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편
<-- 14. 그녀가 집을 나가나요? -->
문이 닫혔다. 체닌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고향도, 가족도 버린 채 귀족 노릇을 하고 싶어 무작정 결혼 까지 했으나 세자인에 있을 때 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벼랑 끝 까지 내몰렸는데 사람 목숨 하나 끊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망설인다 해도 누군가는 게르니아를 죽일 텐데, 기왕이면 득을 볼 수 있는 자신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작은 호롱불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게르니아의 방에 다다랐다. 숨은 붙어 있었으나 죽은이의 방처럼 내부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목숨을 끊어야 할 입장에 선 지금 체닌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그토록 무시했던 게르니아라 그런가?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목에 양 손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어깨가 기울어지고 게르니아의 목을 쥔 손과 수직이 되어 힘을 가하려는 순간에 ‘크헉!’ 하는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
‘누, 구야...’
게르니아 에게서. 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이 체닌의 바로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게르니아는 자신이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 보다, 목을 눌리고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다.
‘날 죽이라고 백작이 사주했습니까?’
쩍 쩍 갈라진 희미한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맞아. 불쌍한 것.’
‘불쌍한 건 당신이겠지.’
목구멍에 솜덩이가 박혀있는 듯 기괴하게 웃으며 게르니아가 체닌을 동정했다.
‘무슨 소리야.’
‘심장이 뚫릴지도 모르고 백작의 신발이나 핥고 있다니.’
‘바른대로 말해’
평소 같으면 자신을 도발하는 말들 쯤이야 가볍게 무시했겠지만, 에리나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던 체닌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게르니아의 마르고 야윈 손이 체닌의 팔을 툭 쳤다. 체닌이 물러나자 언제 놓아 두었는지 모를 협탁 위의 먼지 쌓인 물을 힘겹게 목으로 넘겼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백작에게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안 게르니아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체닌에게 낱낱이 풀어 놓았다.
체닌은 그때를 회상하며 게르니아에게 들었던 말 전부를 힘겹게 얘기했다.
“지금껏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는 마도구에 담겨 백작가의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어. 그 피들을 수거하는 일을 게르니아가 맡았었고. 말했듯이 세자인은 흑마법사 양성소로 이용되고 있어. 그리고 머지 않아 세자인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재물이 될 거야. 에리나 홀든, 니 말대로 이용 가치가 없어질 나도 마찬가지지.”
말의 맥락으로 보아 대충 예상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단순히 체닌만 데려오면 될 줄 알았더니, 보이지 않는 곳에 줄기가 굵은 넝쿨이 이곳저곳에 메어져 있었다.
“황제가 죽는 다는 건 무슨 말이야?”
“뻔해. 그가 흑마법사를 양성해서 이루려는 목적이 뭐겠어. 군대지. 황제에게 맞설 군대.”
뒤가 구린 놈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반란을 꾸밀 줄이야. 일개 백작이 용케도 그런 야망을 품었다.
“당장 폐하께 알려야 합니다!”
참지 못한 에반이 언성을 높였다. 그래, 아비츠 백작이 움직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황제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게 맞았다. 그러나 체닌은 고개를 저어보인다.
“어째서죠?!”
“게르니아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 백작에게는 너네가 상상하지도 못할 의외의 뒷배가 있거든.”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고?”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황제에게 신임을 얻었잖아. 내가 아는 백작은 절대로 혼자서 그런 일을 해낼 수 없을뿐더러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백작을 찾아와 달콤한 말을 건내면서 모든 걸 지시했다고 해.”
그녀.
연회 때 마주쳤던 얼굴이 하나 떠오른다. 그 자리에 유독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신앙 따위 개나 줬을 법한 백작과 이상하게도 친분이 있는 성녀가.
“그녀는 어느 마을에서 사람이 대량으로 죽어나갈지 전부 꿰뚫고 있었다고 해. 심지어 마왕님이 직접 움직인 베넌 대학살에 관해서도.”
“...!”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곧 바로 고개가 머슨을 향해 돌아갔다.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 알고 있었어? 반응 없이 나만을 담고 있는 머슨이 답답했다. 체닌의 이야기가 끝날 때 까지 머슨에게는 이것저것 캐물을 수가 없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체닌의 말에 의하면 흑마법에 관한 것도 전부 '그녀’가 알려준 것이고, 세자인에 관한 지시도, 반란계획도 모두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라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또 다른의문들이 생겨난다. 그녀가 성녀라면 도대체, 어째서, 왜?
“그녀란 누굽니까?”
“의심가는 인물은 있지만, 게르니아에게서 확답은 듣지 못했어.”
“잘 이야기 해주다가 어째서요”
“죽어버렸거든”
게르니아와 체닌의 이야기는 길어졌고, 그 사이 점점 동이트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의식을 찾자마자 많은 대화를 해 괴로워하는 게르니아에게 끝까지 붙들고 매달려 모든 진실을 듣고자 했으나, 뜻밖의 불청객이 난입해 버렸다.
‘부인, 이른 아침 아니 늦은 아침 까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배, 백작님. 금방 처리하려고…’
겁에 질린 체닌은 본능적으로 게르니아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힘을 주어 누르지는 못했다. 인내가 없는 백작은 우악스러운 손으로 체닌의 몸을 밀쳐냈다. 그리곤 품 안에서 원형의 투명한 수정을 꺼내 게르니아의 눈 앞 가까이에서 그것을 흔들었다.
‘익숙하지?’
‘네 놈한테, 얼마나 헌신했는데…’
‘다리가 잘린 말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거든’
백작의 비대한 몸이 게르니아를 덮치고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게르니아의 신음에 체닌은 귀를 틀어막았다. 힘이 없는 팔다리가 침대 위에서 작게 푸드덕 거리다 전기라도 흐르는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공중에서 흔들렸다. 백작이 몸을 일으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붉은 살덩이가 체닌의 앞에 뚝 하고 떨어졌다. 게르니아의 입술이었다.
턱 밑, 목 옆으로 방대한 양의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하자 백작은 마도구를 들어 올리며 광기에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전부 빨아드려라,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침대 시트에 묻은 핏 방울 하나 까지 공중으로 두둥실 떠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마도구에 담기기 시작했다. 게르니아의 상처 부위에 피가 끊임 없이 흘러나오고 투명 했던 수정구가 붉게 차오를 즈음 게르니아의 살가죽이 말라비틀어진 장미처럼 힘을 잃고 검게 변해갔다. 피가 빨려드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협탁위에 올려 놓은 물건들이 전부 쓰러지고, 집안의 모든 것이 흔들렸다.
‘...’
붉은 마도구를 몇 번이고 쓰다듬은 백작은 잠시 비틀거리다, 떨고 있는 체닌에게 다가갔다.
‘뭘 봤지?’
‘아,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백작이 빼곡한 치아를 보이며 켈켈 웃어보인다.
‘네년 눈 앞에서 게르니아를 죽였는데 보지 못했다니. 내가 병신을 집안에 들여 놨군’
‘...’
‘그렇게 병신처럼 사는 게, 하루라도 네 피를 지키는 방법일거야. 부인.’
백작이 나가고, 아수라장이 된 방안에서 체닌은 홀로 주저앉아있었다. 마도구의 여파로 두껍게 쳐져있던 암막의 커튼이 조금 벌어졌다. 그 사이로 여김 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저물고 있는 체닌의 마음에 해가 얼굴을 비춘다. 생에 가장 끔찍한 여명이었다고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방으로 돌아가 안을 전부 뒤져 연회 때 받았던 쪽지를 미친 듯이 찾았다. 그리고 오늘이 약속한 7일 중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내 밥 한술 뜨지 않은 채 백작이 잠에 빠져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모습을 감춰줄 정다운 밤이 찾아오자 그녀는 그 끔찍한 집을 나왔다.
========== 작품 후기 ==========
두 번째 입니다! 집을 나간건 에리나가 아니라 체닌이었습니다.(다신 그 집에 가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