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편
<-- 20. 이제, 집으로 돌아가 볼까요? -->
“다, 당장 단상에서 내려가!!”
“불경한 입을 다물어라!”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비난이 이어졌다.
“듣기 싫으시죠? 하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저도 그런 주신의 말을 전하는 성녀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원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이곳에 올려놓고는 욕 받이나 되어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다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면 저와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녀를 바꿔 달라 기도나 드리죠.”
내려가라 그렇게 소리를 쳐대던 신자들이, 내려가기 위해 같이 기도를 드리자니까 분위기가 싸할 정도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난 진심인데?
보아하니 내가 성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자 퍽 놀라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성녀이기 전에 마왕비이고, 그 전에 에리나 홀든이라는 자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원하지 않고, 저도 원하지 않는 자리를 억지로 부여한 주신에게 찬양어린 기도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에게 제 의견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에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은 신전 측에 성녀가 싫다고 아무리 외쳐봤자 바뀌는 것은 없으니 주신께 다이렉트로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신자들은 저들끼리 의견이 분분한지 나를 향하던 고개가 돌아가고 즉석 토론의 장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론이 나진 않을 것이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저는 주신의 뜻대로 미사에 참여는 하나 그를 찬양하는 말 따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기도는 여러분 개인, 개인을 위한 것이며 주신의 능력에 감사하는 내용이 아닌 오늘 저녁에 구울 빵이 타지 않고 노릇노릇하게 나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빌어먹을 비가 멈추길 바라는 기도를 드릴 거구요.”
기도를 위해 손을 모으지도 않고, 눈을 감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장을 노려보며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욕했다.
“개xx. xxxx. 당장 비를 멈추지 않으면 xx 해서 xxx 하고 x 될 줄 알아! 매 주마다 신자들에게 새로운 기도라 면서 주신이름을 담은 욕을 외우게 할 거야! xxxx!”
찰진 욕은 역시 한글이 최고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질러대는 내 모습에 신자들이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땅이 울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한 천둥이 한 번 내리치더니 빗소리가 멈췄다.
“놀랍게도 제 기도를 들어주셨나 보네요. 찬양 같은 건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재잘재잘 떠들던 목소리가 단숨에 멎고, 충격을 담은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 초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해진 성전 안은 옆 사람의 호흡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였다. 그나마 일찍 상황판단이 된 사제님이 서둘러 미사를 종료시켰다.
어안이 벙벙해진 신자들은 그 모습 그대로 성전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손엔 바짝 마른 우산이 정처 없이 땅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
3년 전. 처음 세자인에 발을 들였을 때에는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으로 옷이 젖을 정도인 푹푹 찌는 여름이었는데, 다시 돌아온 지금은 땅 위로 하얀 발자국이 길을 내고 있었다. 나무 위에 쌓인 눈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며 그 자리에 유독 눈이 높이 쌓였다.
마을의 초입까지는 텔레포트로 이동했고, 머슨이 마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세자인의 사람들을 위해서, 산 아래 부터는 직접 걸어 이동하고 있었다.
눈에 띄게 배가 불러온 나는 정강이 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갈 힘이 없어 머슨에게 안긴 채였다. 3년전 에도 업혀 왔었는데 이건 비슷하네.
비가 그치고 바로 세자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여러 일들이 겹쳐오는 바람에 겨울에 들어선지 한참이 되고서야 도착하게 됐다.
반란을 진압하는데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에반은 자신의 성을 따 프리차일드 남작이라는 호칭과 함께 귀족신분을 얻었다. 황제가 명하면 뚝딱 하고 귀족이 되는 줄 알았으나 생각과는 다르게 그 절차라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타 귀족들의 성명을 받고 관공서에 서류를 제출하며 하사받을 영지를 골라야 했다. 에반은 좋은 영지들을 다 물리곤 대학살이 일어나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베른을 선택했다. 버려진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땅을 개간하고, 사람이 살 정도로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 여기서 잠깐. 세자인으로 향하는 것과 에반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아주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부인, 내 발자국이 찍힌 곳만 따라 걸어요. 자칫하면 넘어 질 수도 있으니.”
체닌이 에반의 옷을 꽈악 붙잡으며 찍혀진 커다란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집어넣었다. 보시다 시피 둘은 수도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체닌 프리차일드가 된 그녀는, 남편의 자리가 확고해질 때 까지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남작 직위를 무사히 하사 받고, 눈 때문에 영지 개간이 더뎌진 틈을 타 시간을 내어 세자인에 가고 있는 것이었다. 미리 편지를 보내 놓았기에 촌장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임시이긴 하나 성녀가 된 나 또한 눈 코 뜰 새없이 바빴다. 미사는 일주일에 한 번 이었지만 신전 안으로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며 면담을 청했고, 미사 의식에 대한 교육을 사제님께 매일 같이 받아야 했다. 참사로 인해 허물어졌던 벽도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찾았고 그 날을 잊지 않기 위해 희생자들의 이름을 벽면에 새겨 넣었다.
몇 번의 미사가 계속 되는 동안에도 내 입에선 주신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질 않았다. 어색해하던 신자들도 어느 틈엔가 기도를 할 때 주신의 안위 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옅어진 신앙심에 불안감을 느낀 주신이 두 달 전부터 계속 내 몸을 빌려 주구장창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1년에 한 번 신의 목소리를 들을까 말까라던데, 지금은 매주 주신이 미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나를 달가워하진 않는다. 진짜 성녀가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들의 생각을 바꿔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말들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맞는 소리이기도 하니까.
에반의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도 신전에 익숙해져 여유로울 즈음 곧바로 세자인으로 떠났다. 체닌을 포함해 셋이 돌아오려 했으나, 두 명의 손님이 늘어 총 다섯 명이 세자인의 땅을 밟는다.
산 아래를 지나오니 눈에 익은 오두막 한 채가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붕 위에도 눈이 쌓였고, 내가 열심히 가꾸었던 텃밭까지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모자며 스카프로 몸을 칭칭 감은 마을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 위에도 같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연세도 지긋하신 분들이 꽤 오래전부터 우리를 반기기 위해 나와 있었던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그들의 품으로 뛰어가 안기고 싶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하, 할아버지...”
나직하게 외친 체닌이 뒤뚱뒤뚱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발이 푹푹 꺼지며 양 손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으려고 제멋대로 춤을 춘다. 잘 나가나 싶었는데 역시나, 푸욱! 소리를 내며 얼굴을 눈 위에 박고 말았다.
“체닌!”
“부인!”
에반과 촌장님이 동시에 외쳤고, 넘어진 그녀 앞에서 손을 내민 건 촌장님이었다. 헤진 장갑을 바라보던 체닌이 그것을 소중하게 껴안고 그 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코가 떨어질 정도로 추운 날씨였으나, 부끄러운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체닌의 마음은 화끈거리기만 했다.
생전 보지 못했던 체닌의 모습에 의아해 하던 마을 사람들도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재회의 여운을 느꼈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자 보다 못한 크리에타 아주머니가 눈물을 닦고는 호탕하게 외쳤다.
“아침 밥 식기 전에, 우리가 먼저 얼어 죽겄어유!”
우리는 눈길을 헤치곤 맛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촌장님 댁으로 향해 걸었다. 마을사람 들과 섞여들어, 입 속에 눈이 한 바가지 들어가는 데도 안부를 묻는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앞서 걸어간 체닌과 촌장님은 꼭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는 짧게 끝이 났습니다!
에필 겸인 챕터 21과 외전 몇개가 더 진행될 예정입니다
*독자님 : 저도 논문 쓴거 잃어버려 봐서 그 심정 잘 일해해여ㅜㅜ 희망을 잃지마세여!
작가 : (상상만해도 끔찍) 대학다닐때 필통안에서 usb 3개가 나온 것이 떠오르네여. 왜 거기서 나왔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어찌 됐든 찾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까지 몇 개를 잃어버렸는지 감도 안잡히네여(눈물)
*독자님 : 냉장고 열어보시면 usb숙면중일겁니다! 동면중인 저희집 리모콘 깨워봤습니다!(당당)
작가 : 으아닛. 리모콘이 여름을 많이 탔나봐요. 올 여름은 그닥 많이 덥진 않았는데...
리모콘 : 냉장고에 좀 들어갈 수도 있지 왜 참견이시죠?
*독자님 : 잘 찾아 보시면 꼭 찾을 수 있을거예요!
작가 : 반 포기 상태입니다. 아쉬우면 제발로 걸어나오겠쬬
USB : 프뤼더어어엄!!!!(전혀 아쉽지 않다)
*독자님 : 작가님! 잘 올라왔어요!
작가 : 다행입니다 9ㅅ9 큐큐큡...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다가온 완결에 앞서, 독자님 Q&A를 받을까 합니다. 작품에 관해서나 작가(강조)에 관해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코멘으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