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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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제, 집으로 돌아가 볼까요?
주신이 내린 비는 일주일 동안이나 창밖을 두드려댔다. 붉게 물든 단풍잎은 이미 젖어버린 바닥위에 늘러 붙어버려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외로이 흔들거렸다. 신전에서 일어난 참사는 그 날이 지나기도 전에 수도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정도로 빨리 퍼져 나갔고, 신전 측에서는 발빠른 대응을 보이며 참사에대해 깊이 사죄 하고 희생자를 위한 장례 미사를 신속하고 엄중하게 진행 하였다. 더불어 성녀가 세르데벨라 르네에서 나 에리나 홀든으로 바뀌었다는 것 까지 공표해 아직 식지 않은 열기에 파란을 더했다.
그날의 목격자들로 인해 머슨이 마왕이라는 사실이 퍼져나갔으며 내가 그의 반려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나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부정하지 않았고, 신전 측에서도 거짓말로 신자들을 회유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이례적인 성녀의 출현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참사로 인한 피가 폭우로도 채 씻기지도 않았던 터라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신앙심이 사라져 갔다. 성녀는 신에게 종속된 몸.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때문에 세르데벨라도 마왕의 반려가 되기로 했을 땐 성녀직을 포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남편이 있는 상태고, 더군다나 그의 직업은 마왕이다. 새로운 성녀를 달가워하지 않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별 관심도 없다. 오히려 거세게 항의하는 신자들 때문에 마지못해 성녀가 바뀐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투둑 투두둑-
빗방울이 유리창 너머에 맺혔다가, 다른 빗방울과 부딪혀 부피를 불리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다. 방금 생긴 물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그어봤다. 찬 기운이 손끝에서 아릿하게 퍼져 오른다.
“언제쯤 비가 그칠까?”
어느새 다가온 머슨이 나를 안아 들고는 침대로 향했다. 딱히 저항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엉덩이가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닿고, 들려진 목 아래로 베개가 끼워 넣어 질 때 까지 가만히 힘을 빼고만 있었다.
“마음에 난 불이 식을 때 까지, 계속 내릴 거야.”
“빨리 그쳤으면 좋겠어. 마치 이 비가 그날의 연장선 같아서 우울한 기분이 떨어지지 않아.”
신점에서의 참사 이후, 일주일 동안 제대로 웃어본 기억이 없었다.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웃을 만큼 기운이 넘치진 않았다.
옆에 앉은 머슨이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버릇처럼 어루만졌다.
“마왕성으로 돌아갈까?”
그래, 확실히 거긴 비가 내리진 않겠지. 너의 영역이니까. 그러나 난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잖아.”
애초에 우리가 수도에 온 목적은 세르데벨라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작은 체닌을 세자인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 부터였지. 납치 계획 까지 세웠었는데 다 소용없게 됐다. 지금의 체닌은 몇 마디 말만 넌지시 던져주기만 하면 제 발로 우리와 함께 세자인에 돌아갈 것이다.
“응.”
머슨이 짧게 대답하고는, 내 입술에 뺨을 가져다 댔다. 쳐다보자 그가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인다.
“...?”
“뽀뽀 받고 싶어서.”
갑자기 무슨 맥락이야. 어이가 없었지만 머슨이 마냥 귀여워 그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이리로 와.”
그가 몸을 뒤집으며 내 위에 자리를 잡았고, 눈이 부셨던 천장의 조명이 단숨에 가려졌다. 무게를 싣지 않으려 내 얼굴 옆에 팔꿈치를 대어 중심을 잡고는 입술이 내려앉는다. 빗소리와 함께 타액으로 젖은 입술 부딪히는 소리가 야릇하게 들렸다. 그가 내 입 꼬리를 혀로 눌러 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비가 그치면 돌아가자.”
머슨의 뺨에 길게 입맞춘 후 대답했다.
“그래.”
*
나와 머슨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구름은 바람도 타지 않는지 며칠이고 머리위에 떠있었고, 이제는 길목마다 웅덩이가 생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신자들의 입에서도 성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보다는 이놈의 비는 도대체 언제 그칠까? 하는 주제가 먼저 튀어 나왔다.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우중충한 거리를 내다보는 것도 지겨워 커튼을 닫아 버렸다.
한 번은 방 안에 있는 것이 너무 지겨워 밖에 나갔다가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렇다고 방안에만 있기에는 너무 찌뿌둥했다. 안 그래도 몸이 무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발도 점점 붓기 시작해서 이대로 곰이 돼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해봤다.
“우리나라 설화중에 웅녀 이야기가 있는데, 곰이 21일 동안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 안에서 쑥과 마늘만 먹어서 사람이 됐다는 내용이야. 나는 반대로 고기와 빵만 먹다가 곰이 돼 버리는게 아닌가 싶어.”
무릎으로 내 발을 받치고 마사지를 해주던 머슨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 곰의 남편이 되는 건가?”
“무슨 소리야? 너도 곰이 되어야지.”
진리를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
그렇긴 뭐가 그래. 귀여워 머리를 헝클어트려 주곤 침대위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아프지 않도록 시원하게 주물러주는 머슨 덕에 잠이 솔솔 쏟아져 왔다. 이대로 10초만 눈을 감고 있으면 쉴 새 없이 들리던 빗소리도 멎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바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몸을 반쯤 일으켜야 했다.
“누구지?”
‘똑똑똑’
다급한 느낌은 아니었기에, 여러 생각을 거친 후에 뒤늦게 머슨을 내보냈다. 세르데벨라와 아비츠백작 그리고 천신이 사라진 지금, 누가 나에게 찾아오든 크게 골머리를 썩이게 할 만한 인물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머슨이 문을 열자, 비에 푹 젖은 검은 로브가 보였다. 로브 밖으로 삐져나온 주름진 손이 후드를 벗어 내렸고, 얼굴을 보인 사람은 다름아닌 늙은 사제님이었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침대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방문 앞에 다가가 섰다. 사제님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문 앞에 있기를 원했다. 아마, 물기가 카펫에 스며드는 것을 걱정하여 그러는 것 같았다.
“간단하게 몇 마디만 나누러 온 것이니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는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리더니 이내 결심이 선듯 주저않고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영부영 신전의 문제가 빗속으로 파묻혀 질 것을 우려 하여, 이번 주일에 미사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사제님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대충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잠시 내 반응을 살피던 사제님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꼭 참석해 달라 통보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부탁입니다. 신전의 안정화를 위해선 반드시 성녀님이 필요하고, 평생 신전을 위해 봉사하기로 한 저는 이 말을 꼭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의로 성녀님이 되신 게 아닌 에리나님께선 제 말을 거절할 선택지도 가지고 계시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난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갈게요.”
“알겠…. 네?”
“간다구요.”
내 입에서 흔쾌히 간다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 사제님이 놀라며 말을 버벅였다. 그러다 행여나 내 마음이 바뀔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어 감사합니다.”
아주 짧고 간결한 대화가 끝나고, 사제님이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우리가 있는 여관방에서부터 멀어져갔다.
“정말 갈 생각이야?”
“응. 사제님이 말은 저렇게 했지만 이 빗속을 뚫고 우산하나 챙겨올 정신도 없이 급하게 오신거야. 그만큼 절실했다는 거겠지.”
“저 사제를 위해 가는 건가?”
“굳이 따지자면, 아니…”
창가로 다가가 닫혀있던 커튼을 열었다. 비는 지독히도 내려 사람들의 발을 집안에 묶어두었고, 잿빛의 거리가 외로이 잠겨가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질려가고 있는 중이다. 끝을 모르고 내리는 비, 쓸쓸한 거리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성녀에 대한 논쟁까지 전부. 인정하지 못하겠다 시위라도 할 줄 알았던 신자들이 폭우로 인해 적극적이게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장마의 원인을 나로 몰아가는 신자들도 나타났다. 성녀가 불경해서 신이 노하셨다나 뭐라나. 세르데벨라 사건으로 안그래도 마음이 심란한데 주신이 싸놓은 변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판이 되자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 사단을 만든 주신은 그 날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꿈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아 기대하는 바가 적어서인지 무책임 하게 잠수를 탔다 하더라도 예전만큼 화가 나진 않았다. 단지 혀를 길게 뽑아 리본으로 예쁘게 묶어 준 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정도랄까.
사생활이 심히 침해될 정도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주신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수도는 통째로 떠내려가기 일보직전이었고, 신앙심이 꺾인 신자들이 제 욕을 얼마나 해대는지도 전부 보고, 듣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만한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데, 사제님이 오늘 나에게 찾아옴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나’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상황이 아무리 개떡같이 흘러가고 있어도 마지막은 반드시 주신이 뜻한 방향으로 뱃머리가 돌아선다. 사제님이 나를 찾아온 것도,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드린것도 모두 주신에 의한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는 원하고 있었다. 나 에리나 홀든이 성녀로서 신자들의 마음을 다잡고, 신전에 덧입혀진 위기를 벗겨 내기를.
우중충함을 머금은 창을 등지고서 머슨을 바라보았다.
“내 정서를 위해서야. 우울증 예방에는 햇빛만큼 좋은 게 없거든.”
어쩔 수없이, 차기 성녀가 선택 될 때까지의 10년 동안은 주신이 만들어 놓은 필연에 휘둘릴 것이다. 그러나 입 아프게 말했듯이 난 신앙심 같은 건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하물며 주신을 찬양 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의 책임감만큼이나 없다. 내 입에서 진심어린 기도가 나오는 걸 바라진 마, 주신. 감정이 좋지 않은 비즈니스 관계. 갑과 을이 분명했지만 일단은 좋을 대로 생각해 보았다.
하루라도 빨리 비가 그쳐서, 체닌을 찾기 위한 여행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이것 말고도 신경써야 할 것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
배 위에 손을 올리자, 생명의 크기가 아주 조금씩 커가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예약 아이템...잘 올라갔겠쬬?(불안 초조)
*독자님 : 에리나2세 성격은 누굴 닮을까요?! 궁금궁금!!
작가 : 머슨 같은 존재가 두명이면 조금 피곤하긴 하겠네요, 다른 마족들이...
마족 : 마왕님 무서어ㅠㅠㅠ
*독자님 : 하.. 주신도 벨라 손잡고 지옥에 갔으면...
주신 : 뿌셔뿌셔! 지옥 뿌셔! 팝핀 뿌셔! (샤이니ver)
작가 : 지옥불에 들어가도, 땀빼고 나온다고 생각할 주신입니다...(젠쟝)
*독자님 : 오타있어요! / 우리의 남주와 여주의 굴림은 이제 끝인가여?ㅠㅠ
작가 : 오타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벨라가 사라졌으니 이젠 평화로울겁니다!
*독자님 : 이제2편 육아편 잘 부탁드립니다. 3장은 좌충우돌 딸 시집 보내기
작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육아에 서툰 초보 엄마 아빠인 마왕부부가 우스꽝스럽긴 하겠네여
*독자님 : sf영화 같아요! 머슨 추천배우 있어요 프랑스 므흣 배우인데 겁나 잘생기고 멋져요 작가님! 그 사람 궁금ㅎ면 알려드릴 수 있어요! 여기 독자님들 한테 사진 보여주고 싶다!
작가 : 아 현기증나요. 빨리 쪽지로 보내주세요 (사망일보직전) (인공호흡필요)
*작가의 사담
USB에 담아 놓은 구독불가 파일이 통째로 사라져서, 진짜 멘붕of멘붕 겪었습니다. 자취방, 본집, 친구집에 번갈아 가며 자주 가기 때문에, 항상 USB에 넣고 다니는데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감도 안잡혀요. 하도 돌아댕겨서.
왕 덜렁이. 제 자신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다르끼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