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편
<-- 15. 죽기 전에 감옥 한 번은 갔다와야 하지 않을까요? -->
떨리는 건 떨리는 거고. 머슨의 이런 노골적인 행동들을 일일이 받아주다 보면 난, 평생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릴 것이다. 3년 동안 나름의 내성이 생긴 덕에, 언제나 처럼 그의 정수리를 힘껏 밀어버렸다.
“옷이나 갈아입어.”
구겨진 와이셔츠 차림의 머슨이 보기 흉하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께 까지 단추가 풀려 그 사이로 감출 수 없이 드러난 근육들과, 짙은 눈썹 아래에 그윽하게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가 더욱 섹시하게 돋보였다. 흐트러진 매무새는 퇴폐미를 넘치도록 발산하고 있었다.
“왜 웃어?”
옷은 갈아입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웃고만 있다. 자리도 어쩜 그렇게 잘 잡았는지 태양빛이 얼굴위로 떨어져 마치 머슨이 서 있는 공간만 다른 세계 같다. 아름다운 상상을 모아 이루어진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그가 신기하게도 내 앞에서 입을 연다.
“꿈만 같아.”
그건 내가 할 소리. 저건, 미친 외모야.
“내 거짓말이 밝혀지고도 에리나랑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말했으나, 난 그에 맞는 적당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여기 또 한명의 거짓말쟁이는 아직 진실에 대해 입도 뻥긋 하지 않았는걸.
잡고 있던 옷장 문을 열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머슨을 향해 던졌다.
“옷 입어.”
개떡같이 던져도 찰떡같이 잡아 내는 머슨 덕에 다행이 옷은 바닥을 구르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받아 들기만 하고 갈아입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입으라면 입겠지만, 아마 어깨선에서부터 옷이 찢어지고 말 걸.”
“미안, 그건 내가 입을 게.”
머슨이 쥐고 있으니 천 조각처럼 보이는 원피스를 뺏어 들었다. 괜히 찔려서 못할 짓 할 뻔 했네.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있었지만, 비교적 짧은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왜 에반의 방으로 향하지 않고 식당으로 곧장 내려갔냐면, 고맙게도(?) 방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음성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안 먹는다니까!”
“사람이 먹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냅니까, 하다못해 빵 한 조각이라도 입에 넣으세요!”
“손도 안 씻고 반죽을 했을 것만 같은 빵을 입에 넣으라고?”
“여관이 허름하긴 하지만, 위생상태는 좋습니다.”
“서민의 기준을 나한테 세우지마.”
정말 무례하게도, 주방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체닌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음식을 깎아내렸다. 우람한 체격인 근육질의 주방장은 들고 있는 하얀 행주를 힘주어 쥐었다. 그 위로 힘줄이 한껏 솟아 섬뜩해 보인다. 저 주먹 한 방이면 옥수수 밭 완전히 갈리겠네.
“뭘 쳐다 봐? 자꾸 보면 얼굴 닳는 거 몰라?!"
따가운 시선을 저도 느꼈는지, 체닌이 주방장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어어, 야, 너 좀 위험한거 아냐?
“본다고 안 닳습니다. 일단 음식을 조금이라도…”
“야, 돼지! 너 가라고. 이 음식 전부 다 줄 테니까 가서 먹어”
“저 분이 주방장입니다. 손님을 위해 만든 음식을 다시 도로 가져가라는 말이 얼마나 실례인데요.”
보편적으로 근육이 과포화 된 사람한테는 돼지라고 안하지. 것보다 진짜 일 나기 전에 체닌을 말려야 했다.
“체닌, 잠깐만”
그러나 내가 미처 나서기도 전에 일은 나버렸다.
“거봐요! 주방장 울지 않습니까!”
에반, 그렇게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아도 돼.
테이블이고 뭐고 다 부셔 내릴 것만 같던 주방장이 입술을 파들거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체닌은 그 모습에도 콧방귀만 끼며 고개를 휙 돌려 버린다. 결국 주방장을 달래는 건 에반의 몫이 되었다.
“ 요즘 잠을 못 주무셔서 신경질적이게 돼버려 그렇지 나쁜 분은 아니에요. 제가 주방장님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시잖아요.”
백작에 대해서 진지한 얘기 좀 나눠 보려 했더니 상황이 이 모양이다. 여기서 황제가 어떻고, 흑마법이 어떻고 주절 거렸다간, 단숨에 수갑 찰 지도 모르겠다. 온 세상의 불이 전부 꺼지고 우리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다 해도 지금 만큼 시선이 집중 되지는 않았을 거다.
*
글자가 빼곡히 들어찬 양피지가 여린 손가락 힘에 맥없이 구겨졌다. 분노로 눈가가 파들거리던 성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것을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먼발치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쓰레기로 전락한 서신은 아비츠 백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테론 아비츠가... 죽어?”
아비츠 백작의 장남 테론 아비츠는 허영심 가득하고, 무능력 하며 강간과 살인을 일삼는 범죄자이다. 귀족이라는 간판을 등에 업고 지하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당장에 교수형 당한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자였다. 아버지인 백작과도 유대가 없어 반년에 한 두 번 얼굴을 볼까 말까한 남보다 못한 사이라 죽은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에서 발견 된 것은 오히려 이른 편이었다. 성녀가 테론 아비츠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아마 영영 그를 찾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연회를 망쳐 버린 것도, 백작이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를 쌓게 하려던 성녀의 입장에선 큰 차질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흑마법에 소질이 있던 게르니아가 재기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고, 그녀를 대신 할 테론 아비츠 마저 죽어버렸다.
황제를 끌어내리고 자신의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어줄 아비츠 백작을 최고의 자리에 놓으려던 성녀는 순조롭지 않은 상황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거야”
엉망진창이 될 황제를 누구보다 따스하게 보듬어주고, 모두가 떠나가 버린 자리에 오로지 자신만 남겨 놓으려 했다. 그가 가진 힘을 모조리 빼앗고, 성녀가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도록 끊임없이 세뇌 시켜 자신만의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서.
천신, 엘도 마찬가지였다. 날개를 찢는 다는 건 스스로 생명을 갉아 먹는 것과 같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 까지도 아낌없이 받치다가 더 이상 날개가 없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될 때 좀 더 완벽히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선 엘의 힘은 현재로선 사용가치가 높으니 아껴두는 편이 좋았고 상대적으로 쉬운 황제의 권력부터 무너트리는 게 수순이었다.
모든 것이 성녀의 뜻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는데, 연회를 기점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연회…”
알 수 없는 침입자. 연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
흘러내린 금빛 머리칼을 귀 뒤로 단단히 넘겼다.
“케일”
침입자의 정체를 아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흑마법으로 단련 된 게르니아를 단숨에 날려버리고, 마법으로 겹겹이 결계를 쌓아 놓은 문을 쉽게 풀어버리는 인물은 그 연회에 단 한명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안다고해서 손을 쓸 순 없었다. 감히 누가 마왕에게 맞설 것이며, 아무 증거도 남지 않은 현장에 누군가를 지목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 내에서 수사가 더 이상 진행 되지 않았던 것도 성녀가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괜히 더 파고 들었다간 흑마법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 부러 위험에 뛰어드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왜 그런 걸까? 왜 흑마법으로 만든 경계를 부셔버리고, 흑마법사를 불능으로 만들어 버린 걸까...
흑마법이 금기시 된 것은 인간의 일이지, 마족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지나친 간섭이라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문제다. 하물며 인간 세상에 대해 무심한 걸로 치자면 절대로 뒤처지지 않을 그가 흑마법을 고발 하고자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 말도 안된다.
다른 무언가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 한데, 마왕의 관심을 끌만한 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에리나 홀든.
그녀와 게르니아가 모종의 접촉이 있었고, 마왕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혹은 만나기 위해 그런짓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거슬리는게 도를 지나치잖아. 에리나 홀든.”
성녀는 잔뜩 꼬여버린 이 상황을 풀기 위해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되짚어 가기로 했다. 주름이간 성의를 벗어 던지고 말끔한 것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아비츠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불쑥 쳐들어온 성녀 때문에 놀란 건 아비츠 백작 뿐만이 아니었다. 한가롭던 저택이 떠들썩 해지며 시종들은 서둘러 성녀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되어버렸군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세요. 아, 따뜻한 홍차 한 잔 정도는 부탁드려도 될 까요?”
그녀의 온화한 미소에 시종들의 마음이 녹진하게 풀어졌다. 다만, 아비츠 백작만은 전전긍긍 마음을 편히 놓지 못했다. 자비로운 모습 뒤에는 필요에 따라 사람 몇 백의 목숨 따위 망설임 없이 죽여 버리는 냉정함이 숨어 있는 게 성녀다. 그 모습을 줄기차게 봐 온 백작은, 아침에 보낸 서신이 혹시라도 자신의 안위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어 내내 조마조마 한 상태였다.
둘은 시종들을 물리고 백작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어떻게 죽었죠?”
테론 아비츠에 관한 것이었다. 곧 바로 물어오는 질문에 당황 할 수도 있었으나, 어느 정도 성녀에 대해 파악한 그는 능숙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장기가 손상 된 것도 아닌데, 입 밖으로 피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체내에 남아 있는 피가 없을 정도로 전부 뱉어 내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그러더군요.”
“마도구에 흡수 당한 건가요?”
“증상은 비슷하지만, 천장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흑마법에 사용 하기 위해 피를 뽑아 낸 건 아닌 듯 합니다.”
또 케일 인가?
피를 뽑아 내어 사람을 죽이는 마법은 주로 마족들이 쓰는 마법이었다. 가장 손 쉽게 처리 하면서도, 당한 인간의 입장에선 한 방울 한 방울 피가 빠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살인 마법. 일례로 베넌 대학살 때도 마왕은 그와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테론 아비츠가 죽은 것은 한 달 전. 마왕이 수도에 온 날짜 보다 더 일찍 테론 아비츠는 사망했다. 마왕이 마음만 먹는 다면 사람 한명 죽이는 것쯤이야 시간과 장소 같은 건 발치의 돌멩이 수준도 되지 않으니, 날짜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만약 아비츠 백작가와 마왕이 어떠한 연유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골치 아파 진다. 마왕은 무력으로도 권력으로도 마음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 이니까.
“그러고 보니 왜 백작의 연회에 참석했을까...”
“예?”
마왕이 뭐가 부족해서 일개 백작이 주최하는 연회에 고용인 행새를 하고 있었냐 이말이다. 그때 당시에도 의문이 들었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그 속내를 깊숙이 생각하지는 못했다. 만약 에리나 홀든 때문에 억지로 연회에 참석했다 하더라도 왜 그녀는 백작의 연회장에서 일을 해야 했나.
“백작님”
“네, 말씀하십시오.”
“게르니아가 있던 방 안에 무엇이 있었죠?”
“특별한 것은…. 처음부터 세자인의 체닌을 가두기 위해서 사용된 방이라 중요한 문서나 보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억지로 문을 열어 들어 간 곳에는 ‘체닌’이 있었다. 성녀는 백작에게 재차 질문 했다.
“그녀가 침입자에 대한 것을 봤다고 하던가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게 거짓말이라면. 마법으로 눈을 가렸다 말한 것도 아니고, 순식간이라 보지 못 했다라... 앞뒤가 맞지 않는다. 별 다른 소득이 없을 텅텅 빈 방 안에 억지로 들어간 그가 단순히 게르니아만 창 밖으로 떨어뜨리고 재빠르게 도망쳤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죽이지도 않았고 말이지. 방 안에서 무언가를 찾았다면 체닌이 보지 못했을 이유가 없고, 기절 시켰다면 사병들이 들이 닥쳤을 당시에 그렇게 온전한 정신으로 침대위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세자인의 체닌이라...
뜻밖의 실마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려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백작 또한 다른 생각으로 머리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백작은 지금 상황과는 관련이 먼 이야기를 꺼내는 성녀가 의심스러웠다. 테론 아비츠가 죽었는데, 뜬금없이 연회 때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걸까. 당시에 좀 더 면밀히 수사를 진행 하겠다 했을 때 그것을 막은 것은 성녀였다. 엄청난 손해를 봤으면 서도 침입자를 잡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또 다른 사건이 터지자 이제는 다른 건으로 시선을 돌리려 한다.
사건을 덮고 또 덮으려는 듯이.
========== 작품 후기 ==========
에리나의 동료 목록 : 마왕(머슴), 인간(먹보), 짐덩어리(내 손에 짐같은걸 들게 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야.)
에리나 : 이상하게 짐덩어리만 괄호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