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편
<-- 15.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 -->
“아들 녀석을 죽인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합니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고자 아비츠 백작이 툭 던진 말이었다. 사실 지금 상황에 범인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성녀의 반응이 궁금할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역시나. 성녀는 또 다른 말을 해온다. 백작의 의심에 친절히도 불을 붙여 준다.
“...중요한 것이 뭡니까?”
“테론 아비츠의 사생활에 대해 좀 더 알아 봐야 겠어요. 그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있었나요?”
“그다지 부자간의 정의 깊지 못해서 사사로운 것 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저택 내에서 제 첩과 밤놀이를 즐겼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요.”
“첩이라 하면... 체닌이 맞나요?”
“그 애 말고 더 있겠습니까.”
백작은 달갑지 않은 가정사를 밝히는 이야기 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복수나, 슬픔, 분노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기로 성녀를 추궁하기 위해서.
“그런데 성녀님. 아들 녀석이 발견된 저택에 구두 자국이 남았다고 합니다.”
“범인의 것인 가요?”
“그건 모르겠지만,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었습니다. 며칠 되지 않은 것이라 아들 녀석이 죽은 날과 따져보면 범인이라 하기엔 어렵겠지만, 누군가 왔다간 것은 분명합니다. 범인을 잡는데 큰 단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녀는 그 가정에는 고개를 저었다. 한 달 전 마족이 혹은 마왕이 벌인 짓을 한참이나 지난 후 누군가 보고 갔다 해서 범인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테론 아비츠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를 찾아갔다가 그의 시체를 보고 겁먹어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지금으로선 그 구두의 주인이 체닌인 것이 유력하고.
어찌 됐든 모든 작대기가 체닌을 향하고 있었다. 성녀는 세자인의 땅 덩어리를 얻는 도구 라고만 생각했던 그녀를 다른 의미에서 만나고자 마음 먹었다.
“구두에 관한 건 나중에 이야기 하도록 하죠. 일단, 체닌을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러시죠.”
백작은 순순히 대답했지만, 또 자신의 말을 회피하는 듯한 성녀의 태도에 그의 마음 속에선 억센 욕지거리가 맴돌고 있었다.
‘...날, 배신 할 거야. 저년은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칠게 틀림없어.’
*
공통의 관심사가 없는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주제로 이야기 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었다. 각자 할 말이, 해야 할 것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다 늦은 밤이 돼서야 겨우 마주보고 앉을 수 있었다. 해가 저물지 않았을 때, 체닌은 가지고 나온 드레스가 없다며 투덜거리다가 결국 여관 밖으로 뛰어 나갔고 경호 차원에서 나와 머슨이 따라 붙었다. 에반은 마음이 팍 생해버린 주방장과 구구절절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를 들면 ‘맛있어요, 진짜로요. 대륙 제일의 주방장!’ 같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 말이다.
시장 한복판에서 파는 옷들이 체닌의 마음에 들리 없었으므로 그녀의 쇼핑은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혹시나 아비츠 백작가의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다닐까 싶어 오매불망 긴장하고 있었는데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체닌도 마냥 속 편하게 만은 돌아다닐 수 없었는지, 쇼핑에 대한 흥미가 꺾이자 곧장 여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 왔을 즈음엔 주방장도 마음이 풀려 에반에게 특제 요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방방 들떠있는 상태였다. 체닌은 피곤하다며 에반의 방으로 올라가 단잠을 청했고, 에반과 체닌이 모든 것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달빛의 도움 없이는 거리를 다닐 수 없을 때였다.
겨우 한데 모여,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논의 했다.
“게르니아가 사망한 것을 기점으로 에반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게 됐어.”
“너랑, 머슨도 마찬가지 아냐? 어쨌든 연회 당일 날 우리가 그 방에 있었다는 걸 본 사람이 없어 졌다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니었다. 백작의 배후가 성녀라면 그 뒤에는 천신이 있다. 반란에 이용할 군대를 은밀히 세자인에서 양성하기 위해 모든 계획을 다 그려 놨는데, 갑자기 땅의 지분을 넘겨주었던 체닌이 사라져버린다면 성녀는 천신을 이용해서라도, 체닌을 다시 데려갈 가능성이 있다. 체닌을 보호해야 할 입장에 선 우리들은 성녀와의 맞대면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백작이 순순히 이혼을 받아드리지 않을 수도 있어. 세자인으로 바로 이동한다 해도 이미 마을 안에 주둔해 있는 군대를 상대해야 할지 몰라. 에반 너는 우리랑 엮여서 괜한 해를 입기 전에 이 곳을 떠나는게 좋아.”
“머슨이 아무리 마법에 소질이 있다 해도, 흑마법사 군대와 어떻게 혼자 싸우냐? 자살 하는거랑 뭐가 다르냐고”
내 생각엔 머슨이랑 싸우려고 마음먹는 그 흑마법사 군대가 자살 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만.
에반이 내 손을 덥썩 부여잡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진지하게 이야기 했다.
“흑마법사랑 싸우다가 개죽음 당하느니, 차라리 폐하께 알리는 게 살 확률이 더 높아.”
“지금 내 손을 잡은 니가 살 확률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나 까지 아찔해질 정도로 강한 살기가 머슨의 몸을 관통했다. 그가 끄힉!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얼른 손을 치워버린다. 매사에 이런 식이면 앞으로 꽤나 귀찮아 질 것 같다.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차원에서 머슨의 발등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뭐, 뭐야 방금? 나 요단강을 본 것 같은데?”
응. 그거 착각 아닐거야.
소름이 끼치는지 에반은 자신의 팔뚝을 손으로 쓸며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니 앞에 있는 애가 그런거니까 굳이 안 봐도 되는데 말이지.
“어쨌든 흑마법사에 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 세자인에는 비밀 용병들이 거주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평균 연령 57.9세의 어르신들 말고, 이것도 니 앞에 있는 얘.
“용병 같은 게 어딨어. 평생 농사만 짓고 살던 노인네들인데. 수도로 올라오기 전 까지 그런 사람들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찬물 끼얹기 달인 체닌이 내 말을 정정해준다.
“당연하지. 비.밀.용.병. 이니까. 모두가 알고 있으면 비밀이 아니잖아.”
논리 없는 개소리다. 체닌도 그것을 아는지 “뭐래” 라며 중얼거린다. 다행이도 나는 머슨과 살아오면서 말 끊기의 고단수가 되었으므로 사뿐히 그녀의 말 위에 더 큰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했다.
“체닌이 적은 이혼 편지는 오늘 머슨이 가져다 놓을 거야. 그리고 아침이 밝으면 세자인으로 떠나자. 흑마법사 군대는 어떻게든 처리 될 거고. 남은 건…”
뽑히지 않은 검은 뿌리. 단순히 이 상황만 넘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성녀와 백작은 물러서지 않고 체닌과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들게 분명했다. 나아가 이 나라 전체를 집어 삼킬 거라는건 불 보듯 뻔하고. 마음 편히 이 세계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꼭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세자인 마을 사람들의 평화 라는 엔딩으로.
‘꼬르르륵-’
진지한 분위기 속에 배곯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크고 우렁차서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아 언급하지 않고 무시했다.
“체닌은 세자인으로 돌아가면 당장에 이혼에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어. 지금 말고, 일단 몸부터 피신한 후야.”
내 말에 에반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백작이 순순히 이혼해 줄 것 같지 않은데.”
“백작이 막대한 위자료를 부를지도 모르지. 그래도 해. 무조건.”
“지불할 돈이 있으실까?”
왕 중의 왕, 마왕 한테 240년 할부로 빌리면 돼.
‘꼬르르륵-’
“미래의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 하겠지.”
“그런 무책임한 말을…”
‘꼬르르륵-’
“에반 넌 가능하면 일찍 떠나. 지금이여도 좋고, 늦어도 내일 아침 까지는.”
‘꼬르르륵 꾸륵 꾸륵-’
“...그래. 그럼 우리 이제 못 보는 거냐?”
에반의 눈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내가 더 도와줄 건 없고?”
마음은 고맙지만 , 더 이상 끼어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난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에 말이 물리던 대화가 끊기고 이별을 앞둔 침울한 적막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꼬르르르륵-’
여김 없이 들리는 소리. 이젠 슬슬 짜증이 난다. 민망할 까봐 넘어가주려 했는데 이거 안되겠네!
“아, 그러니까 식사를 하시라 했잖아요!”
소리 친건 내가 아니라 에반이었다. 깍듯하게 체닌을 대하던 그의 모습은 재가 되어 훌훌 나라가 버렸다.
“어머, 들렸어?”
진심으로 물어보는 게 아니길 바란다. 체닌이 머쓱해 하며 자신의 아랫배를 잡았다. 곧 죽어도 더러운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 선언 했는데 그것이 내심 후회스러운 모양이다. 결국 에반이 체닌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섰다.
“가요, 일단 밥부터 먹어야죠”
“어딜 잡는거야, 이거 안 놔?!”
에이- 그렇게 말 하면서, 너 왜 뿌리치진 않냐? 체닌이 생각 보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입으로는 싫다 소리 치면서 은근 슬쩍 발은 에반을 따라 간다. 못 이기는 척 하고 음식을 먹을 심산이다.
“주방장님 대신 제가 깨끗이 손을 씻어 요리해 줄 테니 빨리 와요.”
“널 어떻게 믿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되잖아요.”
“내가 뭐 한가 한 줄 아나.”
“고향으로 가기 전 날에 아사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가요!”
========== 작품 후기 ==========
*아비츠 백작가 시녀 1: 성녀님 핵 조녜 여신 ㅜ.ㅜ 나를 가져요 엉엉
아비츠 백작가 시녀 2: 그런데 우리 백작님, 신앙이랑은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 성녀님이랑 되게 친하시다.
아비츠 백작가 시녀 1: 원래 미인 앞에선 없던 종교도 생기는 거야.
작가 : 인정하는 각이구요
*독자님 : 하하하 다음 결제날에 만나용〉〈 잘 보고 갑니다!
작가 : 망부석 전설을 아시나요? 조아라에도 독자님을 기다리다 돌이 된 작가가 있다고 합니다. (아련)
독자님 : 돌 치곤 지방이 많다.
*독자님 : 이거 에리나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걸 알면 에리나가 어떻게 반응할까 두근두근
작가 : 아마 머슨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겁니당 에리나가 떠나냐 안떠나냐 그것이 문제로다.
*독자님 : 마지막 갈등은 성녀 따위 말고, 에리나가 원래세계로 돌아가 마왕이 빡쳐서 폭풍 잤잤하는걸로 부탁드립니다 헤헤헿
작가 : (기대에 부흥하려 노력하는 작가)
에리나 : 잠깐 상의좀
작가 : (기대에 엄청 부흥하려 노력하는 작가)
에리나 : 아니 잠깐...
*독자님 : 에리나 본명이 궁금해지는 군요. 에리나.. 에리.. 예리.. 예나?
작가 : 제가 전부터 엄청나게 고민하던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니 에리나 본명이 안나왔쎀ㅋㅋ... 노트에는 적혀져 있는데 등장하질 않았습니다. 에리나... 본명...쓰고싶다....
*독자님 : 질문있어요! 에리나의 성 홀든은 사이퍼즈에 다이무스, 이글, 벨져 삼형제의 성에서 따온 것인가요?!(사이트에서 캐릭터 소개를 읽다가 홀든을 발견하고 벙찐 독자)
작가 : 제가 게임을 엄청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아쉽게도 사이퍼즈는 들어만 보고 해보질 못했네요 ㅜ.ㅜ 고로 사이퍼즈 삼형제도 초면입니다. 홀든 이라는 성은 왜인지 닭인형을 보다가 떠올렸는데, 그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독자님 : ?....(점점 더 미궁으로)
*독자님 : 에반은 어딨나여ㅠㅠ
작가 : 편식하는 체닌 밥먹이기 중입니다.
독자님 : 그게 아니라 어디서 잤냐구영 ㅠ
작가 : 식당 지박령이니 그쯤에서 잤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독자님 : 에반 완전 찬밥 아니냐구여ㅠ
에반 : 찬밥? 라면 국물에 말아먹으면 꿀맛.
*독자님 : 작가님... 왜 제가 이용권을 구매하시면 안오는거예여ㅠ
작가 : (좌절) (죄송) (무릎) 마치 견우와직녀. 조아라판 로미오와줄리엣.
독자님 : 아니 글을 내놓으라고
*독자님 : 왜 안옹시나요? 연참 때문에 부담 느껴 못오시나용 연참은 바라지만 빨리와주세용
작가 : 본업에 치여 잠시 못왔습니다 ㅜ.ㅜ 안 좋은일 투성이여서 해결한다고 잠시 바빴는데, 더 좋은 결과를 만나기 위해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갑작스런 신세한탄)
성녀 : 너도 일꼬임? 나랑 똑같네.
작가 : 너랑 비교하지마 (더 비참)
*독자님 :후아 정주행 끝났다. 첫 노블 결제에 댓 달아본 것도 처음이고.. 암튼 작가님 사랑해요 〉〈 취향저격!
작가 : 며칠 전 부터 제 이마에 뾰루지가 생겼었는데, 이게 사실은 독자님한테 저격당하고 있어서 생긴 레이저포인트 였군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알럽. 뾰루지 이즈 사랑의 증거)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