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편
<-- 19. 이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요? -->
“누가 진짜로 그렇대? 입을 맞추자는 거잖아.”
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졌다.
“한 번 더?”
코가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머슨이 고개를 꺾으며 능글맞게 물어왔다.
“무슨 말을 못 해”
여기서 ‘응’ 이라고 답했다간 귀여운 뽀뽀 정도로만 끝나지 않을 걸 알았기에, 이마를 콩 하고 부딪쳐 머슨을 떨어뜨려 놓았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상식으로 그를 설득하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선의의 거짓말’ 이라는 것도 머슨의 사전엔 없는 단어가 분명하다. 역시나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선 수 백 마디의 설명 보다는 단 한 가지의 행동이 더 효과적이다.
허리에 양 손을 척! 얹고는 턱만 살짝 돌려 그를 쏘아 보았다.
“어제도 내 말 안 듣더니, 변한게 하나도 없네.”
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머슨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어갔다. 누가 가슴을 때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픈 표정으로 심장을 움켜쥐더니 이내 나를 품안 가득 껴안아버린다.
“놔, 널 믿은 내가 바보지.”
“미안해, 에리나.”
“내 상황은 전혀 고려 안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할 거잖아? 그럴 거면 나랑 왜 살아.”
“아니야, 아니야. 내가 잘 못했어. 제발 그러지 마.”
얼마나 몸에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어깨에 닿은 턱이 꽤 묵직하게 느껴진다. 잡을 수도 없이 훨훨 날아가 버릴까 싶어 머슨의 목소리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제도 미안하다는 말 들은 것 같은데. 이 상황 넘기면 넌 끝이야?”
오랜 만에 만나 좋은 말만 해 줘도 모자를 판에 못되게 쏘아 붙이는 건 나도 불편했다. 하지만 조금더 완벽한 위장을 위해선 반드시 지나쳐야 할 관문이었다.
“에리나가 했던 말 전부 기억 할 수 있어.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아.”
“그러면 뭐해, 지금처럼 떼만 쓰는데.”
“안 그럴게, 잘 못 했어.”
“하아, 못 믿겠는데…. 정말이야?”
“에리나가 원하면 개도 될 수 있어.”
한 마디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거지만, 쩔쩔매는 그의 모습이 귀여워 자꾸 바보 같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속을 완벽히 감춘 채 냉담한 가면으로 위장한 나는 그의 등을 두어번 두드렸다.
“놔.”
“...”
몇 걸음 물러선 그는 나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팔짱을 낀 채로 다시금 머슨을 향해 물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당연해.”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 마음은 중요하지 않아.”
“...좋아. 기회를 줄 게.”
그제야 머슨이 미소를 되찾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식, 쉽기는. 점점 마왕 조련의 고단수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
“그, 그러니까 이름이…”
“메이슨입니다.”
머슨이 무려 두 손까지 공손히 모으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집이 큰 편은 아니었으나 머물면서 갑갑하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은 없었는데, 키가 큰 머슨이 들어서자 마치 난쟁이가 살던 곳처럼 둔갑해 버렸다.
얼굴이 파랗게 멍이든 도윤도 입을 쩍 벌린 채 말 그대로 머슨을 ‘구경’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직업이 모델… 이신가요?”
“아니, 소를 키워.”
“이, 일단 좀 앉지 그래?”
머슨의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사는 개미마저 머슨을 의식할 정도로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 모두가 머슨에게 집중했다. 뭐, 물론 나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첫 날부터 거리낌 없이 다가오던 아주머니도 물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애꿎은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아까도 말씀드렸다 시피, 제 남편의 동생이에요.”
말하자면 도련님 되시겠다.
내가 말문을 열자 그제야 아주머니가 질문을 던져온다. 물론 바라보는 대상이 나인 것은 조금 의아했지만.
“걱정돼서 한국까지 찾아왔다고?”
“네. 도윤씨 한테 얘기 들으셨겠지만, 그때 상황도 좀 안 좋았던 지라 메이슨이 저만 데리고 급하게 빠져나왔어요. 도윤씨 미안해요.”
“아니에요, 챙겨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어요. 무사히 병원도 갔고. 누님한테 몹쓸 짓 했던 그놈은 경찰에 넘겼으니까 크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정작 얼굴에 흉한 멍까지 들어가면서 맞은 건 도윤인데, 내 걱정부터 해준다. 배려 깊고 자상한 마음씨가 아주머니를 닮은 듯하다.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분명 좋은 남편이, 아빠가 될 거라 생각했다.
“고마워…”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멀쩡하던 컵이 물을 쏟아내며 테이블 밑으로 떨어졌다. 아주머니가 당황하여 닦을 것을 가지러 갔고, 물 컵의 주인이었던 머슨은 오히려 태연해 보인다. 이건 실수가 아니다. 어린 아이 같은 심술인게 틀림없었다.
보이지 않게 그의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사고치지 마라.
옷이 다 젖어버린 머슨을 위해 도윤이 제 옷을 아낌없이 건네주었다. 넉넉한 사이즈의 회색 면티는 머슨이 입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으나 문제는 바지였다. 발목이 훤히 드러나 퍽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앉아 봐.”
엉성한 모습에 혼자 낄낄 대다가 결국 머슨의 바지 밑단을 접어 깔끔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뭘 입어도 모델 같네. 미미는 꼭 매니저 같고.”
뒷말은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쏟아져버린 물로 인해 삭막하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출출하지 않냐며 물어오던 아주머니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엌으로 향했고, 빠른 행동력만큼이나 테이블 위에 음식이 올라오는 속도도 만만치 않았다. 맛있는 냄새가 집안 전체에 퍼지자 너나 할 것 없이 도란도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슨의 옆구리를 세게 치자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아주머니를 도왔다.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쟁반 위에 음식이 담겨 있으면 열심히 나르는 일꾼 정도로 말이다.
새 손님이 늘었다고 솜씨를 한껏 발휘하셨는지 작은 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거대한 냄비가 테이블 중앙에 턱하니 놓여졌다. 아주머니가 웃으며 뚜껑을 열었다.
“닭볶음탕 먹어봤어?”
군침이 도는 붉은 빛의 소스가 보기만 해도 매콤해 보인다. 마음 같아선 허겁지겁 입에 집어 넣고 싶었으나 또 입덧이 시작될까 조금 멀리 떨어진 채로 몸의 상태를 지켜봤다. 어제 술자리도 그렇고 지금 까지 괜찮은 거 보면, 한 번 먹어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
“웨에에엑-”
“하이고, 안되겠네.”
올라오는 토악질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먹은 것도 없이 위액만 게워내고 있는데, 어느새 따라온 머슨이 등을 두드려 준다.
“...미안해.”
또 사과다.
등에 머물러있던 손이 이마에 닿았다. 푸른 빛이 약하게 번쩍 이더니 내 피부를 타고 몸 속 깊이 들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흡수 돼 버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메슥거리던 것이 사라지고, 머리가 시원해진다. 오히려 아까 전 보다 몸이 더 가벼워진 기분이다.
“마법이라는 거 정말 좋은 거구나.”
새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임신한 마족들은 대부분 이렇게 해. 가자, 조금이라도 먹어야지.”
습관처럼 날 안아들려는 머슨을 제지했다.
“어허, 또.”
“...”
그를 뒤로 하고 먼저 나갔다. 닭볶음탕이 담긴 냄비는 철벽봉쇄라도 당한 것처럼 뚜껑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에휴, 나 도윤이 가졌을 때 유일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게 닭이라 미미도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뇨, 이제 괜찮아요. 한번 게워내니까 말짱해 졌어요.”
죽이라도 끓여 온다는 아주머니를 말리고 뚜껑을 열었다. 킁킁. 이젠 냄새를 맡아도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다. 머슨 덕에 큰 고비를 하나 넘기고,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식사시간에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고비는 하나 더 존재했다.
“아 해봐, 아”
“아…”
젓가락질에 서툰 머슨이 반찬을 집지 못하고 몇 차례 떨구기 시작했다. 도윤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울 때 까지도 그는 한 젓가락도 먹질 못했다. 보다 못한 내가 조금씩 밥 위에 반찬을 올려줬고, 눈치 보며 몰래 몰래 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지금은 아예 대놓고 먹여주는 중이다.
처음 먹는 음식인데도, 머슨은 넙죽넙죽 잘만 받아먹었다. 혹 닭볶음탕이 맵지는 않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기 전, ‘싫어도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라고 했던 영향이 크긴 컸나 보다.
“입에 묻었잖아 바보야. 가만히 있어”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아주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눈만 돌려 살피니 아주머니와 도윤이 우리 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너무 안일하게 행동했나? 이거 누가 봐도 금단의 관계인데…
주의를 줘야 했던건 머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네. 맙소사.
입을 마저 닦아 준 후 서둘러 손을 내렸다. 턱을 괴고 우리를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확신에 차 말했다.
“매니저 맞네.”
“...”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초라해지는 기분이지.
========== 작품 후기 ==========
*미니미 낳기도 전에 다 큰 마왕키우는 에리나. 마왕세스 메이커.
〈독자님들의 상상력 퍼레이드〉
*독자님1: 죽었던 애아빠가 임신 소식 듣고 기뻐 관을 박차고 살아오는 걸로
작가 : 본격, 그 책은 워킹데드 였습니다.
*독자님2: 알고보니 아이 아빠가 겁나 잘 사는 집 5대 독자라 집안 반대가 심해서 별의 별 일 다 당하고는 결국 에리나가 못견뎌 도망치고, 애아빠 죽은걸로 하고 아이랑 둘이서 살려고 했는데 아이 아빠가 비행기 타고 날아왔다는 건 어때요?
아주머니 : TV에서나 보던 게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작가 : 본격, 소설계의 W
*독자님3 : 비행기사고로 죽은줄 알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더라 어때요?
작가 : 이쯤 되면 머슨그릴스(베어그릴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