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편
<-- 19. 이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
“얻어 걸렸거든.”
알아듣지 못해 인상을 쓰자 주신이 친절 하게도 다시 설명해 준다.
“네가 성녀를 하면 된다고, 에리나.”
“...뭐라고요?”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빙글- 몸을 돌린 주신이 손으로 허공을 가르며 휘휘 내젖자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리로.”
휘청거리는 쪽배 위에서 간신히 균형만 잡고 있는데,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몸이 들렸다. 새된 짧은 비명을 지르고 본능적으로 손에 닿는 것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날 안은 채로 내려다 본 머슨이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주신이 손짓하는 곳으로 걸어가자 푸르기만 했던 바다가 밤하늘처럼 짙은 남색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높이의 타원 모양으로 변해있었다. 세르데벨라가 열었던 차원의 문 과도 비슷했다.
아슬아슬한 쪽배 위에 걸터앉은 주신이 남색 바다 안으로 두 발을 담갔다.
“제비뽑기로 성녀를 뽑았다고 했던 거 기억하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까먹겠어요.”
일부러 약을 올리려 그러는 건지 주신은 예의 그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칭찬의 박수 같은 느낌의.
“됐고! 이야기가 왜 자꾸 새요. 성녀 얘기가 아직 안 끝났잖아요.”
신발을 벗지도, 바지를 걷어 올리지도 않고 발로 물장구를 치는 주신 때문에 튀어오른 물방울이 비처럼 얼굴에 닿아왔다. 저기요, 기분이 많이 나쁜데요? 첨벙거림이 거세지자 머슨이 손으로 얼굴을 막아 주었다.
“장난치지 말고요!”
“에리나, 내가 성녀를 지명 하는 것도 벌써 5천년이 지났어. 최초의 성녀는 야만인 보다 더 저급한 문화를 즐겼고, 고유의 살갗만 가지고 정돈 되지 않은 거리를 헤매는 짐승과도 별 다를 게 없었지. 지금이야 뭐, 어머니 신이니, 가정의 여신이니 하는 어울리지도 않는 칭호를 얻고 있긴 하다만… ”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인간이었던 성녀가 신이 된다니. 그렇다면 세르데벨라도 이 일이 밖으로 들추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사후엔 신이 되어 지옥이 아니라 천계에 들어앉게 되는 거였구나. 거기에선 또 무슨 일을 꾸밀지...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진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세의 신자들은 세르데벨라에게 기도를 올리겠지. 으으, 그건 소름끼칠 정도로 암울해지는 최악의 상황이다.
“세기도 귀찮을 만큼 많은 성녀들이 인간계에 머물렀었어.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이 전부 ‘한 차원’에서 선택된 거라 생각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선 대답할 말도 찾지 못하고 그저 주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바다에 잠겼던 다리를 꺼내고 쪽배 위에 폴짝 내려 뛰자, 그 여파로 배가 잠시 기우뚱 한다. 선 자리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지며 나무 바닥이 차츰 짙은 물색으로 변해갔다.
머슨에게 안겨있는 내 앞까지 훌쩍 다가온 주신으로 인해 쪽배 위에도 찰박거리는 물길이 생겼다.
“어떻게 생각 하냐니까”
마른 입술을 적셨다. 사실, 질문의 의도를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기에 주신의 말이 곧 무엇을 뜻하는 건지 정도는 단 번에 알아차렸다.
“...제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선택을 받은 성녀가 있다는 소리인가요?”
“질문은 내가 했지만, 잘 알아들은 것 같으니 넘어갈게.”
이 말은 즉, 차원이동을 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럼 내가 이쪽으로 넘어 오게 된 것도 설마…
“처음부터 날 성녀로 쓸 생각이었어요?”
손을 들어 모로 돌린 그가 손날을 새워보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선택은 열 살 이전의 아이들에게만 해당 되거든. 굳이 성인이 된 너를 부른 건 임시 성녀로서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야. 방금 전 내가 제안한 것도 같은 의미지. 10년 정도면 돼. 차기 성녀가 다 자랄 때 까지만 해주면 되는 거니까.”
존중 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강압적인 이야기에 너무도 허탈하여 몸에 힘이 빠졌다. 내 의사, 내 마음은 일절 무시한 채 무작정 끌려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주신은 이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는 듯 일말의 미안하다는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머슨, 놔 줘.”
그의 품에서 벗어나 처참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주신 앞에 섰다.
“왜, 나예요? 또 제비뽑기?”
“벨라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 이쪽 세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고 있는 아이면 좋겠다… 라고 생각 하던 찰나에 참 잘된 일이라 생각했지. 독자들 중 아무나 한 명을 뽑아서 임시 성녀를 시키고, 타락한 벨라를 대신 할 아이를 구하려 했었어. 그렇게 게으르지만은 않아, 나도”
“그 아무나가 제가 된 거군요.”
어긋나 버린 나의 미래와 뒤틀려 버린 나의 세계가 주신의 말도 안 되는 제비뽑기에 의해 결정돼 버렸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집어 놓은 자의 얼굴 치고 주신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말했던 대로 대수롭지 않기 때문일까.
“그런데 문제가 생겨 버렸어.”
내 손목을 잡고 쪽배 가장자리 까지 끌고 간 주신은, 바다 속 깊숙한 곳에 묻혀 있는 듯한 남색 문을 가리켰다.
시선이 떨어지자, 그것이 갈라지며 빛을 뿜었고, 사그라질 즈음엔 놀랍게도 내 모습이 안에 담겨있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 세계로 끌려 들어오기 직전의 내 모습 말이다.
포만감에 젖어있던 나는 곧 바로 잠에 빠져 들었고, 그 순간 자취 방 전체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한 번의 뒤척임 없이 푹 잠들어 있던 나는, 천장 까지 차오른 물이 서서히 빠짐과 동시에 영혼도 함께 쓸려나가 빈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과연 세상 사람들 중 몇이 내가 죽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에 입을 틀어 막았다.
“여기 까진 아주 순조로웠어, 그런데 이동된 장소가 하필 케일이 있던 곳이었지 뭐야.”
바다 속 장면이 바뀌어, 처음 머슨과 대면 했을 때를 비췄다. 인간들을 죽여 나가는 케일을 보고 공포에 젖은 채 떨고 있던 때를.
“여기서 생각했지. 아, 얘는 죽겠구나. 또 뽑기 귀찮은데 한 10년만 있다가 다시 생각하자. 라고 마음먹고 관심을 끊어 버렸어.”
벌레 쫓듯 손을 털자 짙은 바닷물이 깊숙한 곳 까지 단번에 가라앉으며 수면 위는 다시금 푸른 색을 유지했다.
“그런데 웬걸? 살아남은 것도 기적인데, 케일의 반려가 되어서 나타나다니 게다가 벨라의 이면도 밝혀내고, 차원의 문 까지 알아버렸어. 임시 성녀로 쓰기에 아주 적합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거지.”
한시름 덜었다는 듯 주신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머슨과 똑같은 음성인데도 당장 그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딴 거 안 해요.”
우주 안의 먼지. 발톱의 때 등의 말들이 주신 앞에 선 내 처지와 같이 들린다. 인간이 먼지를 걱정할 리 없듯이 주신도 내 마음 따위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다. 먼지가 될지언정 기관지 안으로 들어가 재채기라도 끌어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흐음-”
“임시 성녀인지, 꼭두각시인지 그딴 거 안 한다고요. 그렇게 전지전능 하시면 자아분열이라도 해서 이름을 세포1이라고 짓고 인간계에 꽂아 넣으시던지요, 난 전혀 관심 없으니까!”
의견을 강력하게 얘기한건 나인데 어째서인지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도 내가 되었다. 등 뒤에 머슨이 있지 않았더라면 배의 끄트머리까지 밀려 났을지도 모른다.
“이봐, 선택은 나만해.”
“...”
“하라고 하면 하는 거야.”
이런 말을 들으면 제 아무리 착한 어린이상을 몇 번이고 받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화를 내고 말 것이다. 욱한 마음에 버럭 소리 질렀다.
“싫다니까!”
“그럴 시간은 이미 지났어.”
“뭐요?”
“내가 널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직후부터 넌 권능을 부여 받은 거야. 십자가는 옮겨진지 오래라고. 그럼 10년간 잘 부탁해”
“이런 미친…! 나 안 해! 내가 그쪽이 하는 헛소리를 전할 것 같아? 죽어도 안 해!”
옷자락이라도 잡고선 당장 취소하라며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몸이 떠오르더니 어느새 구름과 나란히 할 정도로 높이 치솟아 올라가 버렸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말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처럼 선명하게만 들려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참, 케일 차원의 문 열어달라고 했었지?”
우우웅- 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신이 적셔 놓은 바닥이 요동치는 그림자처럼 움직여 대더니 이내 차원의 문으로 형태를 바꿨다. 계속 되는 불안정한 기울음에 머슨이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조심해”
“머슨, 어떻게 좀…”
“걱정 마. 에리나가 싫으면 하지 않는 거야.”
배가 갈라지듯이 바닥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 어? 위험한 거 아니야?!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곤 매달리다시피 안겨들었다.
“잘 가. 앞으로 차원의 문을 열 때는 굳이 날 찾아오지 않아도 되지만 처음 이니까 특별히 열어 주는 거야.”
후욱- 아래로 빨려 들어간 몸은 순식간에 바닷물 안에 잠겨버렸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소용돌이 안에서 죽을 듯이 힘을 줘 머슨에게 의지했다. 떨어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머리카락이 쉴새 없이 하늘로 향해 솟구쳤다. 장기가 떨어져 나가는 역한 느낌에 몸부림 칠 때 즈음
‘쿵!’
“하아, 하아…”
지독했던 물들이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독자님 : 짐덩어리가 짐을 나눠주려 하고있어!!
작가 : (적합성 100% 코멘트) 에리나는 호구야 호구 ㅠㅠㅠ
*독자님 : 끄아앙!길게 늘어지게 쓰셨다지만 독자들 입장에선 너무 짧은것 ㅠ 저번화에는 완결 1화 남았다고 하시더니! 밀당하시는거에여?#작가의 SM플레이 #독자 고문
작가 : 하... 지지난 화의 실수(이불 펑펑)(혹시라도 늦게 본 독자님들을 위해 삭제는 안함)(굳이?)전 당길줄만 압니다. 이리오시오 냉큼오시오!
*독자님 : 에리나 투잡하는거에여..?
작가 : 이야~ 에리나 완죠니 능력자네! 직업 하나 가지기도 어려운데
에리나 : 엿먹이는거 맞는데 이거
*독자님 : 아니 ㅋㅋ 마왕비가 성녀라니 아주 극과 극아니냨ㅋㅋ
에리나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신 : 괜찮아, 괜찮아 신자들한텐 숨기면 돼
에리나 : ??? 진짜 패고싶다. 나.안.해. 말했다 진짜!!!
*완전 대지각 ㅠㅠ 죄송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