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편
<-- 14. 그녀가 집을 나가나요? -->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황제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아마 “이것 봐라?” 하는 마음으로 눈썹을 한껏 치켜 올리고 있겠지.
황제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허리를 숙여 인사 하고 정원을 빠져 나왔다. 밤바람도 충분이 맞아 몸이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이제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자는 일만 남았다. 방 안에는 전에 보이지 않았던 편안한 슬립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를 어지럽히고 있었던 다과들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침대 옆 작은 협탁에는 은은하게 향초까지 피워져 있었다.
낮에 기사가 일러주웠던 ‘종’ 옆에 빨간색 리본으로 앙증맞게 묶여있는 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식사나 목욕, 그 외에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종을 울려 주십시오.”
오, 절대 안 울려야지.
내가 황궁내의 관심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알고 황제가 시종들에게 따로 이야기를 해둔 것 같다만, 다들 몰래 몰래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난 전형적인 서민 스타일이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시중을 들어준다 생각하면 벌써부터 어색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다.
향초를 불어 꺼버리고 슬립도 갈아입지 않은 채 먼지 투성인 원피스 차림 그대로 침대 위에 올랐다.
몸은 피곤했으나 잠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마치 일과가 전부 끝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슨이 없어서 그런가.”
우리 머슨, 우리 머슨, 오구오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어떻게 보면 길들여진건 내 쪽인 듯 싶다. 얼굴을 보지 못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머슨의 얼굴이 떠오르는거 보니.
“이렇게 좋아 하면서.”
안다, 나도. 진실이라 굳게 믿었던 3년의 삶이 거짓을 기반하고 있었다는 충격에 도망쳤지만, 마음은 자꾸만 다시 그 3년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했다.
드라마 속 여자, 남자 주인공들이 서로 좋아하면서도 바보처럼 마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 할 때 답답함에 베개를 던지곤 했었는데, 잠깐이나마 그 심정을 알 것도 같다. 무작정 사랑을 이야기하기엔 나는 너무 많은 생각 즉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억을 잃지 않은 머슨이 내가 떠난 후에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날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이제껏 그래왔듯이 그것 마저 거짓이라면?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고민. 이기심.
“으아아아-!”
넓은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있는 그대로 내 마음과 마주하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은 채 머슨을 대하면 되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어려워!!”
두 개의 자아가 생겨난 기분이다. 난 태연하게도 ‘머슨 널 사랑해’ 라고 이야기 했다. 케일은 모르는 사이라 치부하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마왕이라잖아. 마왕! 3년 전의 걔! 환골탈태 한 것도 아니고 마왕이 그렇게 한 순간에 머슨처럼 변할 수 있나? ”
나야 알지 못하는게 당연하지. 머슨이 그렇게 자기얘기를 들어 들라 했건만 난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덜컥 겁을 먹고 머슨의 입장에 대해선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았다. 쉽게 떼어낼 수 있는 인연이었으면 이 상태로 등을 돌려 가버리면 되는 것을, 난 몇 발자국 멀어지기만 할 뿐 등 조차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신발 밑창에 자잘한 모래가 깔린 것만 같이 멀어져 가는 발바닥이 따끔거리고 불편했다.
‘에리나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그러니까 떠나지 마. 부탁이야. 내 마음에 거짓은 없었어. 에리나가 떠나면 난 죽어.‘
머슨의 목소리와 얼굴이 계속해서 아른거린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내가 머슨을 보고싶어 하는 거겠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답답해 미치겠다. 허공에 발차기와 주먹질을 하다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결국 누워있지 못하고 침대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죽이되 든 밥이되 든 일단 만나서 얘기나 해보자.”
어렵사리 결심이 서자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언제부터 인지 문 밖에 대기 하고 있던 시종들이 내 인기척에 깜짝 놀라 미약한 비명까지 질렀다.
“저 이제 집으로 돌아 갈 거예요. 여기서 제 눈치 볼 것 없이 자러 가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주무시다가 날이 밝으면…”
“달빛이 강해서 대낮같던데요 뭘.”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이고 시종들을 지나치려는 찰나 한 시종이 뒤에서 황급히 소리쳤다.
“마차를 준비시키라 하겠습니다.”
“걷고 싶어요. 생각할 게 많아서. 폐하껜 미리 말씀 드렸으니까 걱정마요.”
물론 거짓말이다. 감히 폐하한테 말도 없이 떠난 다뇨?! 라는 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단호하게 이야기 하며 발걸음을 빨리 하자 그들은 더 이상 날 붙잡지 않았다. 황궁 앞에 다다르자 다행이도 날 안내해 주었던 기사가 있어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머슨이고 케일이고 일단 기다려. 얘기 정도는 실컷 들어 줄 테니까.”
어느 때 보다 긴장되어야 할 순간에 웬일인지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리고 여관 까지 가는 길 내내 머슨 때문이 아니라도 반드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뒤늦게 생각났다. 난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걸었다.
“미친.”
발걸음이 멈췄다.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이 7일 째네.”
체닌과의 약속,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와 버린 것이다.
*
식당의 무법자라고 할 만큼 가히 엄청난 식욕을 자랑했던 에반이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사람처럼 몇 숟갈 뜨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난 그만 먹을게.”
머슨이 눈동자만 치켜 올려 에반을 바라보았다. 섬뜩한 붉은 안광이 정확하게 자신을 향하자 에반은 점프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튀어 올랐다.
‘원래 저렇게 험악했나? 무서워 죽겠네. 에리나는 도대체 언제 돌아 오는 거야!’
나름 여관생활에 만족하고 있던 에반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다. 머슨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에반의 몸이 또 다시 움찔거린다. 머슨은 여관 전체에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머슨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을 내뱉은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무서운 놈”
에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머슨을 따라 올라갔다.
“저녁은 다 굶었네.”
황궁에서 보았던 달이 여관 위에도 공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밤의 빛이 가려질 정도로 어두운 기운이 여관전체를 휘감았다.
에리나가 떠난 지금. 머슨의 팔 다리는 차갑고 두꺼운 얼음 속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당장에 에리나를 찾아가 그녀의 귀에 ‘사랑한다‘ 일 천번은 속삭이고 싶었고, 그 작고 보드라운 입술을 미친 듯이 맛본 뒤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품 안 가득 안고 싶었다.
식욕상실, 우울증, 하루에도 몇 번은 롤러코스터 타듯 움직이는 감정. 머슨은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몸에 생소함을 느끼고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머슨을 보며 에반은 혀차는 소리와 함께 ‘상사병’을 앓는 다며 안쓰러워했다.
보다못한 에반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머슨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으나 에반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잘난 네놈이 뭐가 부족해서 에리나가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나 좀 들어보자. 털어 놓으면 좀 시원하거든.”
마왕 케일하르츠, 머슨은 태어나 처음으로 연애상담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에반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한쪽 벽에 찰싹 달라 붙어 머슨과 거리를 두었다.
“에, 에리나가 황제의 손을 잡고 뛰어가?”
머슨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말이지? 라고 묻고 싶었으나, 거짓말이나 장난을 치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매서운 눈초리에 압사당하는 것 보다 믿기 어려워도 한번 꾸욱 참는 것이 나았다.
“일전에 에리나가 시장을 갔다가 늦게 돌아 왔을 때, 황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고, 에리나의 옷에서 마찬가지로 황가의 인장이 찍힌 손수건을 확인했다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에리나가 내가 아닌 크리헬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해.”
머슨은 직감과 더불어 여러 증거들로 인해 에리나와 황제가 일면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엉겁결에 머슨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진 에리나가 향한 방향이 황궁 쪽이었다는 것을 본 결과 그녀가 황제와 같이 있으리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후의 에리나의 행동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뭔데, 폐하의 손을 잡고 말고냐? 아니, 아니지. 그래서 넌 어쨌는데”
“둘을 떼어냈다.”
“그리고?”
“...에리나가 여관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 찾아가기 전 까지 절대 나오지 말라고.”
에반의 머릿속엔 벌써 소설 한편이 완성되었다. 황제와 바람이 나 잘난 남편을 버린 여자. 지고지순한 남편은 집에서 내내 아내를 기다리지만 아내는 끝끝내 돌아오질 않는데…
에반은 머슨의 어깨를 토닥여 주려다가 왠지 평소와 다르게 선뜻 그의 몸을 만지기가 어려워 다시 손을 거두었다.
“기다리다 보면 에리나가 올까?”
“그, 그럼! 에리나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생각 안나?”
“그런데 내가 에리나에게 상처를 줬어.”
“보통 너 정도의 남자라면 웬만한 잘못 정도는 알면서도 모른 척, 봤으면서도 못 본 척 넘어가는데 말이지.”
머슨의 눈망울이 구슬프게 변했다. 에반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울리더니 이내 재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남자도 홀리는 치명적이고 위험한 눈이었다. 새삼 이런 눈을 매일 보고 사는 에리나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부럽기 까지 했다. 에반은 거두었던 손을 다시금 들어올려 힘겹게 머슨의 어깨를 두 번 정도 가볍게 토닥였다.
“걱정마. 내가 아는 에리나 라면 반드시 와.”
에반은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머슨은 듣고 싶어 하던 말이 들리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에반과 머슨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머슨은 담담했지만 에반의 동공은 한 없이 확장되어 소리는 내지 않고 입으로만 이야기했다.
“거봐, 내가 온 다고했지?!”
크흠- 헛기침을 하고는 벌컥 문을 당겨 열었다.
“반나절 가출한 기분이 어때? 소심하게 노크…”
“...”
“아... 그.”
“...”
에반은 문 앞에 서있는 여자가 에리나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은 뒤늦게 알아 차렸다. 그리고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곳으로 오라면서? 비켜”
챙이 넓은 노란모자를 깊게 눌러쓴 체닌이 에반을 밀쳐내고 턱을 한껏 들어 올리며 여관방 안으로 도도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에리나 여관 도착까지 10분전. 이럴 줄 알았으면 마차타고 갈 걸 후회중
*독자님 : 우와아앙 일빠 사랑해요 작가님
작가 : 헛, 너무도 담담하게 사랑한다 말해주셔서 순간 설레짜나여 책임져여
*독자님 : 에리나가 아니더라도 황제의 사랑이 이뤄지는 날이 오는걸까요?
작가 : (고민) (절레)
황제 : 인생이 원래 이렇게 썼나?
작가 : (고민) (끄덕)
*독자님 : 더! 더! 썸타자 기왕 이렇게 된거 머슨이 나라 뒤집을 만큼 팍팍들이대서 썸타!!
작가 : 황제는 이용당하려하고 있군요
*독자님 : 예쁜 하녀들 많았을텐데 황제가 용케도 사랑에빠지지않았네요
작가 : 네, 그들은 단역이니까요.
독자님 : 응?
*독자님 : 아 작가님 독촉하고싶다ㅠㅠ!!
작가 : (독촉 횟수가 1증가했습니다.) (타자속도가 30증가했습니다.)
*독자님 : 황제, 넌 빠졌다. 그렇지만 늦었음
작가 : 이쯤에서 힘있게 등장해주는 클리셰 대사 "내가 널 먼저 만났더라면..."
황제 : 안 해
*독자님 : 황제의 모델은 이광수였나요?
작가 : 이광수님을 비하하는건 아니지만... 아닙니다.(흑흑)
*독자님 : 벌써 99화라니!! 100화를 기대해보며 오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 : (흠칫) (100화라니) 아 음... 100화의 서프라이즈는 체닌이었습니다^.^
독자님 : 1도 바라지 않음
*독자님 : 황제는 자기 감정도 모르고 성녀의 말 만 믿냐?!(답답이)
작가 : 사랑에 서툰 황제는 동정을 사랑이라 착각했죠. 진짜 사랑이 다가오자 또 다시 대혼란
다른 독자님 : 아 그러니까 호구 맞네~!
작가 : 인정하는 바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 감사합니다〉〈
*100화 까지 함께 달려와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슬럼프도 많이오고, 본업에 치여 오래 업데이트 하지 못할 때에도 변하지 않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완결까지 힘있게 쓸 수 있을것 같아요 사랑합니다 독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