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편
<-- 20. 이제, 집으로 돌아가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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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덮는 치마 밑단에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새하얀 성의를 갖춰 입고 단상에 서자 미사 시간 한 시간 전부터 신전 앞에 줄을 섰던 신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녀가 된 나를 존중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일종의 법식에 따라 몸에 밴 것을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
나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입당 성가가 빗소리와 함께 울려 퍼질 때에도 생전 처음 듣는 노래에 입 한번 꿈쩍이지 않고 듣기만 했고, 참회식과 전례가 이어질 때도 집전주례를 맡은 사제님이 기도로서 이끌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단상 옆에 자리한 석상과 내가 다를게 뭐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신자들을 둘러보았다. 실내 성전이긴 하여도 3층 까지 객석이 있는 거대한 내부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머슨은 어디에 있을까?
단상까지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성녀가 마왕비라는 사실에 기절초풍하고 있는 신자들 앞에 두고 다이너마이트 급 충격을 선사할 마왕을 차마 성전의 단상 위에 데리고 오진 못했다. 대신 신자들과 섞여 앉아 나를 지켜봐 주기로 약속한 뒤 그와 나는 향하는 방향을 달리 걸었다.
느끼기에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하기만 한 미사가 드디어 끝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에 팔 다리를 쭉쭉 펴고 기재기를 켜고 싶었다. 주신이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마치는 기도마저 그렇게 찬양을 해대는지... 코웃음이 비죽 흘러 나올 뻔 했다. 비나 멈추게 해 주소서 망할 신님아. 라고 기도 하는 거라면 이해라도 가겠지만, 뭐가 우리를 보살펴 주고 지켜주고 자비를 베풀었다는 건지. 내가 주신이었다면 양심에 찔려서라도 당장 그만하라고 소리를 쳤을 것이다.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고 있지 못하던 나는 결국 눈을 굴려 머슨 찾기에 나섰다. 어렸을 적 윌리도 척척 잘 찾았던 내가 머슨 하나 못 찾으랴. 그러나 한 참을 바라봐도 머슨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1층, 고개가 들려 2층. 더더 올라가 3층의 맨 끝자락 까지 전부 훑어봤다. 다들 머리를 숙이며 기도를 하고 있을 뿐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애정어린 눈빛은 없었다.
이 자식, 따분해서 도망간 거 아니야?
문득 그런 가설이 떠오르자 괘씸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갈 거면 나도 데려가야지! 작은 배신감에 욱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여기서 머슨의 이름을 부르며 바락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은 얌전히 삭힐 수밖에. 서서히 기도가 끝을 향해 달려가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눈이 마주쳤다.
“머슨?”
나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나와 입을 막으며 몸을 떨어야 했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사제님 말고는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다시 눈치를 보며 단상 바로 아래에 신전 기사의 갑옷을 입고 서있는 머슨을 바라보았다. 쭉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얼굴에 웃음이 그득하다.
너 왜 여기 있어.
내 입 모양을 알아들은 머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래, 원래 네 자리에 서있어야 할 기사는 지금 쯤 옷이 발가벗겨져 신전의 외진 구석에서 난처해하고 있겠지.
머슨을 찾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루했던 것이 훌훌 날아가 버렸다. 아무도 몰래 눈짓 하며 그와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데, 누군가 팔뚝을 가볍게 두드렸다.
"끝났습니다.”
작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여준 사제님 덕에 뒤늦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기도가 마무리 되고 신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공지가 있겠습니다.”
공기가 바뀌었다. 저마다 옆 사람과 무엇을 소곤거리는지 아기 새의 지저귐 같은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오늘은 성녀님께서 처음으로 저희와 함께한 첫 미사였습니다. 주신의 은혜를 받은 성녀님은 저희를 축복해주시고, 저희들은 주신의 말씀을 전할 성녀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사제님이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자 나도 엉겁결에 따라 인사했다. 그러자 신자들 중 몇몇이 사제님처럼 고개를 숙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태반이었다.
“마왕비가 무슨 주신의 말씀을 전하는가!”
한 남성이 크게 외쳤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신전 곳곳에서 불만어린 함성들이 터져 나왔다. 와,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욕을 먹는 건 처음이다.
“당장 성의를 벗고 지옥으로 물러가라!”
“이건 주신과 신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다!”
“신전은 참회하라!”
이제는 귀가 얼얼할 지경이다. 머슨이 움찔 했으나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인지 이제는 이정도로 멘탈이 흔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참다 참다 못해 결국 단상을 크게 한 번 내리쳤다. 놀란 신자중 하나가 겁에 질려 외쳤다.
“마, 마왕을 부르려는 것인가?!”
안타깝게도 마왕은 벌써 와 있네요. 흠씬 욕을 해대던 신자들이 ‘마왕’이라는 단어 하나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마왕은 무섭고 마왕비는 안 무섭나? 초라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가볍게 넘어갔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이 마음에 안 드시죠?”
“그걸 말이라고…!”
1층에 자리한 신자가 호기롭게 외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꾹 다문다. 왜, 더 말하시지.
“저도 제가 성녀가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술렁임. 내 뒤에 서있던 수녀들의 경악어린 소리도 빠짐없이 전부 들렸다.
“주신이라는 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세르데벨라 르네를 성녀로 뽑았고, 그녀는 흑마법과 반란을 꾀하여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고 묵인했죠. 뿐 만 아니라 2주 전. 신전에서의 참사 때에도 주신은 성녀를 지옥이 아닌 천계로 데려가 신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신자들일 죽었는데도 말이죠.”
거침없는 내 말을 듣다 못한 수녀 중 하나가 나를 말렸으나 무시했다. 할 말은 해야지.
“사후에 주신의 보살핌을 받기 위해 모시는 것이라면, 신앙심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죽여도 신이 되는데, 인생 살면서 살인 한 번 한다한들 뭐 어때요?”
========== 작품 후기 ==========
한 편 더 올라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