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편
<-- 16.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2 -->
머슨이 내 어깨를 잡아 세우고 물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던 머슨의 얼굴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미소가 그려졌다. 사랑하는 사이인 나조차 처음 보는 아주 다정하고 따뜻한 미소가.
홀린 듯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배는 움직이고 있었으나 수면 위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것처럼 얌전하게 고여 있었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위로 비춘 것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제 발로 걷기에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갓난 아이.
‘어딜 봐서. 너랑 완전 판박이네.’
머리와 눈의 색은 나와 같았으나, 작은 손을 오물거리며 방긋 미소 짓고 있는 아이의 이목구비는 머슨의 것이었다.
아이가 웃자 덩달아 웃게 되고, 마음이 녹진해진다. 손을 뻗어 만지자 차가운 물의 감촉과 함께 아이의 형상이 흔들리더니 이내 바다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왜 그래?’
멍 하니 바다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걱정어린 말투가 얼굴 바로 옆에서 따스하게 들려왔다.
‘작은 에리나는 사라지지 않았어. 이 안에. 아직 있어.’
깨어질까 조심스럽게 배를 어루만지는 머슨의 손길이 조금은, 아니 많이 낯설다.
‘...태몽이야?’
대답 없이 햇살을 받으며 웃기만 하는 머슨이 얄궂다.
‘용이 여의주를 치마폭에 던져준다거나, 집채만 한 복숭아가 굴러들어온다거나, 호랑이, 금은보화 이런거 안 나와? 뭐가 이렇게 담백해.’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예고편 없이 본 편 보여주는 느낌이기도 하고 23년을 대한민국에서 살아왔던 나의 정서와도 맞지 않았다.
머슨은 역시나 내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뻥 뚫린 바다 위에서 뭐 달리 볼게 있다고 의아하게도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긴다.
‘탓’
‘으어어?!’
굉음과 함께 배가 뒤집힐 듯 요동쳤다. 물이 마구 튀어 올랐으나 신기하게도 몸에는 닿지 않는다. 하늘을 닮아 푸르렀던 바다가 어느 순간 검은색으로 바뀌어갔다. 아니, 바닷물이 변한 게 아니라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배 밑에 깔려 있다.
‘요, 용?!’
흑빛의 용이 수면위를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용의 발톱정도로 작았고, 거대한 몸집을 올려다보기 위해 목을 있는 힘껏 꺾어야 했다. 붉은 눈의 용은 나를 내려다 보더니 이내 돌진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본능 적으로 양 팔을 교차시켜 머리를 가렸으나 약간 주위가 어두워졌을 뿐 별다른 타격은 느껴지지 않는다. 슬쩍 눈을 떠 살펴보니 내 머리 위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는 용은 입에 거대한 복숭아를 물고 있었다.
‘...이거 나 주려고? 아, 안 돼 배 뒤집혀. 잠깐 아니야.’
말릴 틈도 없이 퉤- 복숭아를 내뱉은 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금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타고있는 쪽배의 다섯 배 정도 되어보이는 복숭아는 내 양 팔위에 가볍게 들린 상태였다. 천하장사 만만세.
‘머슨, 이게 뭐하는…’
그가 다시 ‘탓’ 하고 손을 튀긴다.
내가 잡고 있던 복숭아가 휴대폰 진동 오듯 떨리기 시작했다. 차마 놓을 수 없어 그것을 받쳐 든 채 당황하고 있는데 ‘쩍- 쩍-’ 갈라지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린다. 그리고...
‘어흥!’
‘맙소사.’
복숭아를 가르고 호랑이가 튀어 나왔다. 이 세계에서 호랑이라니... 마치 김치에 치즈 얹어 먹는 느낌이다.
풀쩍 뛰어나온 호랑이는 배가 고팠는지 복숭아를 허겁지겁 헤치우고 내 주위, 정확하게 얘기하면 바다 위를 방방 뛰어 다녔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내 몸을 한번 쭈욱 핥아 올리고는 용이 그랬던 것처럼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탓’
‘또 있어?!’
바다가 금빛으로 바뀌었다. 보물을 가득 담은 해적선이라도 떠오르려나 싶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다는 잠잠하기만 하다.
-툭 투둑
내 옆으로 금화가 비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밑에가 아니라 위야?!’
자각하고 하늘을 바라본 수간 무수히 많은 금은보화 들이 와르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무게는 못 버텨 배가 뒤집어져! 뒤집어 진다고!
발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쌓인 금은보화의 무게를 쪽배가 견딜 수 있을리없다. 하지만 난 배가 뒤집히는 것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깔려 죽겠다!’
목 바로 아래까지 차올라 손을 허우적댔다. 짤랑- 동전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거세지기만 할 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죽겠다! 무수히 많은 금화를 보며 나는 행복해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악-!”
“꺄앗!”
“허억- 헉...”
벌떡 몸을 일으키자 심장이 아주 빠르게 달음질 하고 있었다. 어둑 칙칙한 감옥 안, 쾌쾌한 냄새. 꿈에서 깨어 났다.
손등으로 이마를 훑으니 굳은 피딱지가 떨어져 내리면서 식은땀이 같이 묻어 나온다.
“이게 무슨 개꿈이야.”
말 하고 헙! 하며 양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친,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주 조심스럽고, 초조하게 시선을 배 쪽으로 내렸다. 귀여운 똥배가 나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 안에 든 것이 아주 소중한, 예상 밖의 선물이라면? 오, 맙소사. 하필 이런 상황에서…
“괜찮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나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은 체닌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죽을 맛.”
“괜찮아 보이네.”
왜 그런 결론이 나는 건데?
체닌은 다시금 엉거주춤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좀 많이 가깝게 다가온다. 왜 이래?
“이제 막 정신차린 너한테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불안 하네”
“발소리가 들려.”
“쉿.”
이 한 마디에 몽롱했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소리에 집중하려 했으나 아직 진정되지 못한 심장소리 때문에 주위가 시끄럽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써 들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발 소리는 아주 가깝고 크게 들려왔다. 체닌을 바라보자 그녀가 어깨를 들썩인다.
“바로 널 깨우려고 했었어.”
“...”
“몸을 흔들어 보기도 전에 니가 일어난거지.”
“누가 뭐래?”
“그냥 뭐... 나도 가만히 눈 뜨고만 있진 않았다는 거야.”
우물쭈물 말하는 체닌의 모습에 아직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다. 쟤가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하지만 감상은 잠시, 다가오는 정체모를 발소리로부터 몸을 지킬 대비를 해야 했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당당히 들어오는 것을 보아 우리를 도와줄 인물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살펴보았지만 헛수고 였다. 텅텅 빈 이 밀실은 먼지 말고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녀린 여자의 팔 다리는 부러지지만 않으면 다행이었고, 상처투성이인 내 몸은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발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암흑속에 붉은 빛이 빛춰온다.
두려움에 몸을 떨던 체닌이 가만히 앉아 있기게 불안한 듯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긴 치맛자락이 움직이며 그녀의 다리가 드러났다.
“체닌 너 그거 벗어”
“이 곳에서 미인계는 독이야!‘
“뭐라는거야”
난 체닌의 발목을 붙잡고 굽이 높은 힐을 벗겨냈다. 이런 좋은 무기가 있었으면서 치마폭에 숨겨두고 있었다니!
“이건 왜?!”
“여차하면 이 굽으로 정수리를 찍든, 눈을 찔러 버려. 자 하나 잡고 등 뒤로 숨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