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편
<-- 15.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 -->
*
단 걸 좋아하진 않지만, 모양이 예쁜 설탕과자는 좋았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겉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는 법이 없었고, 책장에 꽂아 두었을 때 방과 어울리는 인테리어가 될 것 같으면 그 아무리 따분한 책이라도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 그것이 가장 먼저였다.
순백의 자기에 붉은 꽃잎이 서서히 물들어 간 찻잔도 마찬가지였다. 뜨거운 차를 즐겨 마시는 성녀가 쓰기엔 자기의 두께가 얇아 그다지 좋은 잔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기에 좋으면 그걸로 된 것이니 성녀는 개의치 않고 찻잔을 애용했다. 하지만 작은 틀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은 것처럼 부담을 느낀 찻잔은 결국 차의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아...”
성녀의 손에 남은 건 우스꽝스러운 하얀 손잡이 뿐이었다. 방금 전 잔 안에 고이 담겨있던 차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하얀 성의를 진하게 적셔갔다. 뜨거움도 모르고 성녀는 차가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치우겠습니다.”
성녀도, 시종도 놀란 기색 없이 차분했다. 한 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 자주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시종중 하나가 익숙하게 성의를 걷어내고 붉게 달아올라 있는 성녀의 허벅지에 찬 수건을 가져다 댔다.
“또 깨져버렸네.”
이쯤 되면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두꺼운 찻잔을 쓸 법도 한데, 성녀는 언제나 처럼 똑같은 모양의 예쁜 찻잔을 고집했다.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
설핏 분노가 서린 성녀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유리조각을 응시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더 많은걸 보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 찻잔을 두껍게 제작하여 같은 모양으로 만들라 이를까요?”
어리석은 시종은 성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멋대로 입을 놀렸다. 바닥을 닦던 다른 시종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말했잖아요. 두꺼워 지면 찻잔이 투박해 보여서 싫다니까.”
성녀가 눈웃음 지으며 얘기했다.
“예, 그럼 같은 걸로 다시 내오겠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유독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성녀로 인해 신전 안은 비상이었다. 힘 없는 자들이 겪은 부당한 일에 분노 하고 슬퍼하는 모습만 보아왔지 이토록 날이 서있는 예민함을 풍기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성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고 있는 와중에 시종이 눈치없는 사소한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녀는 성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오히려 다정하게 웃으며 시종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괜찮아요. 혼자 생각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자리를 좀 비켜줄래요?”
“예, 성녀님.”
평소 시종을 곁에 두는 편은 아니었다. 남을 하대하는 게 익숙하지 못하다거나, 도덕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 또한 성녀 스스로의 이미지 관리였다.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연출 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일각에 퍼뜨리기 위한 관리. 그러나 요즘 같이 생각과 할 일이 많아 질 때는 그것마저도 힘들어 수발을 들게 하였다.
“다른 귀족 마님이었으면 난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겠지?”
“뺨 뿐이야? 당장에 알몸으로 거리에 내쫓겼겠지. 성녀님이라 다행인 줄 알아.”
시종들이 나가면서 속닥거렸다. 듣지 않으려 해도 적막한 공기를 타고 귓가로 흘려들어 온 시종들의 수다에 성녀는 헛웃음을 쳤다. 눈치 없이 떠들어 댄 그 시종은 내일 당장 어느 후미진 향락가로 팔려가 있을 것이다.
‘주인의 생각도 읽지 못하는 멍청한 개는 그저 웃음이나 팔아.’
이 말을 뱉고 싶어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허벅지위에 놓인 물수건을 툭 떨어트리고 젖은 성의를 탈의했다. 린넨 형태의 얇은 속옷이 몸의 굴곡에 따라 떨어지고 육감적인 몸과 하얀 나신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색정적인 공기로 뒤바꿔 버린 성녀는 그마저도 벗어 던졌다. 봉긋 솟은 가슴과 분홍으로 물든 유두, 잘록한 허리 아래로 탐스러운 엉덩이, 하얗고 매끈한 다리까지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 몸이었다.
“성녀님, 아비츠 백작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세요”
늙은 사제의 안내에 따라 아비츠 백작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춤 거리는 발걸음을 보아 달갑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러 오는 것이 분명했다.
“성녀님…”
쿵-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아비츠 백작은 목적도 잃고 한 동안 입을 벌리고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통 유리창 앞에서 전라로 서있는 성녀는 여신 그 자체였다. 성녀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매혹적이게 다가가 아비츠 백작앞에 섰다.
“무슨 일이죠? 이제 막 백작가로 가려던 참이었는데요.”
체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케일, 에리나 홀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들은 왜 백작가의 연회에 참석했으며, 혹 아비츠 백작가와 마왕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진 않은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성녀의 몸을 바라보던 백작이, 이미 빠져버린 정신을 붙잡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당장이라도 저 하얀 다리 안에 자신의 거무튀튀한 성기를 비비고 싶다는 더러운 욕정이 끓었다. 그런 백작의 생각을 읽었음에도 성녀는 더욱더 과감하게 굴었다.
“제가 보고 싶었나요?”
백작의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스윽- 훑어 내리자 그가 몸을 부르르 떠는게 우스웠다. 성녀는 이 반응이 재밌었다. 손짓 하나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딱히 사랑하지 않아도, 몸을 줄 가치 따위 없어도 이런 유흥은 언제나 즐겁다.
“그, 그게 아니라 문제가 좀…”
“문제?”
성녀의 말이 날카롭게 되돌아왔다. 이제 그 문제라는 말만 들으면 반사적으로 신경질이 났다. 이번엔 또 뭐가 잘 못 된 것인가. 하릴없이 백작가에서 노닥거리는 시골계집 하나 보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일 이라고.
백작을 난처하게 만들려던 것도 잊고 성녀는 재빨리 가운을 걸쳐 입었다. 아쉬움에 백작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 이걸 좀 보십시오.”
정갈하게 접힌 하얀 쪽지였다. 윗 모서리 부분이 잔뜩 구겨져 있는 것을 보아 백작도 이것을 읽고 꽤나 분노했음을 알 수 있었다. 성녀는 단숨에 내용을 읽어 나갔다.
“백작님, 당신의 꼭두각시 부인 노릇은 이제 지쳤어요. 차라리 감자 캐기가 배는 즐거울 정도라구요. 그건 왕감자를 캤을 때 희열감이라도 있지, 지금 생활은 무미건조! 말린 오징어와 같은 삶이라구요! 전 이제 세자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갈라서요. 다시는 찾지 말고 연락도 마세요. 체닌 프로헨”
빠직-
종이가 구겨졌다. 체닌은 아비츠의 성 대신 본래 부모의 성인 ‘프로헨’을 적었다. 이는 완전히 마음이 돌아섰음을 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성녀님이 오시기 전에 단장을 시키려고 하녀들을 내려 보냈는데, 이 쪽지가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나갔는지는?”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백작 부인이 출타하는데 어떻게 한 명도 본 사람이 없어요?!”
성녀가 드물게 소리쳤다. 백작이 놀라며 습관적으로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아 내렸다. 체닌에게 무심하게 군것도 맞고, 그토록 기다리던 연회에도 참석 시키지 않은 것도 맞은 지라 그녀가 집을 나갔다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연회에 참석시키지 말라고 명한건 성녀였기에 백작은 이 작은 사실 하나에도 괜히 억울해졌다.
“머,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당장 찾아요. 눈 뜨고 이혼 당해서 세자인 영지 까지 빼앗기면 우리가 들인 돈, 시간 전부 잃게 되는 거야. 치맛자락을 붙잡고 애원하든 발을 핥든 협박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백작가 안에 처박아 두라고요. 아시겠어요?”
백작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는 또 한 차례 꼬여버린 실타래에 열이 뻗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얼마 전 까지도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말만 잘 듣던 계집이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보아하니 백작도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진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니 몰랐던 건 당연한 걸지도.
“...설마”
“왜 그러십니까?”
불현 듯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정말 케일과 무슨 연관이 있어서 그에게로 가버린 거라면? 말 잘 듣던 장난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무언가가 생겼던 건 분명하다. 누가 그런 자극을 줬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도 마땅한 얼굴이 떠오르진 않는다.
“백작님. 사병을 풀어요.”
“예. 당장 세자인 쪽으로 가는 길목 곳곳을 뒤져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관에도.”
“여관이요?”
“왠지. 거기에 있을 것 같거든요. 어마어마한 높으신 분과 함께.”
영문 모를 성녀의 말에 백작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사병을 사용하는 일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인지는 알아야 했다.
“만약, 체닌이 거기에 있다고 쳐도 함부로 사병들이 들이닥쳐서 잡아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우린 가출한 아내를 잡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성녀의 가운이 흐트러져 어깨 아래에 밀려 떨어졌다. 백작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것을 쫓아가느라 성녀가 미소짓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테론 아비츠를 죽인 살인범을 체포하러 가는 거죠.”
========== 작품 후기 ==========
*체닌 : (꿈) 아, 감자 괴물이 쫓아와. 세상에서 제일 싫어. 왕감자는 더싫어.
에리나 : 쩝...
*독자님 : 잘보고 갑니다.
작가 : 감사합니다! 언제나 이 코멘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지시는 독자님. 전설의 용사같은 느낌(어디가?)
*독자님 : 나중에 에리나가 떠나여 할때 감금나오나요? 작가님 잊으신거 아니죠?ㅎㅎ
작가 : (2개나 연속으로 올려주셔서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하죠 기억하고있습니다. 본편과 상관없는 외전으로 나올거예요!
*독자님 : 머슨은 자녀교육에서 절대적으로 후순위, 엘은 절대 참여 ㄴㄴ (왜 성녀가 해달란다고 다 해주냐!!)
작가 : 구구절절 옳은 말씀...! 그러나 케일은 벨라를 아이로써 돌보았다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대했어요 첫 계약(부모를 죽여줘 - 엘의 말을 잘 들어라)도 일종의 계약이었습니다!
*독자님 :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연참이다 눈뜨고 아 행복하다 ㅎㅎ
작가 : 늦어서 죄송합니다. 토끼같은 독자님을 두고 오지 못했었다니. 흐극흘규
독자님 : (토끼인데 꽤나 근육질) 이젠 늦지마요 작.가.님.
*독자님 : 차기작이라니 몸둘바를 덜덜 제 나기예여 작가님도 즐거운 낙으로 연재해주시길
작가 : 엄청난 낙입니다!! 코멘 보면서 스트레스 해소 스프라잍샤워 뽷!
*독자님 : 노트북 마련을 축하하고 기념일로 지정하라 쭉쭉 달릴지어다 카페에서도 집에서도 고향에서도 걸어가면서도 앉아쉬면서도 노트북을 켜고 집필을 멈추지 말지어다
작가 : (엄청 빵터지다) 노트북이란 건 사람을 쉽게 노예로 만들 수 있는 무서운 현대문물이었군요.(응?)
*독자님: 새벽2시에 이용권 끝나서 빨리 업뎃되길 ㅠㅠ
작가 : 헐!!!(진짜 소리지르다) 아 ㅠㅠ 조금만 일찍 올걸요 ㅠㅠ세상에 죄송합니다ㅠㅠㅠ으앙.....
*독자님 : 노블 한달 끝나서 참았다 몰아서 보려 했지만 연참으로 씬이 나왔단 소리에 못참고 바로 질러버렸습니다.
작가 : (앗, 이번씬은 되게 짧았는데 좀더 길게 쓸걸... 독자님이 와주셨는데 쩝)씬이 나왔다는 말을 독자님께 전해주신 독자님 감사하옵니다. (넙죽)
*선작, 추천, 코멘트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