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편
<-- 19. 이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
“하, 빌어먹을”
이동 된 곳은 공교롭게도 세르데벨라의 방이었다.
내가 차원을 넘어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부는 사뭇 달라져있었다. 통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어디인지 확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사라도 간 것처럼 큰 가구는 물론이고, 카펫, 커튼, 이불보 따위가 사라진 채 덩그러니 빈 방만 남겨 있었다. 쌓여있는 먼지 하나 없이 매끄러운 바닥을 보아하니 방치 된 것은 아니었다.
“내려줘.”
무릎 까지 굽혀가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날 내려놓는 머슨과 달리,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점프하듯 뛰어 내려 버렸다. 대화라 할 것도 없이 “네가 임시 성녀를 해라!” 라는 통보에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안지 않아서였다.
“일부러 여기로 이동 시킨 게 분명해.”
비어버린 방을 보고 의심 보다는 불쾌함이 먼저 들었다. 마치 전의 주인이 나가고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꽉 막혀 있는 천장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안 해! 절대 안 한다고!”
‘콰가강-’
신전이 무너질 듯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흰 빛이 번쩍하고 튀어올랐다. 큰 소리에 놀라 몸을 떨자 금세 곁에 온 머슨이 어깨를 안아 주었다.
“내 인생 내 멋대로 살겠다는데, 누구 마음대로 강제 취직이냐고.”
“하지 않아도 돼.”
“응, 절대로. 하지만 그 심보가 너무 못됐잖아. 똥은 지가 싸놓고 왜 나보고 치우라 마라야!!”
주신을 모시는 신전 안에서 거리낌 없이 험담을 계속했다. 초상화라도 있으면 발로 걷어 차주는 건데.
만약 주신이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면, 생각은 한 번 해봤을지도 모른다. 세르데벨라를 언제까지고 성녀자리에 앉혀 두기에도 위험했고, 차원의 문도 내 마음대로 열 수 있으니 원래 세계가 그리울 때면 편하게 다녀 올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평생 하는 것도 아니고 10년 이라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걸리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성녀라 하는 사람이 신앙심이 쥐뿔도 없다는 점에 대한 죄책감도 무시할 수 없었고, 하물며 마왕의 반려라는 자가 성녀라니, 가당치도 않다. 마지막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 하다는 것이다. 대충 주워들었던 기억을 꺼내보면 신자들의 고민에 조언을 건네고, 미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누구에게 조언을 해 줄 만큼의 지혜도 부족하고, 미사의 뜻도 정확하게 모르는 내가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 하게 된 이유는 주신의 안하무인 한 태도가 99.99퍼센트 작용했다.
“성녀 직업 만족도 1위 인 것 같던 애가, 용케도 방을 뺐네. 머슨, 마지막으로 본 세르데벨라의 모습은 어땠어?”
“기억이 잘 안나. 에리나 생각으로 꽉 차있었거든.”
“그래도 조금 더듬어봐. 앗, 내 몸 말고…!”
허리에서 엉덩이로 떨어지는 음흉한 손길에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머슨이 금세 시무룩해졌지만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터라 가볍게 무시 할 수 있었다.
“소설책도 보여주고, 차원을 넘어간 사실도 알려줬다며. 그때의 모습이 어땠냐니까?”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문다. 시선이 내 얼굴위에 머물더니 이내 고개를 저어보였다.
“역시, 기억이 안나. 멀쩡히 잘 있지 않았을까?”
그래, 나만 된통 당했는데, 멀쩡히 잘 있었겠지. 에휴, 맥이 빠졌지만, 뭐 기억이 안 난다는데 어쩌겠어. 세르데벨라에게 받은 무수한 엿 때문에 당뇨에 걸릴 지경인지라, 그녀를 꼭 다시 한 번 만나고자 했다. 문 밖에 버려 놔도 계속 집으로 찾아오는 저주 인형처럼, 내 존재가 그렇게 느껴지길 바랐다. 그러나 세르데벨라는 없고 텅 빈 방만 우리를 반겨주니 당혹스러울 밖에.
당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머슨은 넘어가고, 누군가 속 시원하게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 했을 때다. 굳게 닫혀있는 문이 열리며 검은 인영 하나가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초면은 아닌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성녀님.”
“아닌데요, 저 마.왕. 이랑 결혼 할 사람인데요.”
그리곤 머슨의 팔짱을 강하게 꼈다.
“존엄하신 분을 뵙습니다.”
늙은 사제님은 허리를 숙이며 머슨에게 예를 갖췄다.
“일어나라.”
다시금 눈이 마주치자 머슨에게 좀 더 다가가 붙었다.
“신탁을 받았습니다. 성녀님의 방을 채워 넣을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신탁? 무슨 신탁이요?”
주신에게 임시 성녀 어쩌고 이야기를 들은 것이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세월에 신탁을 내리고, 나를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해?
“선대, 세르데벨라 르네님께 내려온 마지막 신탁의 내용이었습니다.”
"그게 언젠데요?"
“일전에 마왕님께서 선대를 만나고 가신 직후입니다.”
“머슨, 내가 사라진 그 날. 30분 후에 바로 세르데벨라를 만나러 갔지? 그리고 곧장 차원을 넘어 온 거고.”
“응.”
그렇다면 주신놈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예측했다는 뜻이 된다. 이름하야 큰 그림, 빅피쳐. 으드득. 이가 갈린다. 주신의 손바닥 위에서 실컷 놀아난 꼴이 된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얘 반려라는 건 알아요? 얘 마왕이라니까요!”
“하더라도, 뜻을 거스를순 없습니다.”
“내가 거스른다니까요! 하기싫다고!”
그 신의 그 신자답게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바락바락 따져 들어도 그의 굳건한 의지는 꺾지 못했다. 결국 머슨이 한번 인상을 쓰자 그제야 한 발 뒤로 물러난다. 그렇지만 포기는 아니었다.
“당장은 적응하기 힘드시다는 걸 이해합니다. 우선 이 곳을 성녀님의 방으로 만든 뒤에…”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성녀 아니라니까요”
“권능을 부여 받으셨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눈을 살짝 내리깔은 사제님이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저희 미숙한 인간들은 성녀님을 필요로 합니다. 성녀님이라 함은 죽음을 결심했던 수많은 자들에게 삶의 활기를 넣어주시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희망을, 상처 받은 자들에겐 위로를 건네주십니다. 세상을 버티지 못하는 인간들의 여린 정신을 다잡아주는 것이 바로 성녀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불편해지잖아! 내 미묘한 심경 변화를 눈치 챈 건지 늙은 사제님은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당장 성녀님께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방이 의미 없이 비어있지 만은 않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
“아니면 선대, 세르데벨라 르네님을 다시 불러…”
“안 돼요!”
양 손을 뻗어 막아 세웠다. 얼핏 사제님의 입가가 들썩이는는 것처럼 보였다. 함정에 걸려 들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 울며 겨자 먹기로 사제님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세르데벨라가 다시 성녀 직을 찾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 사제님도 제가 묻는 것에 대해 대답해주세요. 그럼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요.”
물론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주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건 너무도 호구 같은 짓이었기에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어느 정도 받아 주는 척 하다가 “아, 얘는 진짜 아니다.” 하며 당장에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좋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앉을 곳 하나 없던 방에서 빠져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십자가는 불순한 마음을 품고만 있어도 죄의식을 느낄 정도로 가히 분위기를 압도시켰다.
검은 대리석으로 된 원형의 테이블 위엔 그와 대비되는 하얀 찻잔이 놓여졌다.
“마왕님께서 이 곳에 앉아계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다니. 신께서 축복을 내려주시나 봅니다.”
아니요! 주신 그 자는 부러 누구한테 축복을 내려 줄 만큼 책임감 있는 신이 아닌데요!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으나, 괜히 기분만 상해할 것 같아 애써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더한 미사여구가 이어지기 전에 본론을 꺼냈다.
“성녀가 신탁을 거짓으로 꾸밀 수 있나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주신께선 성녀님의 몸을 빌리시어 말씀을 내리시기에 그때 성녀님의 의식은 육체를 떠나 깊은 곳에서 잠들어 버립니다. 때문에 무슨 신탁을 내렸는지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신탁의 내용을 기록하는 제 존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도 하죠.”
설명은 장황하지만 결론은 빙의된다 이 말이군. 주신이 직접 세르데벨라에게 “너 이제 그만 나가!” 라고 말한 꼴이 되었으니, 아무리 나가기 싫다 하더라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겠구나. 어쩐지 순순히 비켜주는 꼴이 이상하다 싶었다. 만약 거짓말이 가능했더라면 신탁이 내렸어도 자리를 지키며 거짓말을 칠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담 세르데벨라는 어디로 간 건가요?”
사제님이 난처한 듯 손등을 비비기 시작했다.
“임기가 끝난 성녀님들은 천계로 가시지만, 도중에 신전을 나가신 분은 처음이라 정확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모습은 봤을 거 아니에요, 그때의 모습이 어땠나요?”
“그게, 선대 세르데벨라 르네 님의 상태가 조금 안 좋아 지신지라…”
안 좋아져? 뒷 말이 궁금해 상체가 사제님 쪽으로 쏠렸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화한- 살기가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놀라 머슨을 바라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내 시선을 느낀 머슨이 나를 보고 입술을 끌어올리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착각인가.
찰나의 살기를 털어버리고 다시 질문을 이었다.
“그래서, 세르데벨라가 어떻게 됐다고요?”
“그, 그게…”
“? 사제님 땀좀 닦으세요.”
온화하기만 하던 사제님의 얼굴이 굳어지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말을 잇지 못하더니 마지막엔 결국 기억이 나지 않는 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아무리 봐도 행동거지가 너무도 수상해 재차 캐묻자, “성녀의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돼버렸다.” 라고만 얘기해 줄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다.
내가 물으면 물을수록 어째 땀이 더 흐르고, 숨이 막히다는 듯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 결국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질문을 마무리했다. 대화가 끝나자 마자 벌벌 떠는 손으로 수첩과 펜을 꺼내든 사제님은 방에 필요한 것들을 말해달라 요청했다.
아픈 것 같은데, 직업의식 투철하네.
“아무거나 얘기하면 되는거죠?”
“물론입니다.”
말했듯이, 난 주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의 성녀는 되어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므로 정말 ‘아무거나’ 줄줄이 불러 댔다. 받아 적는 사제님의 손이 몇 번을 삐끗했는지 세기도 힘들 지경이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ㅜㅜ 어제 2연참 약속드렸는데 오늘 하나만 올라가요ㅠ 올해들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어제 병원갔다가 출근도 안하고 하루종일 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났습니다...ㅠ 지금도 욱신욱신 ㅠㅠ 죄송합니다 ㅠㅠㅠㅠ
*독자님 : 앗..뒷..골 땡기는거 저뿐만은 아니겠져??
에리나 : 자다가도 주신생각만 나면 벌떡벌떡 깨요, 한 대 치고싶어서.
*독자님 : 뭐야 재수없어...ㅠㅠ
작가 : ㅇㅈ.
주신 : (너무 핵심만 말해서 의외로 충격)
*독자님 :언제 결제할까 눈치보고 있다가 왠지 오늘이 완결이다!! 싶은 기분이 들어서 달렸는데 아직 멀었군요! 항상 소설잼게 보고있슴다〉〈
작가 : 아앗 눈치게임 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뻘쭘) 완결이 머지 않았네용 ㅎㅎ 파팅파팅 하겠습니다!!
*독자님 : 혹시 작은에리나가 성녀??
작가 : 그러면 저 진짜 때릴거잖아요. 그찮아요. 맞잖아요.
독자님 : (끄덕)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