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편
<-- 15.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 -->
황제의 얼굴이 실망으로 얼룩졌다. 말없이 나를 담고 있는 눈동자는 깊은 어둠으로 끌려가 색을 잃었다.
“...저 자가 흑마법사라는 걸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죠?”
눈은 나를 향했지만, 질문은 성녀에게 하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말씀드리죠. 테론 아비츠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다가 마법으로 살해된 흔적과 함께 체닌양의 구두 자국을 발견했어요. 우연의 일치인지 체닌양이 돌연 아비츠 백작가를 떠났고, 그녀의 행적을 쫓던 중에 알게 되었죠. 테론 아비츠의 죽음. 그 배후엔 테론 아비츠를 살해하는데 본질적으로 힘을 가한 흑마법사 에리나 홀든 양이 있었다는 걸요.”
짜여 진 대본을 읽는 것처럼, 성녀가 구구절절 나와 체닌의 있지도 않은 죄목에 대해 읊어대었다. 대꾸 없이 나를 바라보던 황제는 무슨 말이라도 내뱉을 것처럼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이로 말할 수 없이 착잡해 보이는 그의 심경이었고, 종이에 옮겨 적을 수 있는 어떠한 단어도 그의 입에서 나오진 않았다.
성녀는 자작하게 타오르는 황제의 불씨에 입 바람을 불어 넣었다.
“방금도 보셨잖아요. 마력을 제어하는 마석을 설치해 두지 않았다면, 누군가의 피로 만들어진 흑마법으로 순식간에 탈옥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단순히 아비츠 백작가로 납치당해 온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 끌려온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쓴 채로 말이지.
“세르데벨라 당신.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궁지에 몰리니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군요, 에리나양. 나에게 하는 그런 언사는 신선하네요.”
“더 신선하게 해 줘? 흑마법은 얼어 죽을. 여기서 날 꺼내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황제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저 간사한 성녀, 세르데벨라의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세르데벨라가 내가 읽은 책 속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진즉에 깨달았었다. 성녀라는 거짓된 허울에 가려진 비열함은 점점 장대해져가 순백의 이미지를 덮을 만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는 위험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내 발목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인간이하. 그런 자를 존중해 줄 필요는 없다.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세르데벨라가 눈치 채지 못할리 없었다.
“후회한다라. 어떤 방법일지 기대되네요. 마석으로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감옥에서 마법을 부리는 게 가당키나 할까요? 당신에게 걸려 있는 모든 마법이 제어된다는 사실도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 아무리 마왕이 걸어놓은 마법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죠.”
성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술이 씰룩거렸다.
“희대의 악녀가 따로 없네.”
솔직한 심정이었다. 문득 든 생각이 뇌 속 필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왔다. 내 말에 성녀가 움찔 하며 표정을 구겼다.
“무슨 소리죠?”
“자비로운 성녀 다 뒤졌나. 누명쓰고 감옥에 끌려 들어온 선량한 시민의 입장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거 아냐? 구석에 몰아세우고, 공포감 조성하는 말이나 찍찍해대고, 심지어 그게 재밌어서 웃기까지. 이건 성녀가 아니라 희대의 악녀지.”
“아무리 덕망 높으신 폐하라도, 흑마법사에 관해서는 엄벌을 가하시죠! 전 폐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당신은 제 눈 앞에서 흑마법을 사용 했어요!
“흑마법일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내가 숨은 마법고수라면 어쩔 건데. 확실한 증거도 없이 사람을 막 감옥에 집어넣고 잘 하는 짓입니다. ”
“동행인과 텔레포트를 할 정도로 마법을 부리려면, 제 아무리 마법에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연습없이는 단번에 시전될 수 없어. 한 번이라도 연습을 했다면 그 흔적을 다른 마법사들이 찾지 못 할리 없고! 하지만 흔적조차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런 고위 마법을 쓴다면 그게 바로 흑마법이지 뭐예요!”
열변을 토하는 성녀의 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 웃음에 그녀가 씩씩거리던 호흡을 딱 멈추고, 허망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착한아이 콤플렉스라도 있으신가. 왜 발끈하고 그래요?”
“...”
“마법이란게 그런거 였군요. 전 잘 몰라서. 그런데 화내는거 되게 무섭네요. 성.녀.님.”
나는 보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성녀의 주먹이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만.”
황제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너도 많이 놀랐지? 비록 착각이긴 하지만 사랑이라 믿고 있던 여자가 돌변하는 모습은 꽤 충격이었을 거야.
“체닌 아비츠.”
벙쪄있던 체닌은 뜬금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경기를 일으키듯 과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놀란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성녀의 태도에 온 신경이 쏟아져 있을줄 알았건만 체닌이라니? 게다가 그리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예, 예 폐하.”
“테론 아비츠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나.”
다시 말해. 니가 죽인게 맞아? 라는 뜻이다. 성녀의 일 따윈 내팽겨 쳐버리고, 진짜 알맹이인 테론 아비츠의 죽음으로 화제가 전환됐다.
“...”
“그의 자택에서 그대의 구두자국이 발견되었다.”
체닌이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자 괜히 불안해져 갔다. 야, 진짜 니가 죽인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 해.
“아, 아니.. 아니...”
황제의 고압적인 분위기에 눌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 무식할 정도로 무대뽀인 체닌이 드물게 몸을 떨었다.
“바른대로 말 하라.”
“폐하. 아닙니다. 부인께선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지금은 너무 긴장되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안정을 취할 시간이 필요해요. 부탁드려요.”
결국은 내가 나섰다. 감옥 안에서, 중죄로 끌려온 죄수들의 요구는 오히려 매질을 당할법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폐하”
탓하듯 성녀가 불렀지만 황제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쇠창살 너머로 내 눈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오지.”
싱거운 한 마디를 남기고 황제는 멀어져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가자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쌩 하니 몸을 돌린 황제 때문에 성녀는 잠시 방황 하다가 이내 옷자락을 붙들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황제와 보폭을 맞추어 떠나갔다.
“하아-”
“답지 않게 왜 이래.”
체닌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한테 말 하지 않은 게 있어.”
*
“진정해! 이러다 다 죽겠어!”
콰아앙-
폭발음도 없이 건물 한 채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기겁하는 것 마저 지친 에반은 지금 무너져 내린 건물이 평생을 일해도 문 한짝 사지 못할 만큼의 고가라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무려 다섯 번째 건물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중에는 수를 세는 것 마저 포기하게 될 까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머슨!”
바락 소리를 질러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눈이 회까닥 돌아버린 머슨은 에반의 말이 들릴리 없었다.
에반은 울고 싶었다. 에리나의 존재가 이토록 그리워 진적도 처음이었고, 머슨이 이토록 소름끼치게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니 도저히 자신 따위가 감당을 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라고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