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편
<-- 16.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2 -->
죽을 힘을 다해 참고 있었던 거구나, 많이 두렵고 무서웠었구나. 살이 파이는 무자비한 채찍질 속에서도 아닌 척 눌러 내렸던 나의 공포심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머슨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온 몸을 가렸던 두꺼운 막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목놓아 우는 나를 달래는 머슨의 목소리는 어째서 인지 내 것보다 더 구슬프고, 아팠다. 피로 범벅이 된 머리칼에 정성들여 입을 맞추고 나를 쓰다듬는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울음은 더 커져갔고, 속에서부터 꾹 눌러 내려왔던 온갖 불온한 감정들이 폭죽처럼 쏘아 올려졌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옆에 없었어!”
머슨의 탓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괜히 그의 가슴을 내리치고 소리 질렀다.
“미안해, 에리나. 정말... 정말... 하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될 까.“
자기의 탓도 아니면서 왜 저런 가슴 아픈 사과를 하는지 모르겠다.
뒤에서 비명이 터지건 말건,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건 말건 난 오로지 그를 느꼈다. 원망은 핑계고 혹여나 다시 떨어질 까 옷깃을 꽈악 붙잡고, 뺨을 비볐다.
“내 옆에 있어, 내 옆에 있으라고”
“그럴 거야.”
절망의 끝자락 속에서 깨달았다. 머슨의 곁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난 행복할 수 없다고. 머슨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머슨을 사랑하고 있다고.
“반드시 에리나 옆에…”
긴장이 풀리면서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이 아늑하고 깊은 곳으로 넘어갔다. 아이처럼 펑펑 울다가, 아이처럼 까무룩 그의 품안에서 잠에 빠져 들었다.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모든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
아비츠 백작의 호화로운 대저택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수도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입소문에서 그치지 않고 공식적으로 기사화 되어 각 신문사 특보의 헤드라인에 걸렸다. 사회의 이슈 보다 자기가 오늘 무얼 하면서 놀지가 더욱 중요한 어린이 골목대장도 알고 있을 만큼 이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나가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사자인 아비츠 백작 또한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웃기는 소리 말라며 믿지 않았으나, 실제로 목격한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자 곧 사실임을 인정했다. 그 대가로 이 소식을 전한 시종의 목숨이 덧없이 사라져버렸다.
“세르데벨라 르네!!”
전날 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반란에 사용 될 사병들을 끌고 세자인으로 가 간단하게나마 흑마법을 배운 이들과 함께 훈련을 시키라는 명을 성녀로부터 받았었다. 잠 한 숨 자지 못하고, 성녀가 미리 알아 봐 둔 지름길을 통해 비밀리에 수도를 통과했으나 백작은 가던 길을 멈추고 말의 고삐를 틀었다.
“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가문을 망하게 할 작정이었던 거야!”
방향을 트는 백작의 행동에 주위가 부산스러워졌다. 우왕좌왕 하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싸늘하게 죽어간 동료의 시체를 상기시키고 뒤 따르던 사병들도 일제히 발걸음을 백작과 같이 했다.
“수도로 돌아가십니까?”
“황성으로 간다”
“예?!”
“성녀의 목적은 반란이 아니야. 나를 망가뜨리려는 거지!”
“백작님?”
백작의 터무니 없는 말에 사병중 하나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성녀가 거두어주지 않았다며 백작은 여전히 존재감 없는 약소 가문중 하나였을 터, 무엇하러 이런 귀찮은 일까지 벌여가면서 백작을 망가뜨리려 하겠는가? 시종은 그 말은 허무맹랑하다고, 틀렸다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여기서 그의 말에 반하는 내용을 입에 담았다간 다시는 사랑하는 가족을 보지 못할 까봐 잠자코 백작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뭣 들해?! 황성으로 간다!”
“...!”
“반란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내가 황제가 되겠어. 세르데벨라 르네 그년이 내 아래를 쪽쪽 빠는 모습을 두 눈으로 반드시 봐야겠다!”
“...다들 들었지, 목적지는 황성이다!”
“아아 그래. 넌 이상태로 세자인으로 향해라.”
“예?”
“흑마법사들을 전부 황성으로 데리고 와. 그 녀석들 텔레포트 정도는 다들 수월 하게 할 수 있을 거다.”
“거리가 멀어서 피가 부족 할 수도 있습니다.”
“뭘 걱정하나. 쓸모없는 노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데.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끌어 담아”
“...”
“자, 우리 아비츠가의 위엄을 만 천하에 알릴 시간이다!”
원래도 우둔하지만 분노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백작은 사리분별을 할 수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는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황제가 된다는 망상 하나에만 빠져 위풍당당 하게 말을 몰았다. 마지막 행선지에 대한 여정이 어리석음과 비례했다.
*
몽롱한 상태이긴 했지만,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을 보아 어느 정도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가 맞긴 맞는 것 같다.
“아파”
무의적으로 흘러나온 말이다. 온 몸에 수분이 돌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느끼는 고유의 건조함은 없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온 몸이 부서질 듯 아파왔다. 얼굴부터 발 까지 어디 하나 아프지 않는 곳이 없다. 겨드랑이 까지 아려왔으니 말 다했지 뭐.
“조금만 버텨 줘”
“얼마나?”
“한 숨 더 자고 일어날 때 까지.”
“이렇게 평생 아프면 어떻게 하지.”
“절대 그럴 일 없어”
눈을 감고 머슨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눈 옆으로 눈물이 자꾸만 떨어진다. 왜 이렇게 울보가 됐지.
“체닌은?”
“에반이랑 황성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에리나 생각만 해.”
“나는 지금 어딘데?”
“마계.”
웃음이 세어나왔다. 마계라는 말을 듣자마자 또 안심이 되는 건 뭐람. 딱 한 번밖에 안 와본 주제에 왜 또 이런 생각은 드는지.
“...어이없고 불편하지?”
내 웃음을 다르게 해석한 머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에리나의 상처가 빨리 회복되려면 마력이 많이 흐르는 마계로 이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건 단순히 나만의 생각이었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세자인으로 가는 건데.”
듣고 보니 세자인도 썩 나쁘진 않았을 것 같다. 이른 아침 주변을 가득 채웠던 새벽 내음과 녹을 머금은 초원들이 그리워. 떠나기 직전의 세자인은 혼란의 중심에서 힘없이 휘둘리고 있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리움에서 걱정으로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머슨.”
“응.”
으으윽. 머슨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눈을 뜨자 내 얼굴 바로 위에서 눈을 내려 나를 담고 있는 머슨이 보인다. 갓 태어난 아기병아리를 다루듯이 내 작음 움직임에도 오버스럽게 양 손을 머리 밑에 가져다 댄다.
“레이넌 씨와 피에르 씨도 있겠네?”
“그렇지.”
“부탁이 있어. 그 두 분을 세자인으로 보내 줘. 세르데벨라가 무슨 수를 쓰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떠올린 눈꺼풀 위로 아늑한 온기를 머금은 손이 닿는다. 아, 아직 눈 감기 싫은데. 슬쩍 얼굴을 피하자 이번엔 뺨을 쓰다듬는다. 닿을 듯 말 듯 아주 가벼우면서도 느리게.
“아무 걱정 말고 자.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다 해결 돼 있을거야.”
옛날부터 느꼈던 거지만 세상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머슨 앞에서면 잠시 머리칼을 뒤흔드는 옅은 바람일 뿐이었다고 생각되게 된다. 머슨의 이 한마디에 나는 근거도 없이 납득하게 되었고, 그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나를 실망시키는 일 따위 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았기에 속 편하게도 그럴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 : 완결 되면 이북 나오는 건가요?
작가 : 넵〉〈! 그래서 부지런히 써야 되는데....
*독자님 : 작가님 힘내세요 예전과 같은 깨발랄깨방정 느낌이 약해지신것 같아여
작가 : 8ㅅ8!! 엉엉엉 사회가 저를 이렇게 피폐하게 합니다. (나만 흑염룡 없어)
*독자님 : 작가님 우리집에 가둬두고 글만 쓰게 하고싶다. 참고로 저희집 치킨집 합니다.
작가 : 진지하게 갇히고싶다. 1일 1닭 하고싶다. 상상만 했는데 개행복.
*독자님 : 여기서 질문 체닌은 쨍한 주황머리 아니였나요?
작가 : (동공지진) 삶이 힘들어서 머리색이 어두워 진걸로...
독자님 : 응 어림 없어. 수정해.
작가 : 네.
*독자님 : 하이힐로 얻어 맞은 근육이들은 초금속합금으로 피부가 되어있나요?
작가 : 뇌가 근육으로 되어있어서 괜찮습니다.
독자님 : 오 일리없는 개소리
작가 : 근육이들은 최초의 기억이 운동이었을 만큼 다련된 자들입니다. 힘없는 여성 둘이 아무리 발악한다고 해도 그들을 막을 순 없었죠.(아련)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 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벚꽃 다들 보셨나여? 전 따로 보러 가지는 못하고 출근길에 벚꽃이 엄청 예쁘게 피어있어서 사진 몇방 찍었어요! (#지각이어도 #벚꽃셀카찍기 #이것이바로 #솔로의길)
*후에 수정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