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편
<-- 19. 이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
“진정해 벨라, 일단은 몸이 조금 더 나은 후에…”
“난, 멀쩡해!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야 해. 주인이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워두면 안되잖아. 어서 날 꺼내줘.”
“...”
“빨리!”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았다. 가면들을 전부 벗어던지고, 고삐 풀린 말처럼 제 멋대로 질주하는 그녀를 막을 방법 따윈 없어보였다.
이번엔 정말 케일이 벨라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 죽일 것이다. 두 장뿐인 날개로는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조차 못한다. 즉, 목숨을 다 해도 그녀를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운이 좋아 케일을 만나게 되지 않더라도 신전 안에는 더 이상 벨라를 반기는 자들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무너져갈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죽기만큼 싫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벨라가 엘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엘!!”
그러나 엘은, 벨라를 이기지 못 한다. 사랑하는 이의 간절함을 무시할 정도로 냉담하지 못했고, 그녀가 딛고 있는 곳이 파멸의 문턱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끝까지 함께하고자 했다. 돌아가기엔 너무도 먼 길을 와버렸다. 엘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척한 벨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엘은 웃어 줄 수 없었다. 천진한 연인의 손을 잡고, 자살 하러 가는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
괴이한 성녀의 방은 며칠이고 비워져 있었다. 성스러운 신전 내에 귀신이 산다는 헛소문 마저 돌고 있었다. 늙은 사제, 헤블이 수군거리는 수녀들 곁을 지나가자 그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금세 입을 다문다.
헤블은 고유의 자상한 얼굴로 목례를 할 뿐, 다른 지적은 하지 않았다.
성녀의 방의 청소를 담당하던 시종이 온 몸에 십자가며, 마늘, 성경책, 성수 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문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히익! 아, 아닙니다. 제 할 일 인데요”
“괜찮습니다.”
헤블이 청소 도구를 빼앗아 들었다. 시종은 불안해 하면서도 그 끔찍한 방에 머물러도 되지 않는 다는 점에서 안심이라도 되었는지 두 번은 마다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럼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가보세요.”
시종을 돌려보내고 문 앞에 서자, 황급히 달아날 줄 알았던 시종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서, 성녀님?!”
헤블의 얼굴에 기쁨이 묻어났다. 단호하게 얘기하셨어도, 결국은 돌아와 주시는구나! 유난 떨지 않으려 마음을 진정시키곤 몸을 돌렸다.
“와주실 줄 알았습니…”
헤블은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언제고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 채 들고 있던 청소도구를 떨어뜨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이제 제가 왔으니 안심하세요.”
“세르데벨라 님.”
“사제님 한테서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이네요.”
“...”
엉망이 된 몰골의 그녀는 자애로운 성녀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불온한 떨림이 깊게 베여있었다. 두피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빠져버린 머리카락과, 시체처럼 푹 꺼진 두 눈, 빛을 잃고 누렇게 뜬 피부와, 피 범벅이 된 손끝을 보면 신전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야 하기에 마땅했다.
더한 충격을 받고 쓰러지기 전에 진실을 말해 주기로 결심한 헤블이 용기내어 입을 떼었다. 그러나 벨라의 옆에 호위기사 처럼 서있는 엘이 고개를 저어 입을 다물게 했다. 직감적으로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제 방을 청소 하려 했나 봐요.”
“...예, 성녀님의 방을요.”
“너무 늦게 돌아온 잘못도 있으니 오늘은 같이 해볼까요?”
헤블은 난감해졌다. 방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감시하고 있는 엘 탓에 한 마디도 하지 못 하고 안절부절 하기만 했다. 결국 벨라가 헤블을 지나쳐 문을 열어버렸다.
“...이게 뭐죠?”
방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선 벨라의 목소리가 차게 식었다. 놀란 것은 엘도 마찬가지였다. 혐오스러운 물건들이 세기도 힘들 만큼 즐비해 있었고, 떡하니 붙어 있는 케일의 커다란 초상화는 성녀의 방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헤블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게 다 뭐야. 내 물건들은 다 어디로 옮겼어요? 아! 지금 나 놀리는 건가?!”
“...”
“놀래 키려던 거라면 성공했어요. 지금 엄청 충격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장난은 이제 그만하고 원래대로 돌려놔요. 왜 대답이 없어요?”
성녀의 몸이 분노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외면하는 헤블을 향해 억눌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내 방을 돌려놔요 당장!”
“세르데벨라님의 방이 아닙니다.”
참다 못 한 헤블이 진실을 말했다. 심장이 뚫린 사람처럼 벨라의 몸이 경직되었다.
“성녀님이 바뀌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거짓말. 거짓말이야!”
고개를 세차게 턴 벨라가 호흡이 넘어갈 듯 꺽 꺽 대더니, 손에 집히는 것을 전부 던지기 시작했다.
커튼을 찢고, 테이블을 걷어차고 연약한 손톱이 빠질 정도로 거세게 벽지를 긁어 내렸다.
“다 치워!”
아수라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도 벨라는 멈추지 않았다. 침대 위에 걸려 있는 케일의 초상화를 들여다보더니 손 끝에 흐르는 자신의 피를 덕지덕지 묻혀 놓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벨라의 붉은 혈흔으로 가려지고 나서야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이 초상화는 누가 가져다 놓은 거죠?”
“성녀님이…”
“난 이런 걸 가져다 놓은 적이 없어요!”
하아. 한숨을 내쉰 헤블이 마지못해 이름을 얘기했다.
“에리나 홀든 님 입니다.”
귀를 의심했다. 다시는 들리지 않아야 할 그 역겨운 이름이 자신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또 한 번 나오자 온 몸의 관절들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손가락이 꺾이며 뚜둑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년이... 여길 왔다갔어? 어떻게! 내 허락 없이는 발 도 못 붙여야 할 년이 무슨 수로!”
격분 하는 벨라의 모습에 헤블은 평정심을 찾으려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수년간 그녀를 봐 왔지만 이토록 자제력 없이 날 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제껏 정성들여 모셔왔던 것에 대한 회의감 까지 드는 수준이었다.
“죽어서 나에게 복수를 하러 왔구나 그 망할 년이! 그래서 내 방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거야!”
벨라는 이를 갈았다. 짐승과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금 방을 헤집었다. 모두에게 선포 하는건지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건지 모를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으면서.
“여긴 내 방이야. 여긴 내 방이야. 여긴 내 방이야.”
누구 하나 벨라를 말리지 못했다. 결국 온전한 물건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려 놓고 나서야 분이 풀렸는지 드디어 손이 멈추었다.
헤블은 폐허가 된 방안에 서있는 그녀를 보고선 생각했다.
놀랍도록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
“좋은 것이 생각났어, 에리나”
“또 헛소리 하지 말고.”
머슨이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가까이 붙어 앉았다. 이미 수많은 실언을 쏟았던 입인지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숨죽여 머슨만 바라보게 되었다. 내 시선을 충분히 즐긴 머슨이 진지한 투로 애기했다.
“에리나 붕어빵.”
따악! 소리가 날 정도로 그의 입을 세게 때려주었다.
“태명에 붕어빵이 뭐냐?”
며칠 전, 판에 박힌 듯 똑같은 것에 대한 비유로 붕어빵이라는 단어를 알려줬는데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머슨이 입술을 붙잡으며 푹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직후부터 해가 저문 지금까지 태명 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늘 부르던 작은 에리나부터 시작해서, 에리나 2세, 에리나의 선물, 빛의 에리나, 기특한 에리나, 엄마 괴롭히지 마라 등등등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태명들이 나왔다.
“말했잖아, 아이가 이렇게 태어나줬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과 사랑을 담아서 짓는 거라고.”
“에리나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 말고 아이만 생각해.”
“에리나와 나의 아이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모든 부분에서 내 생각을 조금 덜어놔 봐.”
머슨이 미간을 좁히더니 침대 위로 나를 넘어뜨렸다. 거친 동작은 아니었고, 목을 받쳐주며 충격이 가지 않도록 부드럽게. 내 골반 사이에 다리를 넣어 가둔 그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내려다 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머슨이 서운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에리나 생각을 그만 하라니, 소멸 당하라는 거야?”
“말이 왜 그렇게 돼”
“꿈을 꿔도 에리나 꿈만 꿔, 호흡 한 번에도 에리나 얼굴이 떠올라. 이걸 멈추라는 건 잠도 자지 말고, 숨도 쉬지 말라는 뜻이잖아.”
일 났다. 또 핀트가 어긋나 머슨의 억지스러운 투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한 번 몸이 떨어졌던 이후로 집착이 더 심해진 것 같다.
“또 떼쓴다.”
어깨를 슬쩍 밀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몸을 비켜주었다.
옆에 누운 그가 몸을 모로 돌려 나를 응시했다. 고개만 꺾은 채 머슨을 향해 손짓 하자 가까이 다가와 준다. 이때다 싶어 튀어나온 입술을 세게 물어버렸다.
“네가 소멸 당하면 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동반 자살 하자는 의미야?”
“절대 아니야!"
자기 소멸 당한다는 얘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내가 죽는 다는 얘기에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귀여워.
몸을 완전히 돌려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얼굴이 도대체 몇 개야. 어떨 때는 귀엽고, 어떨 때는 듬직하고, 어떨 때는 바보 같고.”
“에리나 앞에선 감정이 주체가 안 돼.”
“푸흡. 너, 날 많이 사랑하나 보다.”
“에리나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슨과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남은 하나의 찝찝함이 방심한 사이 내 머릿속에 불쑥 찾아오곤 했다.
‘매 미사때 마다 천명이 넘는 신자님들이 오십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아.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이 약해서 탈이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 때문이었는지,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이젠 꿈도 아니지만. 또 왜 부른 거예요? 양아치 주신님.”
주신이 바다 위에 여유롭게 누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물론 머슨의 모습을 한 채로.
“첫 미사를 응원하려고.”
“안 나간다니까 글쎄!”
“내가 그렇게 싫어?”
“말이라고 해요?”
“이렇게 잘 생겼는데도?”
순식간에 다가온 주신이 쪽 배 위에 양 팔을 얹고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주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머슨의 얼굴은 엄청나게 취향이었다.
“머슨 얼굴로 그러지 말아요.”
“흔들리는 구나.”
“아니거든요?!”
========== 작품 후기 ==========
*독자님 : 엘은 진정한 호구였군요? 바보 멍충이!
작가 : 맞습니다. 세계관 제일 호구는 엘입니다.
*독자님 : 광기 헐 하는 기분이였다가 후기 보고 이번편 기억 남는게 작가님 깟흥 밖에 없어...
작가 : 깟.흥. 깟.흥. 토끼는 깟.흥.깟.흥 뜁니다.(세뇌중)
독자님 :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깟흥깟흥 뛰면서...
*독자님 : 엘 완전 호구 ㅜㅜ 원래 싫어했는데 저 모습 보니까 가슴이 아프네여ㅠ
작가 : 잊지 마셔야합니다! 벨라 한정 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벨라!
*독자님 : 미친듯이 헌신하면 미친년 만나는 세상...
작가 : 앗, 엄청난 띵언! (오늘의 상메다)
독자님 : ?
*독자님 : 도윤 머슨 러브라인 지지합니다.
작가 : 네? 갑자기요?!
독자님 : 이유따윈없어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tavasco님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