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편
<-- 18. 조심해주실래요? -->
*
...상황이 조금 난처해졌다.
“미미씨도 한 잔 해요. 자, 자”
“안 돼요! 절대 안 돼!”
“네가 마시는 것도 아닌데 왜 난리야?”
내 앞으로 내밀어진 잔을 도윤이 단숨에 빼앗아 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불행히도 술 권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애꿎은 도윤만 죽어가는 중이었다.
“미미씨, 한국 오신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오늘 우리 한국인처럼 한 번 놀아 봐요!”
한국인처럼은 무슨. 나 한국인이야 이것들아.
“잔 채워! 잔 채워!”
도심 번화가에 위치한 호프집. 귀를 울리는 음악과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열기를 더해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전혀 즐길 생각이 없는(오히려 집에 가고 싶은)난 이 모임에 어울리지 못 하고 있었다. 괴롭다.
“...미안해요”
알코올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 도윤이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저희 언제 가요?”
“가긴 어딜 가요! 오늘 해 뜰 때 까지 마시는 거지! 건배!”
귀신 같이 내 말을 들은 남자는 잔을 들고 일어나 잔뜩 흥에 취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테이블 위에서 잔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도저히 뺄 수가 없는 분위기라 힘없이 물 컵을 들어 도윤의 잔에 내 것을 부딪쳤다.
“...건배.”
어쩌다 이런 상황에 까지 오게 된 거냐고 묻는 다면, 오늘 아침 눈을 뜬 그 순간으로 돌아가 얘기해 보겠다.
어김없이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내 입장에선 좀 특별한 일이 생겨 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아주머니가 출근 한 후, 나와 도윤은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 나는 딱히 볼 일이 없었지만 집에만 있기에는 무료해 도윤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어젯밤, 내내 스마트폰을 쥐고선 놓질 못 하더니 “됐다!”라는 고함과 함께 그가 아이처럼 쇼파 위를 방방 뛰어댔다.
아주머니께 등짝을 맞았지만 그마저도 신나 보였다.
“드디어 앨범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왔다고!”
이처럼 우리가 밖을 나선 이유는 직거래를 하기 위해서였다. 도윤은 좋아하는 해외 팝 가수의 단종 된 앨범을 구할 수 있게 되어 잔뜩 들뜬 모습이다.
약속 시간이 되자 판매자가 나타났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물건을 주고받았다. 1분이나 흘렀을까? 은밀한 것을 주고받는 사람처럼 거래는 아주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앨범이 든 쇼핑백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가는 도윤이 우습기도 하면서 귀여웠다. 남동생이 있다면 저런 느낌일까?
곧장 집으로 향할 줄 알았던 도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선 줄도 모르고 몇 발자국 앞서 나가다가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 들렸다 가요”
“네?”
도윤이 가리키는 곳은 아기옷을 파는 매장이었다.
쭈뼛쭈뼛. 아기 옷가게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밖에 디피 되어있는 귀여운 옷들을 보고 감상 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두 발로 직접 들어오게 될 줄은...
하얗고, 분홍분홍 하고, 노랗고, 하늘하늘한 옷들이 마치 선녀의 날개옷 같았다. 엄지 만 한 신발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이게 정말 발이라고? 괜히 그것을 툭 건드려 보았다. 이 작은 신발은 봄날의 만개한 벚꽃 잎이 신발 위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어요?”
“아, 아니. 너무 쪼그만 해서요”
어느새 내 옆에 서서 똑같은 신발을 보고 있는 도윤이 그것을 냉큼 집어 들었다.
“이거 주세요”
직거래를 하던 속도처럼 계산을 하고 나온 도윤은 잘 포장된 신발을 내게 건넸다.
“아기 선물이에요. 바깥에 나오기엔 아직 먼 것 같지만. 조, 조카한테 가장 먼저 주고 싶었어요, 제가.”
조카?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관계라 결국은 입 밖으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렇게 잘 생긴 동생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예? 몇 살… 그러고보니 나이도 안 물었네요.”
“스물 여섯이요”
도윤은 당연히 저가 오빠라고 생각했는지 꽤 충격을 먹은 모습이다. 도윤의 등을 두어번 두드려주었다.
“고마워요, 동생”
쐐기를 박아줘야지.
첫 날 느꼈던 어색함은 많은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누그러졌다. 도윤의 성격이 솔직했기 때문에 더 빨리 친해진 것도 있다. 다혈질처럼 보여도 여린 마음에 선함이 느껴진다.
곧 장 집으로 가려했던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오락실 바깥에 세워진 펀치기계를 보고 도윤의 승부욕이 발동했다.
‘빠악!’
힘껏 주먹을 날리자 점수가 단숨에 최고점 까지 오른다.
“오오-”
대학 시절 나도 재미삼아 몇 번 쳐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마다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처참한 점수를 냈었는데... 오랜 만에 보니 잘 하진 못하더라도 괜히 한번 쳐보고 싶다.
“나도 해볼게요”
“네? 몸에 무리가…”
“괜찮아요, 세게는 안할 거니까”
펀치 기계의 쿠션이 올라오고 웃으며 그것을 툭 내리쳤다.
‘빠악!!’
“...”
“어?”
도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굉음이 울렸고, 점수가 하늘을 뚫을 듯 치솟는다. 도윤을 밀어내고 가장 첫 번째 칸에 위치한 내 점수는 그의 두 배 가까이나 높았다.
“...모시겠습니다, 누님.”
신체 능력이 눈에 띄게 상승했다. 마왕의 반려라는 건, 여러모로 대단한 거구나.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나 자신이 두렵다는 거.”
오글거리지만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엿들은 도윤이 질색을 한다.
우리는 펀치 기계 외에도, 베이커리에 들려 빵도 몇 개 사고 시장에서 과일도 좀 골랐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 도윤의 양 손에는 짐이 한가득이었다.
“이젠 진짜 돌아가죠”
“네, 생각보다 늦었네요”
말 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걷다가 다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야, 강도윤! 너 맞지?”
“최희찬?”
“오랜만이다 이자식아!”
애초에 빨리 돌아갔어야 했다. 펀치기계고, 빵이고 과일이고 할 것 없이 그냥 곧바로 집에 들어 갔어야 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도윤의 지인은 자신을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동창이라 소개했다. 근처 호프집에 친구들이 다 모여 있다며 인사만 하고 가라는 말에, 도윤은 내게 허락을 구했고 차마 안된다고 말 할 입장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웬걸? 친구들만 있는 자리인 줄 알았더니 친한 선배들 까지 모조리 둘러 앉아있었다. 억지로 끌어 당겨져 자리에 앉았고, 남녀 둘이 걸어 다니는 걸 딱 마주친 우리는 졸지에 커플이 되어있었다. 도윤이 아니라고 언성을 높여도 그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관계를 정리해버린다.
커플로 오해 받는 것은 둘째 치고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술 권유’였다. 몸이 안 좋아 못 마신다고 얘기 했으나
“나도 며칠 전에 사랑니 뽑았어요!”
“얘는 치루 수술 받았어요”
라는 등 알고 싶지 않은 온갖 병명들을 줄줄이 들어야했다. 참다못한 도윤이 ‘사실 임산부야!’라고 소리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친구 감싸는 거냐며 뭇매만 맞을 뿐.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모든 술은 도윤이 처리하기 급급했다.
두 병은 마신 것 같은 도윤은 얼굴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 이상 내 술을 도윤에게 건내줬다가 그가 먼저 골로 가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한 번 내밀어지는 잔에 난 입을 댔다. 도윤이 놀라 잔을 빼앗으려 했으나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오, 박력있는데요!”
박력은 개뿔.
잔을 감싸 쥐어 내용물을 안보이게 한 후 입술만 살짝 축이곤 안에 있는 소주를 빈 병안으로 텔레포트 시켰다.
진작 이렇게 할 걸.
덩달아 내가 소주를 마신 걸로 착각한 도윤은 테이블에 자신의 머리를 쿵! 하고 내리쳤다.
“내 탓이야, 내 탓. 조카가…흑.”
취했구나.
무수히 내밀어 지는 잔들을 모조리 받았다. 물론 단 한잔도 마시진 않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눈을 굴려 상황을 봤다.
이쯤 되면 취한 척 연기해도 되겠지?
========== 작품 후기 ==========
연참입니다! 한 편 더 올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