자인에서 머물던 거취도 마왕성 으로 옮기고, 부른 배를 하고서 미사에는 꼭 참여 하던 것도 오늘이 돼서는 텔레포트 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케일을 보낸 것이다.
케일은 한시라도 빨리 마왕성으로 돌아가 에리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통증이 오른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땀을 닦아주며 사랑어린 말을 쉬지 않고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미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렀다.
조금은 성의 없게, 조금은 빠르게 미사가 진행되었고 이윽고 주신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찾아왔다. 주마다 빠짐없이 에리나의 몸에 들어갔기에 새로 생겨버린 순서였다. 그러나 주신이 케일의 몸에 들어갈리 만무했으므로 이 시간은 오로지 케일의 것이었다.
모두가 마왕의 눈치를 살폈다. 단상앞에 선 그는 신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금기를 범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매력이 깃들어있었다. 공간 안에서 이질적으로 튀는 그를 한 번 바라보면 눈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다. 다부진 체격과 훤칠한 키, 넋을 잃게 만드는 이목구비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신자들은 불경스럽게도 기대하고 있었다.
장내를 한 번 훑은 케일이 입을 열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신자들을 위한 기도도, 입에 발린 형식적인 기도도 아니었다. 상황과 맞지 않은 전혀 생뚱맞은 말이 튀어나왔다. 수녀중 한 명이 용기내어 케일에게 다가갔다.
“아, 아직입니다. 지금은 성녀님의… 아니, 마왕님…. 이것도 좀 이상한데. 여하튼 말씀을 전하는 차례입니다.”
“뭐? 그렇다면 언제 끝이 나지? 에리나가 보고 싶단 말이다”
팔불출. 주책맞은 발언이었으나 아무도 비웃지 못했다. 케일은 진심으로 짜증이나 그것이 표정위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마, 말씀을…”
“아프지 말고, 건강히.”
대충 내뱉었다. 인간들은 대부분 건강히 오래오래 사는 것을 염원하니 그들의 시선에 맞춰 나름 짧게(많이 짧게)고민 한 것이다.
헤블은 남몰래 땀을 닦으며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십자가 앞에 서서 미사를 진행하는 마왕이라니. 인간의 기준으로 짧지 않은 생을 살면서 가장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차라리 내가 할 것을 그랬어.’
에리나가 헤블에게 미리 언질만 줬었어도, 성녀 없이 헤블이 직접 진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일 날 급격히 안 좋아진 컨디션 때문에 미사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임시방편이자 성의로 케일을 보낸 것이었고, 나름의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그렇게 흐지부지 미사가 끝이 났다.
허망한 미사에 몇몇은 욕을 내뱉고 싶었으나, 내내 느꼈던 마왕의 위압감에 다들 속으로만 꾹 삼킬 뿐이었다. 행여나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마왕에 대한 반응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뭇 신자들의 가슴에 불길이 솟구쳐 팬클럽이 형성되고 있었다.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마왕님. 케일이 다시 오는 그 날을 기리는 여신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성녀가 왜 꼭 여자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커져갔고, 주신의 귀에는 성녀 말고 성자를 뽑아 달라 라는 기도가 폭발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그날 새벽.
“으윽…!”
“에리나!”
“아읍!”
“에리나!”
“아아악-”
“에리나!!”
케일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이 에리나의 이마위로 떨어졌다.
“아윽! 너 시끄러워!”
에리나에게 한 소리를 듣고 나서야 케일의 입이 다물린다. 양수가 터지고 11시간의 진통 끝에 자궁 문이 열렸다. 마왕성은 그야말로 초 비상상태. 모두가 밤을 꼴딱 새며 새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초산인데도 불구하고 에리나는 의연하게 잘 버텼다. 그러나 오히려 난리법석 인건 마왕인 케일쪽. 마족들이 보기에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던 그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에리나의 분만 자체도 마족들 사이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었지만, 케일의 안절부절 하는 모습도 만만치 않은 화젯거리였다.
“으윽! 아이는 서른다섯 먹고 낳으려 했는데…!”
뜬금없는 에리나의 고백에 케일을 제외한 마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를 받기 위해 준비하던 하녀마저도 손을 잠시 떨 정도였다.
서른 다섯. 마족들의 기준에선 다섯 살 짜리 어린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너무도 적은 숫자였다. 마왕비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나이를 들으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천년 단위의 연상인 케일은 에리나의 말에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에리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에리나”
에리나의 손이 빠져나와 케일의 멱살을 확 비틀어 잡으며 있는 힘껏 당겼다.
“아아악!”
“나, 나오고 계십니다! 조금만 힘을…”
엉거주춤 위태롭게 서있던 케일은 행여나 에리나의 얼굴에 박치기를 할까봐 적절히 힘 조절을 해가며 거리를 유지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잔뜩 힘을 주느라 얼굴에 핏줄이 다 터져 버린 에리나의 모습에 케일은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에리나가 멱살을 붙잡고 있는 탓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턱 밑으로 보내야만 했다.
에리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호흡하랴 힘을 주랴 고통을 참아내랴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다. 오랫동안 힘을 주고 있으니 여기가 지옥이 있는 마왕성이 맞긴 맞구나 했다. 옆에서 자꾸 코 먹는 소리가 들려서 무의식 적으로 눈을 돌려 보니 케일이 울며불며 난리가 났다.
에리나도, 케일도 그리고 아이 마저 힘든 순간이었다.
‘빨리 끝내자!’
안간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길게 힘을 주자 따뜻한 것이 다리사이로 쑤욱 빠졌다.
“좋습니다! 이제 힘을 빼세요!”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꽈악 쥐고있던 멱살을 놓고 허한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미끄덩 한 것이 전부 빠져나갔다. 이어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에리나는 눈을 뜨는 것조차 벅차왔다.
“왕자님이십니다!”
품으로 다가오는 아이와 케일을 양 팔로 안아주고는 감동과 기쁨이 혼합된 눈물을 흘렸다.
“반가워, 아이야.”
이렇게 가족이 한 명 늘어갔다.
*
우당탕!
퍼엉!!
“왕자님!”
하녀가 애가 타서 외쳤지만, 천진한 아이는 공중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마왕성의 온갖 살림살이를 다 부셔놓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아빠를 쏙 빼닮아 벌써부터 미모로 또래 친구들을 홀려 놓은 마족의 왕자 ‘류드’는 올해로 여덟 살이 되었다.
인간으로 치면 벌써 제 밥은 스스로 떠먹을 줄 알며 두 발로 척척 걸어 학교도 갈 나이였지만, 신체 성장이 더딘 마족에게는 이제 돌이 지난 갓난아이일 뿐이었다.
마족의 아이는 마력제어가 되지 않아 세심한 관리를 필요로 했는데, 아빠의 마력 까지 전부 물려받은 류드는 웬만한 성인 마족 보다 마력이 강하여 보육하녀 만으로는 제어가 힘들었고 마왕성의 무법자처럼 늘 사고를 일으키며 제멋대로 헤집고 다녔다. 마왕성의 별궁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은 것이 바로 어제인데 오늘 또 난장판이 되겠구나. 하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안 되겠다. 마왕비 님을 모셔와야겠어.”
“제가 다녀올게요!”
류드의 전담 보육 하녀만 10명이다. 그러나 백 명으로 늘려줘도 마족의 왕자 류드는 막지 못 할 거라 혀를 내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리나가 황급히 뛰어왔다. 치렁치렁한 검은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미안해요! 잠깐 신전에 갔다 온 사이에”
“마마!”
하녀들이 그렇게 애타게 불러도 꼼짝 않던 류드가 에리나를 보자마자 단숨에 품에 안겨든다.
“사고 치면 엄마가 이놈 한다고 했지?”
아이를 낳은 지 8년 째. 안는 법 마저 엉성해서 늘 곤란한 표정을 지었던 에리나는 이제 엄마답게 류드를 대하고 있었다.
류드가 방긋방긋 웃자 에리나의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케일이 아기였다면 딱 이렇게 생겼을 것 같다고 수 천 번은 생각했다.
“아빠를 똑 닮아 가지고.”
구름 같이 흰 뺨을 아프지 않도록 꼬집었다.
“아빠 보러 갈까?”
========== 작품 후기 ==========
*예약아이템으로 급하게 올리고가욧!! 잘 올라가겟져?!!
*Q&A 달아 주신건 후기와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지난 화 독자님 코멘트에 대한건 다음화에 얘기나눠 보아요(급하게 사라지는 작가)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