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편
<-- 15.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 -->
“내 동생도 꼭 그래줬으면 좋겠어요. 만날 말도 안 듣고”
아이는 이 말 외에도 식사시간에 있었던 반찬 투정부터, 누가 엄마 옆에서 자나 로 싸운 일까지 모조리 얘기해줬다. 긴 사담을 나누기엔 내 마음이 조급하여 아이의 말에 집중 할 수는 없었으나, 대충 “화가 났겠구나!” 내지는 “응, 그래서?” 등의 리액션으로 적당히 맞받아 쳐주었다. 그러나 뒷담에 심취한 아이의 말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말꼬리를 잘라버렸다.
“한 번은 엄마가 양치를 하라고…”
“미안한데! 그 얘기는 나중에 들어도 될까? 빨리 동생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 어머니도 걱정하시고”
말이 끊긴 아이는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도 내 입장을 이해하고 있던 덕에 더 이상의 잡담은 이어지지 않았다. 가까이 와 달라 손짓 하여 귀를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고사리 같은 손을 둥글게 말아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속닥거렸다.
“저쪽 여관 앞에 예쁜 드레스를 입은 언니가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있었는데요”
아저씨들?
“옷이 너무 예뻐서 계속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언니가 갑자기 잠이 오는지 아저씨들 한테 기대서 자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저씨들이 언니를 업고 마차에 태웠어요.”
“...”
“이 장갑도 그 언니가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었어요. 너무 졸려서 흘리고 갔나 봐요.”
불안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굳어져 가는 표정을 이완시키려 부단한 노력을 해야했다.
“...어디로, 어디로 갔는지 기억해?”
“이 길을 따라 쭈욱 달려 갔어요.”
아비츠 백작가로 빠지는 길목이었다. 마차의 바로 뒤를 쫓는다 해도 놓칠게 분명한 마당에 이미 수 분전에 떠나 모습도 보이지 않는 마차를 따라가는 건 무리였다. 일단 머슨에게 상황을 말하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백작가 안으로 들어가 체닌을 데리고 나오는 수 밖에.
“알려줘서 고마워.”
짧은 인사를 하고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머슨이 있는 여관으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다시 허리를 굽혀야 했다. 빙글- 술에 취한 것처럼 시야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땅이 솟고 건물이 찰흙처럼 뭉개지며 다리가 비틀거린다.
강한 어지러움에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내 허벅지를 어깨로 치고 달려간 아이로 인해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바닥에 양 손을 짚고 시선이 땅에박혔다.
“....님!”
가빠진 호흡 사이로 명랑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고개를 올려 정면을 바라보니 볼을 붉히며 말갛게 웃고 있는 아이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이 일그러진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칠흑 같이 검은 소맷자락과 대비되는 하얀 손이었다.
함정이다.
본능이 그리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확실하게 얘기해 주고 있었다.
“잘했어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좀 더 올리면 목소리의 주인이 보일 것 같은데 이마저도 너무 힘이 든다. 땅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목에게 한껏 욕을 하며 온 몸이 부들 거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조금, 조금만 더…
“흐윽!”
묵직한 고통이 어깨위로 날아들었다. 맥없이 몸이 뒤집혀 뒤통수를 바닥에 찧고 울렁거리는 하늘을 올려다 봐야 했다.
“....로 옮겨...”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두터운 손들 몇 개가 내 몸을 배려없는 손길로 잡아 세우고,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짙은 미소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아래로 흩뿌려진 머리칼. 정오의 태양을 닮았다 생각 했던 그 화려한 금발이 보인다.
성녀.
검게 드리운 후드 속에 눈이 감춰져 있어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성녀가 확실했다. 정신을 또렷이 하려 해도 몸에 힘이 빠지고 어둠이 잠식해 왔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웃고 있는 성녀의 붉은 입술 이었다.
*
대학 1학년.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부모님 집에서 떠나 혼자 자취를 한다는 생각에 마구 들떠있었다. 기숙사에 들어가길 원하는 부모님의 의견을 한사코 거절 하고 대학 근처 가까운 자취방을 잡았다. 이 날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간간히 모아 두었던 저금통을 깨고, 수능 후 해방감을 즐길 세 도 없이 곧 바로 알바를 구해 3개월간 미친 듯이 일만했다.
비록 원래 살던 집에 비해 많이 후미지고 좁은 방 한 칸이었긴 했지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내가 즐겨 먹는 음식들로 냉장고를 채워 넣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포스터와 애장하는 소설책 들을 놓을 생각으로 설레는 자취 라이프를 꿈꿨다. 그러나 낭만도 잠시. 매일 아침밥을 해 먹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일주일도 되지 않아 깨달았고, 여름엔 벌레 걱정 겨울엔 수도가 얼까봐 노심초사했다. 학생이 감당하기 버거운 공과금도 낭만을 깨트리는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대학 근처에 방을 잡은 탓에 어느덧 내 자취방은 동기들의 쉼터가 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참기 어려운건 몸이 으슬 거리는 미친 듯한 외풍이었다. 가스비 걱정에 보일러도 실컷 못 트는데, 큰 마음 먹고 튼다 하더라도 집은 냉동 창고처럼 추웠다. 온 종일 집에만 있어도 감기가 걸렸고, 잘 때도 패딩을 껴입고 자야 할 정도였다.
1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곧 바로 짐을 싸들고 새로운 자취방을 구했고, 어느 정도 정보가 쌓인 터라 멋모르고 구했던 그 첫 번째 방보다 훨씬 좋은 (그때 당시는 유토피아라고 찬양 했다.) 방에서 생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외풍과는 영원히 안녕이다. 다시는 보지 말자 이 지긋지긋한 외풍아!
-라고 생각했는데, 스무 살 때 이후로 겪어 보지 못했던 외풍이 지금 느껴졌다. 한기가 들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그것이.
“으- 이사 갈래. 이사...”
몸을 둥글게 말아도 찬 기운은 여전했다. 이불이라도 끌어당기고 싶은데 손과 발 근처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야, 정신 차려.”
누군가 몸을 마구 흔든 탓에 완전히 잠이 달아나지 않았음에도 눈을 떴다. 저 멀리서 횃불이 흔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
확실한 건 자취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곳은 건조 하면 건조했지 지금 여기처럼 바닥이 습해 엉덩이가 다 젖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두꺼운 쇠창살도 없었고 말이지.
“감옥에서 코 골고 자는 사람은 처음 보네.”
감옥.
감옥?!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감옥이라뇨? 한 평생 죄 지을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요! 도덕 교과서의 표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손목에 쇠고랑 찰 일을 한 기억은 아무리 뒤져도 없는데요! 이보세요! 뭐가 잘 못 돼도 한 참은 잘 못 된 것 같습니다!
황급히 달려다가 쇠창살을 쥐고 앞을 살펴 보았다. 깊고 어두운 터널 같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감옥을 지키고 있는 간수 한 명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줄곧 말을 걸어 오는 인물의 정체는 체닌이었다. 두 무릎을 껴안고 한쪽 벽에 붙어서는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센 체닌 답게 목소리 만큼은 도도함이 죽지 않았다.
“언제부터 깨어나 있었어?”
“얼마 안 됐어. 네 잠꼬대 때문에 깨어났거든”
...그 말은 덕분에 라고도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치고 너 까지 끌려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널 찾으러 가다가 갑자기... 아니 됐고, 우선 왜 여기로 오게 됐는지나 설명해 줘. 신발을 사러 나갔다면서?"
“아비츠 백작 짓이 분명해.”
체닌이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얘기였지만 유독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여관근처에서 나를 납치할 기회를 계속 보고있었던 거야.”
========== 작품 후기 ==========
에리나 : (꿈속. 자취방에 조별과제를 하러 온 대학 동기들을 향해) 으헉... 다 꺼져. 당장 내 눈앞에 ㅈ같은 보노보노 피피티를 어서 치워... 으억
체닌 : 악몽이라도 꾸나(괴로워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일단 깨우지 않고 지켜본다)
*독자님 : 111화는 외로운데 다음 화는 없나요?
작가 : 작가가 외로움 마스터를 찍어서 잠시 공감하지 못했네요. 흘규.
*독자님 : 작가님의 끊기신공 스킬로 다음화가 궁금해 미칠것같은 금단증상을 유발하고 독자들을 본격 조련하는 챕터로 들어갈 것 같군요...ㄷㄷㄷ
작가 : (쫑긋) (매회 독자님들의 피를 말리고싶다.)(숨겨진ㄱ ㅏ학성이 날뛰기 시작한다.)
독자님 : 정말 그랬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독자님 : 성녀보다 체닌이 더 발암인것 같아요!!
작가 : 린정합니다. 철없고 욕심많은 아이죠.
체닌 : 닥쳐 돈내놔 권력내놔
작가 : ... (절레)
*독자님 : 에반이 말하는 못생겨지는 방법 지금 제가 하는 짓이랑 똑같네욬ㅋㅋ
작가 : 사실 똥밭에만 구르지 않았을 뿐이지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ㅎ 내 피부 미안해!
*독자님 : 작가님 소설이 너무 건전해여 ㅠㅠ 집착 3종세트 보여주세요
작가 : (진지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중) 머슨이 더티토크를 하며 막무가내로 잤잤만 한다면... (쓰면서 재밌겠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