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편
<-- 17. 이제와서요? -->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린 체닌이 보였다.
더위가 가시고 이제는 외투 없이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로 날씨가 서늘해졌지만 체닌은 얇은 외투 한 장 걸치지 않은 채였다. 팔꿈치를 겨우 가리는 수수한 밤 색 원피스는 잠옷이라 하기엔 거추장스러워 보였으나 평소 그녀가 즐겨 입던 화려한 드레스를 생각 한다면 꽤 놀라운 복식 변화였다.
새벽녘으로 넘어가자 오후에 비해 확연하게 뚝 떨어진 기온은 체닌에게 있어 고통이었을 것이다. 무슨 정신으로 저런 옷차림으로 밖에 나왔는지... 추위에 연신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모습이 보기에 편하지만은 않았다.
“잠시만.”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대충 보이는 겉옷을 집었다. 머슨의 것이었지만 여자 몸을 감싸주기엔 널찍한 품이 좋았으므로 딱 알맞다고 생각했다.
복도로 나와 방 문을 꽉 닫고는 체닌에게 겉옷을 건냈다.
“잠옷도 아니고 외출복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거야.”
“...낮에는 이 정도 추위는 아니었어.”
버티기 힘들었는지 냉큼 옷을 받아든 체닌이 등 뒤로 커다란 외투를 둘렀다.
“나갔다가 이제 들어 온 거야?”
“아니”
외투를 붙잡고 있는 손의 뼈마디가 눈에 띄게 튀어나와있다. 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겁먹은 소녀와 같은 모습이다. 학교에서 발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의 그것과도 같았다.
솔직히 이런 체닌의 의외의 모습에 당황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것을 들추어냈다가 꼬리를 숨기고 영영 안으로 숨어버릴까 싶어 기색을 감췄다.
“그럼 어딜 가려고 했었는데?”
“...”
“낮부터 어딘가를 가려고 옷을 입었다가, 지금 까지 황성 밖으로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채라는 소리잖아. 거기가 어딘데”
정확히 맞부딪혀있던 체닌의 시선이 떨어졌다.
“...같이 가.”
“어딘지 알아야 같이 갈 거 아니야.”
“나 혼자선 도저히 못가겠으니까. 같이 가자고.”
묻는 말에나 제대로 대답해줄래? 그러나 체닌은 고집을 꺾지 않고 여전히 자기 할 말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처형은 열 두시야. 그 전에 다녀오자. 그러니까 아침 먹고 방 안에서 기다려. 내가 다시 올 테니까.”
“야, 그러니까 어딜…!”
억지로 무언가를 떠넘기듯 말을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 버린다. 그녀가 사라져 버린 빈 복도에 잠시 오도카니 서서 도대체 어디를 가자고 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쟤도 임신했나.”
대한민국 식으로 얘기하자면 산부인과.
현재의 내가 정말 간절히도 가고 싶어 하는 곳. 처한 모든 상황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생각됐다. 이 세계에 그런 게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만약 그런거라면 나한테 숨길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하암-”
뒤늦은 잠이 쏟아졌다. 춥기도 하고. 체닌에게 외투를 건내줘놓고는 정작 나는 슬립하나만 달랑 입고 나온 채였다. 쏜 살 같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머슨이 뜬 눈으로 가만히 누워 나를 올려다 본다. 덮어주었던 이불이 한치의 흐트럼도 없이 고정된 모습이었다. 이 말은 즉 정말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는 건데, 내가 밖에서 체닌과 있을 동안 망부석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머슨을 생각하니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피어올랐다.
차디 찬 팔 다리를 이불 안으로 집어넣자 몸이 녹는 것 같다. 내가 옆자리에 들어옴과 동시에 머슨이 몸을 움직여 나를 품 안 가득 안아준다. 그의 체온이 무척이나 따뜻하여 추웠던 감각이 바람을 타는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려갔다.
“옷 가져 간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몸이 차.”
미안, 네 옷 체닌한테.
추운 날씨에 나는 껴입지도 않고 남한테 겉옷을 줬다는 말을 하면 백이면 백 잔소리가 따라 붙을 것이므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은 무척 졸리니까. 난 머슨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졸음어린 응석을 부렸다.
“우음- 불, 불”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을 때리던 불빛이 어둠에 잡혀 들어갔다. 이제야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진다.
그가 무어라 나에게 더 말을 붙였지만 웅-웅- 거리기만 할 뿐 귀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귀를 대고 있으면 머슨의 심장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 그것이 자장가 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정수리에 내려앉는 그의 입술을 마지막으로 느끼고 편안한 잠에 몸을 실었다.
*
“잘 있을 수 있지?”
“없어.”
“또 또”
어제 밤 얘기했던 대로 체닌은 조식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나를 찾아왔다. 배 꺼질 틈도 없이 방 문을 두드리던 체닌 때문에 난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옷을 갈아입었다. 상황을 대충 머슨에게 설명하자 또 자기는 데리고 가지 않는 거냐며 입이 대빨 나와 있는 머슨을 달래고 또 달랬다.
“에리나가 없는데, 시체랑 내가 뭐가 다르지? 차라리 아비츠 대신 내가 교수대에 서는편이 낫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마밍아웃(마왕인 것을 밝히다.)한 머슨이 맞나 의심이 든다. 아니, 마왕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고 나라 몇 개는 뚝딱 뚝딱 해먹을 수 있는 마왕이라며
여전히 시무룩해하고 있는 머슨과는 역시 매치가 되지 않는다. 키가 큰 머슨의 뺨을 감싸려 팔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그가 허리를 낮춰 주어 결국 내 시선 바로 앞에서 그를 손쉽게 만질 수 있었다.
“그 자존심 센 애가 야밤에 옷을 껴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찾아왔어. 제딴에는 용기 내어 말했는데,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타인이 따라 붙으면 다시 숨어버리고 말걸”
“나는 타인이 아니야.”
“체닌의 입장에선 맞아.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왕이라는 작자가 옆에 있으면 더 그렇지.”
“내가 마왕인게 이렇게나 귀찮고 걸리적거리는 일인줄 몰랐어.”
야야, 누구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건데 그런 말을 아주 잘도 한다?
머슨의 이마에 가볍게 콩, 머리를 부딪쳤다.
“나도 너랑 매일매일 한시 한초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고 싶어.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진짜 많이 사랑하나 봐.”
머슨의 눈동자가 짙게 변한다. 아이 같은 투정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건장한 육체로 여심을 흔드는 남자가 되어 나를 바라본다.
두근두근
그의 색스러운 얼굴에 심장이 뛴다. 언제 봐도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대놓고 유혹하면 뿌리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낮게 깐 시선과 함께 머슨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며 나에게 다가온다.
“야, 야! 뭔 말을 못해!”
난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입술을 막았다. 그러나 머슨은 멈추지 않고 내 뒷목을 가볍게 쥐더니 손 바닥위에서 입술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키스하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한 채였고 손바닥위의 입술은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혀가 손을 쓸어 올리고 잡아먹을 듯 오물거리는 입술은 미치도록 자극적이다.
“날 버리지마.”
손바닥 아래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눈에 사로잡혀 잠시 말 하는 법마저 잊었다. 내 입에서 대답이 늦자 그가 이를 세워 여린 살을 긁어 내렸다.
“읏, 나, 나도 너 없음 못 살아. 진짜로.”
그가 웃는다. 아주 예쁘고 아주 행복하게. 영원히 그렇게 미소 짓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쾅! 쾅!’
“멀었어?”
아차.
머슨에게 잠깐 인사만 한다고 하고 밖에 세워뒀던 체닌의 존재를 망각했다. 놀라 서둘러 손을 떼자 그대로 머슨의 입술이 다가와 기어코 짧게나마 입맞춤을 해버린다.
“열 두시 전까지는 올 거야.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문 앞까지 뒤 따라오는 머슨을 겨우 밀어 내고나서야 밖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체닌은 팔짱을 낀 채 도도해 보였지만 표정은 어제의 연장선이었다.
우리는 황성 밖을 완전히 나올 때 까지 한 마디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던졌으나 체닌이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제대로 답을 해주지 않아 대화가 이어가지 않은 거지만.
“어디 가는지 말 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마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굳건한 두 발로 걸어서 한참이나 가야했다. 서늘한 날씨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혀온다.
“거의 다 왔어.”
라고 말했을 때에는 체닌의 입에서 장소를 굳이 듣지 않아도 내가 직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다.
아비츠 백작의 저택.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거기였다.
머슨에 의해 산산조각이 된 아비츠 백작의 저택은 아직도 그 잔해가 치워지지 않아 돌무더기와 피어오르는 먼지로 엉망이었다.
얘기로만 들었지 이정도로 박살을 내놨을 줄은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조금 놀랍다.
“저택이...”
체닌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 앞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저택이 이지경이 된지 한달이 훌쩍 넘었음에도 직접 찾아오는 건 체닌도 처음이었나보다.
“내 꿈이, 희망이 무너졌어.”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폐허가 된 백작의 저택을 체닌은 끊임없이 눈에 담았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재산은 전부 압수당했고 여기에 남은 것은 짧게나마 명성을 알렸던 그 시절의 잔재뿐이었다.
“꿈도 희망도 아니야. 널 가뒀던 쇠창살이 무너진 거지.”
그녀를 위로하고자 꺼낸 말은 아니었다. 체닌을 이용하고, 그녀의 마음속 깊이 잠들어있던 추악한 것을 억지로 꺼내게 만들었던 아비츠 백작의 저택은 절대 꿈도 희망도 될 수 없다.
“네 말이 맞아. 어제 네가 했던 모든 말들이 맞았어.”
체닌의 물기어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부모 없는 년이라는 소리도 듣기 싫었을 뿐더러, 그 냄새나고 폼 나지 않는 시골 생활 따위는 더더욱 하기 싫었어. 한 번 뿐인 인생 나를 위해 살자, 누릴 꺼 다 누리면서 호화롭게 살아보자 이 생각만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던 거야. 그런데 출발이 어긋나기 시작했어.”
“...”
“그 돼지자식과 함께한 매일 매일이 지옥이었거든. 내가 사랑한 건 그 새끼가 아니라 그의 권력과 부였고, 난 언제나 짝사랑만 해야 했지. 나의 사랑에 대해 돌아오는 건 모욕, 괄시, 천대 그리고 동정뿐이었거든.”
체닌이 무너진 저택 가까이 걸어가더니 돌들이 무질서 하게 깔린 바닥위에 위태롭게 섰다. 허리를 숙여 손 안에 집기엔 조금 커다란 돌멩이를 버겁게 집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놓지 않았어. 가족이고, 고향이고, 은혜고 모두 다 저버릴 만큼 아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으니까, 나를 무시하는 것들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서는 상상만으로 늘 짜릿했으니까. 하지만…”
체닌이 삐끗 거리는 구둣발을 움직여 서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치 없는 무수한 돌덩이들이 되어버린 저택을 딛고선 체닌이 눈물을 흘린다. 무너져버린 저택, 그것은 체닌 그 자체였다.
“이 꼴이 되었지.”
========== 작품 후기 ==========
*에리나가 부재중일때의 머슨
시종 : (낰낰) (문이 열린다.) 황실 제일의 주방장이 심혈의 기울여서 만든 디저ㅌ..
케일 : (안 꺼져?)
시종 : 흐에으아아아악-!
*독자님 : 체닌 그러고보니 정신 많이 차렸네요!
작가 : 역시 고생은 사람을 변하게 만듭니다.(권장x)
*독자님 : 선작 만 돌파라니! 삼만 찍어도 될 거라고 생각해여 너무 잼써여ㅠㅠㅠ
작가 : 아니힛, 그런 극찬을 해주시다니 ㅠㅠ (감사감사) 이 코멘에 제 맘속 선작은 이미 십만을 넘은 기분임미댜ㅠㅠ!!
*독자님 : 작가님 소설이 제 취향 범벅이예형!(꾸금씬도 잇힝)
작가 : (메모지, 연필) 어떤 플레이를 조아하시져?
독자님 : 묘하게 기분이 나빠
*독자님 : 작가님 단행본 내실 생각없으신가영? 제가 단행본 원한적도 산적도 없는데 이 작품은 넘나 탐나여 8ㅅ8!
작가 : 단행본, 소량으로 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이런 저런면에서 무지한 작가라 원활하게 진행이 될까 모르겠네여 8ㅅ8 (작가도 독자님 코멘트들 박제하고싶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