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편
<-- 19. 이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영화를 끝까지 봐야 겠다 고집을 부리며 꿋꿋이 앉아있는 머슨으로 인해 기어코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 까지 모조리 지켜봐야 했다.
결국 머슨과 마님은 몸 정에 이어 마음 정 까지 들어 버려 사랑의 도피를 하였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딴 시골에서 오두막 한 채 지어 잘 살았다는 결말을 맞이했다.
머슴과 마님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점에서 무슨 감명이라도 받은 건지, 머슨은 고개를 끄덕여가며 아주 흡족해 했다.
“에리나가 세자인으로 간 이유가…”
“아니야!”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상영관 밖을 나서야 했다.
돌쇠, 마님 어쩌고 하는 영화의 포스터는 내용만큼이나 직설적이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머슴은 우람한 근육을 뽐내며 장작을 패고 있었고, 먼 발치에서 뇌쇄적으로 돌쇠의 몸을 훔쳐보고 있는 마님은 딱 봐도 그 의도가 ‘장작을 참 실하게 패는 구나’ 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가자!”
뛰어난 명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유심히 포스터를 보고 있는 머슨을 잡아끌었다. 대뜸 나타난 훤칠한 미남자가 에로영화 포스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웅성거림이 시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손을 잡고 도망치듯 나오자, 나보다 몇 걸음 뒤에 있던 머슨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 나란히 걸음을 맞췄다.
“에리나는 싫었어?”
“뭐가”
“영화. 머슨이 나오는…”
“머슨 아니라 머슴! 머슴! 넌, 머슨!”
‘슨’을 힘주어 발음했다.
“다른 의미야?”
“...”
답하지 못했다. 머슴을 생각하고 머슨이라는 이름을 붙인게 맞긴 맞았으니. 하지만 밤일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건 맹세코 아니란 말이야!
내 침묵을 멋대로 해석한 그가 ‘흐음’ 소리를 내며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승부 같은건 하지 않았으나 왜인지 진 기분이 든다.
“다음은 어디야?”
시간대가 오후로 넘어가자 인파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내 어깨가 부딪힐라 치면 머슨이 재빠르게 막아섰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 조차 닿지 못하게 철벽방어를 했다. 덕분에 난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을 보장 받으며 나아갔다. 앞을 막아서는 건물이 있다면 그것마저 없애 버릴 정도로 머슨은 유난을 떨었다.
영화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섰다. 길목 곳곳에 아기자기한 개인 카페도 많았으나, 숨만 쉬어도 눈에 띄는 그이기에 좁은 곳은 조금 불편해 일부러 2층 짜리의 넓은 카페를 골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요.”
진동 벨을 주는 점원의 손은 나를 향해 있었으나, 왜 눈은 머슨 쪽인지... 어라? 힘 빼요, 줬으면 가져가게는 해 줘야지! 강탈 하는 것도 아닌데 매몰차게 진동 벨을 빼앗자 점원의 눈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한가로운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긴 말이지, 음료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공부를 해도 되고, 대화를 나눠도 되고. 나도 하루에 한 번 씩은 꼭 들렸었어.”
별 다를 것 없는 프렌차이즈 카페지만 머슨과 함께 오니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특별한 추억으로 쌓인다.
흘러나오는 달달한 가요 속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 둘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나 설레는 일일 줄이야.
“에리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살았구나.”
의자를 당겨 앉은 머슨이 턱을 괴고는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이상해?”
“아니, 기뻐. 에리나의 일상 속에 내가 있어서.”
미소 짓는 머슨 때문에 새삼스레 뺨에 열이 올랐다. ‘눈부시다’라는 말은 이런 걸 보고 난 후에 쓰는 말이겠지.
“그래도 ‘머슨’의 뜻은 조금 의외… 윽.”
“아니라고 했잖아.”
부끄러운 화를 억누르며 그의 발을 강하게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징징- 거리는 소리와 팔위로 느껴지는 진동에 본능 적으로 그것을 잡으려 했다. 그래, 잡으려 했는데…
“에리나 위험해!”
‘콰앙!’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진동벨을 낚아챈 머슨이 그것을 냅다 집어 던졌다. 바닥을 향해 거칠게 내리 꽂아진 진동 벨은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다른 손님이 앉은 테이블이 몇 없긴 했지만, 열 댓 명은 되어 보이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머슨에게 향했다.
사고 쳤다.
처참하게 바스라진 진동 벨을 향해 달려갔다. 덩달아 따라온 머슨이 내 어깨를 감싸 쥔다.
“괜찮아?”
“진동 벨한테 묻는 거라면 당장 다시 사과하는게 좋을 거야.”
뼈도 못 추리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괜찮아?’ 라니. 그런 사이코 범죄자 같은 말은 어디서 배워온 거야.
“에리나, 위험할 뻔 했어.”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건 너야.”
진동 벨이 폭발이라도 한다고 생각했는지, 머슨은 여전히 위험물질로 간주하고 있었다.
“싸웠나?”
“터지는 소리 들렸는데.”
“가서, 봐 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마력을 흘려 보내 진동벨을 원래의 모습대로 만들어 놓았다. 그 모습에 머슨이 기겁을 하며 내 손에서 빼앗으려 들었다.
“가만히 있어 좀!”
신경질 한 방에 행동을 멈춘 머슨이 안절부절 한 상태로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1층으로 내려가 점원에게 진동 벨을 건네주고, 커피를 받아오고 나서야 그가 안도 한다.
“아까 그건 말이지. 커피가 다 됐다는 신호 같은 거야. 위험한 게 아니라”
“하지만 떨림이 심상치가 않았어.”
“신호를 알기 쉽게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세상을 알기엔 아직 어린 나이인 일곱 살 남자아이에게 설명해 주듯 최대한 살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방금 전 놀란 마음을 식히려 얼음이 동동 떠있는 커피에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키려는 순간 손이 멈췄다. 나, 이거 마셔도 되나?
내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머슨이 걱정스레 물어온다.
“왜그래?”
“카페인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임신 중 카페인이 아기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르는 와중에 함부로 마시는 것이 꺼림칙했다. 스마트폰이라도 있으면 검색이라도 해보고,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물어나 볼 텐데. 결국, 냉수나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마셔도 돼.”
“네가 어떻게 알아”
“그거, 알아 에리나? 우린 죽지 않아.”
“...”
“작은 에리나도 마찬가지지.”
얼핏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선 안 될 문제였다. 더군다나 마왕과 그의 반려가 불멸의 존재임을 알고 있었지만, 머슨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막연하기만 했던 것이 또렷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한 편으론 아기의 생명이 보장 된 거나 다름없으니 안심도 됐지만, 또 다른 마음으론 귀한 생명을 잘 품을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도 안 마셔.”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다. 모르는 게 많은 만큼, 배워야 할 것이 넘쳐나는 예비 엄마였고, 아기를 위해선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싶으니까.
머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나도.”
커피는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주구장창 수다만 떨다가 카페를 나섰다.
생각해 보니,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이 돌아다니기만 했네.
“배 안고파?”
“괜찮아.”
음식점에 자리를 잡기 보다는 길거리에 파는 핫도그를 하나씩 무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괜히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차라리 이 편이 낫기도 하고 머슨도 나도 출출함을 느끼지 못했던 지라 나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잡은 손을 흔들면서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지하철을 몇 정거장이나 지나치고, 내려서도 쭉 걷기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 오는 머슨은 불평 한마디 없이 옆을 지켰다.
“마지막 데이트 코스.”
후미진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놀이터가 보이자, 달려가 그네 위에 폴짝 앉았다. 저쪽 세계에도 그네를 비롯해 아이들이 타고 놀만한 놀이기구 같은 건 많았으니 머슨 입장에서는 신기할 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빨리 와”
옆자리의 빈 그네에 앉으라 했던 말인데, 머슨이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준다.
발이 떨어지며 공중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 너무 높이 올라간다 치면 머슨이 잡아 줬고, 심심하지 않도록 세게 밀어주기도 했다.
어른이 타기엔 다소 작은 미끄럼틀을 타고 시소에도 앉아봤다. 가뿐히 들어가는 나와 달리 머슨은 낑낑 대며 다리 한 쪽만을 겨우 걸치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시무룩해진 그가 괜히 모래 위에 박혀있는 타이어를 한 대 걷어찼다.
“야!”
펑! 소리와 함께 그것이 터져 버렸고, 놀라 그의 등짝을 때리니 재빨리 원상복구 시켜 놓는다.
좁디좁은 놀이터에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냈다. 해가 기울어지고 높은 고층 빌딩 사이로 몸을 숨기자 하늘이 주황빛으로 변해 갔다. 한산했던 놀이터 주위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퇴근 후 다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리라.
다시 처음의 그 그네에 앉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익숙한 놀이터, 익숙한 아파트 풍경, 익숙한 사람들.
발로 모래를 헤집던 것을 멈추고, 옆자리에 앉아있던 머슨의 그네 줄을 당겼다.
“잘 봐.”
소심한 동작으로 손을 뻗어 가리켰다.
“우리 아빠야.”
“...”
“진짜 아빠.”
수능 직후, 아르바이트 첫 월급으로 사드린 갈색 가방을 아직까지도 들고 다니신다. 빛이 바랜 검은 양복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원래 흰머리 저렇게 많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막내딸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3년간 주름도 많이 느셨다.
조금 더 보고 싶은데, 조금 만 더 보면 될 것 같은데, 아빠의 발걸음은 서운하도록 빨라 금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여기서 6층이 우리집이야. 지금 불 켜져 있는 집.”
안을 드려다 보고싶어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가늘게 뜨면 조금 더 잘 보일까 해서 목을 최대한으로 꺾고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머슨이 내 허리를 잡고 일어섰다.
“가까이서 보면 되지.”
그네와는 비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떨어진 몸은 우리 집 베란다 앞 까지 단숨에 날아 올랐다.
“호, 혹시 날 보면 어떻게 해…”
머슨이 손가락을 튕기자 전신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이젠 아무도 우릴 보지 못 해.”
나를 강하게 끌어안는 머슨에게 안정감을 느끼며 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는 여전히 다이어트 때문에 훌라우프를 돌리고 있었고, 이제 막 집에 도착한 아빠는 양말도 벗지 않고 오빠랑 스포츠 방송에 여념이 없다. 화가 난 얼굴로 엄마가 나오자 그제야 헐레벌떡 옷을 갈아입고 오빠는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퍼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게 진짜 내 모습.”
가족들 곁엔 내가 없지만, 쇼파 위에 걸린 가족사진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내 모습이 분명히 있었다. 머슨이 머리에 입을 맞춰왔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날 끌어 안는 팔은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 : 6일 연재도 환영합니다〉〈 아참! 완결은 몇화 정도 일까요?!
작가 : 150화 전에 완결 될 것 같습니다^^(생각보다 호흡이 길어져 당황한 작가)
*취소취소취소!! 아니 ㅋㅋㅋㅋ무슨정신으로 이렇게 남겼찤ㅋㅋ 앞으로 남은 횟수가 50화 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ㅠㅠ 아고 ㅠㅠ 정신머리 ㅠㅠㅠ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ㅠ아 진짜 너무 깜짝놀라서 바로 달려왔어여 ㅠㅠㅠㅠ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ㅠㅠㅠㅠㅠ
*독자님 : 작가님 머슴이 머슨으로 읽혀요 마님께 사랑 받는 머슨, 울끈이 붉끈이 머슨.
작가 : 음.... 그게 그거니 어떻게 읽으셔도 상관은 없을것 같습니다!(응?)
*독자님 : 제가 작가님 연재분 보고 노블 결제 시기 결정하는건 안비밀!!
작가 : 빠, 빨리 많이 연재 횟수를 쌓아야 독자님을 볼 수 있다는 뜻이군요!! (채찍)
*독자님 : 선택적 눈새 머슴님 이럴대만 눈치 빠름ㅋㅋㅋ
작가 :ㅋㅋㅋㅋ 선택적 눈새라는 말이 왜이렇게 웃기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빵터짐)머슨 요고요고 영악한것.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확인 못 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