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편
<-- 18. 조심해주실래요? -->
정신없이 방을 헤집던 케일의 손끝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성녀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성의위에 물든 땀은 그녀의 얼굴 곳곳에도 흔적을 남겨 어지럽게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었다. 벨라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도, 다가갈 수도 없었다.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 몸을 찌르는 분노는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후회가 돼.”
압박감으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는 벨라와 다르게, 머슨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걸어온다. 한 발 내딛을 때 마다 땅이 울리고, 공간이 일그러지며 세상이 잿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극한의 살기가 벨라의 몸을 관통했으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나는 죄인이 아니야!’
“커헉!”
“널 왜 죽이지 않았을까.”
안간힘을 다해 살기를 참아 내린 결과는 처참했다. 제대(祭臺)에 달린 거대한 은빛 십자가가 벨라의 몸 위에 떨어지며 매섭게 짓눌렀기 때문이다. 고통에 팔 다리가 허우적댄다.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무게에 악을 쓰며 십자가를 밀어냈다. 그러나 운동이란 것을 해 본적이 없다 시피 한 벨라의 아귀 힘 만으로는 치우기는커녕 어떠한 움직임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아흑!, 헉”
“에리나를 어떻게 한 거야, 벨라.”
깔린 성녀의 얼굴 옆으로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제발 이것 좀 치워 달라 소리치며 호소했지만 케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벨라가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말 해.”
케일의 목소리가 뚝 뚝 끊어졌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것을 참아 내느라 그런 것이었다.
“에, 리나 홀든은….”
힘을 주려 입술을 강하게 깨문 성녀의 볼 주변에 묽은 혈흔이 길을 만든다.
“널, 버렸어. 케일.”
‘쾅!’
벨라가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끄떡없던 십자가가 케일의 손가락질 한 번에 통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날아갔다. 겨우 숨통이 트였나 싶었더니 그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왔다. 케일이 그녀의 손 등위로 유리 파편을 꽃아 내렸기 때문이다.
“아아악!”
기다란 유리는 벨라의 희고 고운 손을 잔악하게도 찔러 내더니 뒤에 우직이 서있던 벽 안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손을 빼내려 했으나 전신을 파고드는 지독한 통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지를 뿐이었다.
“케일!!”
“에리나를 어떻게 한거야!”
끔찍한 고통 보다 더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내지르던 비명도 숨어 들어가고 붉은 안광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오히려 손을 찢고서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무섭다.
이토록 분노하는 케일의 모습을 처음 볼뿐더러, 어떻게 ‘자신’ 벨라 한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혼란이 찾아왔다. 그녀의 세상 하나가 무참히 짓밟혀졌다.
“...에리나 홀든은 이 차원의 사람이 아니야.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고!”
케일의 등 뒤에서 짙은 핏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천장을 뚫고 바닥 까지 흠뻑 적신 점액질의 핏방울들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원형의 마법진이 만들어 지고 푸른빛이 번쩍하더니 그 안에서 검은 생명이 고개를 든다.
“펜리르”
그것을 알아 본 성녀가 도망 갈 곳도 없는 벽을 손톱으로 벅벅 긁어댔다.
늑대 형상을 한 그것은 귀 옆까지 길게 찢어진 입 사이로 흉흉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케일과 비슷한 붉은 눈을 하고선 당장이라도 벨라의 몸을 찢어 놓을 듯이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오로지 죽이는 것에만 흥미를 느끼며 포악함으로 따지자면 마계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야. 케일!”
“넌 죽을거야, 벨라. 그리고 기억해. 지옥에도 내가 있다는 걸.”
“말했잖아. 에리나 홀든은 널 버렸다고! 내가 차원의 문을 연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세계로 돌아가 버렸어. 이젠 영영 만나지 못해. 떠나버렸으니까!”
머슨이 손을 들어 올렸다. 펜리르가 그 신호를 보더니 신이나 입을 벌린다. 윗 턱은 천장에 닿고, 아래턱은 바닥에 단단하게 고정이 되어있다. 이 건물 자체를 한 꺼번에 집어 삼킬 기세로 그 안에 있는 혀가 요동친다. 벨라는 그 모습을 보더니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 치며 케일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케일, 믿어줘! 증거가 있어.”
벨라의 눈이 바닥을 향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한팔 때문에 차마 움직이지는 못하고 발 한쪽을 길게 뻗어 무언가를 툭 건드렸다.
에리나가 채 가져가지 못했던, 케일이 불태워 버리지 못했던 책.
“내가, 에리나 홀든이 살던 세계에서 적었던 소설들이야. 에리나 홀든은 이 책을 읽었고 너에 대해서도 전부 알고 있었어. 그리고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널 잘 부탁한다는 얘기까지 했었다고”
전 대륙의 언어를 꿰뚫고 있는 케일마저도 처음 보는 글씨였다. 케일이 망설임 없이 벨라의 머리를 한 손에 쥐었다. 마력을 불어 넣자,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지니고 있던 지식들이 전부 케일에게 흘러들어왔다.
고위 마법 중에서도 당연 으뜸으로 통하는 정신계 마법은, 시전자에게 필요로 하는 마력도 상당할뿐더러 마법의 대상자에게도 치명적인 리스크가 따른다. 기억을 잃거나, 정신 연령이 현저히 낮아지거나, 청각과 시각이 없어지는 사례도 있었다. 정도에 따라서 목숨을 잃기도 한다.
반항할 시간도 없이 당해버린 벨라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몸에 힘이 풀리자 꽂혀 있던 유리가 생살을 찢어내기 시작한다. 결국 벨라의 몸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단숨에 한글을 깨우친 케일은 벨라가 내민 책들을 빠른 속도로 읽어갔다. 베넌 대학살부터 황제, 천신이 등장하고 있지도 않은 사건들을 그럴싸하게 나열한 역겨운 로맨스 까지. 케일이 그것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 성녀라는 여자 기억나? 여기가, 어땠어?’
반응을 엿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장을 가리키며 물어오는 에리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벨라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지 않은 이상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내내 뜨겁던 피가 차게 식고 그보다 더한 절망감이 온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케일이 주먹을 내리치자 신전 전체가 흔들렸다. 곧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부스러기 들이 떨어져 내린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눈꺼풀 안으로 숨어버렸다. 케일의 몸에서 푸른 빛이 번쩍 하더니 신전을 떠나 마왕성으로 이동되었다.
“마, 마왕님?!”
갑작스레 나타난 그의 존재에 성의 내부가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넉살좋은 레이넌도 차마 그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영혼마저 베어버릴 듯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긴 다리가 망설임 없이 한 곳을 향했다. 누구도 나올 수 없게 사슬로 칭칭 감겨져 있는 검은 문은, 그 높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문의 크기와 비례한 거대한 해골 문지기들은 케일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로막던 창을 치우고 고개를 조아린다.
케일이 문을 향해 손을 뻗자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거친 바람을 일으키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들리는 것은 무수한 영혼들의 비명들이었다. 지옥불에서 뼈가 녹아 내리면 다시 생겨나고 또 다시 뼈가 녹아내리기를 반복한다. 죄 많은 영혼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케일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그림의 연속이었으나 케일은 무언가를 찾은 듯 눈썹이 꿈틀 거렸다.
‘탓’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덩이 사이로 영혼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몸이 반절 녹은 상태로 도무지 형상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다시 한 번 손을 튕긴다. 순식간에 제 얼굴을 찾아간 영혼은 케일의 발 아래로 떨어졌다.
나체의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살려 달라 외쳤다.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마, 마족님들의 신체 같은 건 절대 먹지 않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여기서, 이 끔찍한 지옥에서 꺼내주세요. 제발.”
머슨이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이름이 뭔가.”
“에리나 홀든입니다.”
고유의 밝은 기운도, 사랑스러운 미소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영락없는 에리나 였다.
========== 작품 후기 ==========
*호에에에??
*독자님 : 헐 다음 작품도 따라갈게요! 이북 나올때까지 시간 좀 걸리니까 정주행5번은 해야겠네요
작가 : (사랑의 총알 빵야빵야!) 독자님을 내 마음 속에 저!장!
독자님 : (프로그램이 작동을 중지했습니다.)(저장실패)
*독자님 : 행복한 가족의 음성을 듣는 에리나 넘 불쨔해여 ㅠㅠ
작가 : 에리나 ㅠㅠ 소금에 저려져서 앞으로도 짠내를 풀풀...
에리나 : ?? 열심히 김치 공장에서 일 할 뿐인데...
*독자님 : 남주가 이 정도로 애닳으면 남주굴림물 아닌가요
작가 : ...!!(깨달음) (발상의 전환) 머슨 이쫘식. 너 고생하구 이써꾸나?!ㅠㅠ
머슨 : (지옥불)
*독자님 : 새작품 보러 가야 겠어용 왠지 용이 주인공일것같아 그놈이 남주같아!(촉 발동)
작가 : ...등장도 하지 않은 시엘. 다른 작품에서 먼저 언급되다.
시엘 : 시엘둥정 (그러나 주인공 같다는 말에 쀼듯)
*독자님 : 노ㅇ... 아니 냥집사가 되신걸 추카드려요!
작가 : 네, 노예입니다. 오늘도 똥푸고, 물 드리고 사료 부어주었습니다. 어찌나 혹독하신지... 발톱으로 채찍질도 많이 맞는 중입니다
*독자님 : 말순이요?! 차라리 김떡만으로 해주세요!!
작가 : ㅋㅋㅋ(빵터지다) 에리나 니가 골라방ㅎ
에리나 : 작가를 살릴지? 죽일지?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로즈린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