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편
<-- 14. 그녀가 집을 나가나요? -->
“나 완전 속은거네. 얼마나 미련했을까”
“아니야.”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혀 버렸다. 그치?”
“미안해.”
“내가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아니 됐어. 넌…”
에리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어져 나오는 그녀의 말은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가 느껴졌다.
“당신은 머슨이 아니라 케일인거죠?”
머슨은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다가가 끌어안지도 못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하염없이 에리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진실은 예고도 없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찾아왔다. 단순히 케잌 한 조각으로는 허기가 달래지지 않아서, 머슨을 기다리기엔 나의 인내가 부족해서 난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여관 1층에 적적한 공기가 돌았다. 마법에라도 홀린 사람들처럼 모두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듯 했다. 곧 이어 이 고요를 꿰뚫는 불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넌 그 계집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있나?”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천신이었다. 계단을 전부 내려와 보니 곤죽이 될 정도로 얼굴을 심하게 얻어맞은 모양새였다. 흉흉한 몰골로 머슨에게 붙잡힌 와중에도 입을 나불거리는 꼴이 몇 대 더 두들겨 주고 싶었다. 처음은 천신에게 있는 힘껏 달려가 옆구리를 걷어 차 줄 생각이었다.
“허튼 수작은 안 통해”
머슨의 말이 끝나자 천신의 눈이 나에게 향한다. 우리의 시선이 맞부딪히자 그가 슬며시 간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것 치곤 손이 놀고 있군. 너의 그 알량한 거짓말의 정체를 알고서도 계집이 네 옆에 있어줄까?”
발걸음이 멈춰진다. 거짓말? 처음과 다르게, 난 어느새 그들의 대화가 서서히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그 허무맹랑한 연기를 믿고 있는 다는 게 놀랍군. 아무리 봐도 훌륭한 마왕님이신데 말이야.”
“...”
“언제부터야? 그 거짓말을 시작한게. 음, 베넌 대학살 이후 종적을 감췄으니 3년인가? 인간에게 3년은 아주 긴 시간인데 말이야. 모든걸 다 알면서도 3년 동안 기억을 잃은 척 계집을 기만한 널. 이해해 줄 것 같냐 이말이지.”
“니가 상관할 게 아니다.”
그리고 난... 정말 벼락을 맞았다. 머슨이 긴장된 모습으로, 세상의 끝을 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마 나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내가 지녔던 불안과 초조, 죄책감은 한낱 조롱거리가 되어버렸고. 머슨에게 있어 떳떳한 사람이고 싶었기에 함부로 내뱉었던 거짓말들이 강한 수치스러움으로 밀려왔다. 순수하다, 아무 것도 모른다 생각했던 이미지가 완전히 뒤틀렸다.
난 지금 까지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거지?
혼란. 그리고 혼란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3년 속에 과연 진실은 몇 퍼센트나 있는 걸까? 내 눈 앞에 있는 남자는 날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대해 왔을까? 머슨에 대해선 전부 알고 있다 자부 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뒤엎어진 지금... 난, 조금 무서워졌다.
“당신은 머슨이 아니라 케일인거죠?”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머슨의 의식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고 지금은 케일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내가 믿었던 3년이 전부 거짓은 아닐 거라고. 그러나 우습게도 ‘케일’은 마치 ‘머슨’처럼 머슨과 같은 표정을 하고선 나에게 얘기하고 있다.
‘나야, 머슨.’
주변에 흩뿌려진 많은 양의 케이크와 빵들. 내가 아무리 잘 먹어도 저 양은 너무했다. 삼 일 밤 낮으로 저것들만 먹어도 다 못 먹을 정도니까. 이렇듯 내가 원하면 조금은 무식한 방법으로 라도 뭐든지 해주었던 그 또한 케일이 연기한 머슨 일까? 머리고 마음이고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 설명 할게. 에리나 떠나지만 마.”
“...”
난 주변에 짚이는 데로 나무 의자를 하나 들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머슨이 다가오는 날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감으며 의연한 모습으로 선다. 그리고 머리 높이 의자를 들어 힘껏 내리쳤다.
빠악- 소리가 심할 정도로 나고, 생각보다 큰 소리에 움찔했으나 멈추지 않고 두 번 더 내리쳤다.
급기야 의자 다리가 맥없이 부러져 바닥을 굴렀다.
“으윽! 다짜고짜 뭐냐? 속는 것 같아서 도와줬더니.”
내 의자강타를 직격으로 맞은 엘은 입에서 피를 뱉으며 따져 묻기 시작했다.
“도와 달라고 한 적 없고. 이제 그 상판때기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평범하고 소시민적으로 자란 인간이 아니라 마.왕. 이라도 됐었다면 당장에 네 몸을 갈기갈기 찢은 다음 바늘로 꿰서 다시 붙이고 또 찢고 마지막엔 육전으로 붙여서 산짐승한테 던져 줬을 거야.”
“반려답네.”
“닥치고, 이만 가시라고. 덕분에 아주 엿 같으니까.”
난 마법으로 여관의 입구 문까지 친히 열어주었다. 천신이 비틀 거리며 몇 발자국 떼더니 갑자기 땅에 철푸덕 쓰러져 버린다.
“나도 가고 싶은데, 니 남편이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놔서 말이야. 기력이 없어서 마법도 불가능이고.”
“그럼 여기서 그냥 뒈지시든지.”
둘을 외면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쿵쾅 거리는 다급한 발걸음이 들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머슨이 들어온다.
감정이 너무 벅차올라 히끅- 하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계속 흘렀고, 뻐근한 몸을 이끌고 잠옷을 가리려 외투를 걸쳐 입었다. 머슨과 한 자리에 있기가 불편했다. 생각이 있어서 행동하고 있다기 보다는 이성이 제어하지 못한 감정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난 케일이 아니야. 머슨이야.”
“...”
“에리나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
“그러니까 떠나지 마. 부탁이야. 내 마음에 거짓은 없었어. 에리나가 떠나면 난 죽어.”
머슨의 말에 대답하기 싫었다기 보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3년전 세자인으로 향할 때의 그 배낭을 챙겨 들고 방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머슨이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는다.
“가지마.”
마왕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애절한 눈동자는 금세 물기를 머금었다.
“난... 이제 너에게 키스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를 지나쳐 여관 밖으로 나섰다. 빌어먹게도 화창한 날씨 때문에 거리를 활보 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생각할 곳이 있어야 하는데.
웬 여자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와 길 한복판에서 질질 짜고 있으니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들려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에리나, 미안해. 내가 미안해.”
머슨이 나를 쫓아와 껴안으며 같이 엉엉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난 머슨을 밀쳐냈다. 태양이 눈부셔서 머슨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힘들다.
“모르겠어. 진짜 모르겠다.”
“에리나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도록 몇 번이고 설명할게.”
이토록 쩔쩔매는 모습. 이토록 여린 모습은 아무리 봐도 머슨이었다. 그런데 케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머슨이라니. 구역질 나는 핏덩이들을 뽑아내며 사람들을 죽이고 나 또한 그렇게 만들려 했던 마왕의 모습을 숨긴 채 날 대했었다니. 매치가 되지 않는다.
난 고개를 젓고는 도망치듯 머슨에게서 멀어졌다. 무섭다. 결국 이 책에 들어와서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하나 같이 전부 다 가짜가 된 셈이다. 그렇게 믿고 또 믿었던 머슨 마져도.
*
“성녀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보고는 나중으로 미룰 까요?”
아비츠 백작의 이마에 땀이 송글 맺혔다. 혹여나 성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한 게 아닌가 싶어 긴장한 탓이었다. 성녀가 불러서 왔건만 아비츠 백작이 성녀의 방으로 들어선 그 순간부터 성녀의 관심은 그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세자인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농경지로 사용되었던 땅을 갈아엎고 훈련소를 짓고 있습니다. 변수가 끼어들지 않는 이상 공사 날짜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변수는 이미 생겼잖아요.”
쇼파에 기대어 먼 곳을 응시하던 성녀가 이제야 아비츠 백작을 바라본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성녀의 행동은 느리기만 하다. 예리한 눈빛이 찌를 듯 아비츠백작을 향한다.
“게르니아의 의식은요?”
“아, 그건… 대륙 최고의 의원들을 불러 치료하고 있으니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겁니다.”
“금방? 그렇게 분명하지 않은 말을 아비츠 백작이 쓰다니 실망이네요.”
“그게… 곧…”
땀이 육수처럼 흘러 손수건이 전부 젖을 지경이었다. 성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라 아비츠 백작은 평소 보다 훨씬 더 바짝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테론 아비츠를 부르도록 하세요.”
“아들 녀석이요? 그 놈은 전혀 도움이 안 되실 겁니다. 연회에 코빼기도 안 비춘 놈인데...”
“그럼 누가 게르니아 대신 세자인으로 가죠?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백작가에 몇 이나 된다고 생각해요? 테론 아비츠는 사탕만 잘 쥐어주면 더 달콤한 사탕이 오기 전까지는 충견이 되어 줄 겁니다. 아주 다루기 쉽죠. 이제부터 세자인에 대한 건은 테론 아비츠를 통해 보고 받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파견시킨 후 진행 상황을 낱낱이... 나에게 올리도록 하세요.”
“아들 녀석이 세자인으로 가버리면 남은 게르니아는 어떻게 합니까?”
성녀는 가득 차 있는 아비츠 백작의 찻 잔에 부러 차를 쏟아 부었다. 뜨거운 차가 넘쳐 흐르고 테이블을 적셔 나가다가 결국은 아비츠 백작의 구둣발 까지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넘쳐 버린 차는 마실 수 없게 되죠. 미련 갖지 말고 닦아 버리는 수밖에.”
========== 작품 후기 ==========
아비츠 백작 : (속마음) 오예! 맛때가리도 없는 차 맨날 내와서 곤혹이었는데 다 쏟아 버려라 워후~!!!
*독자님 : 작가님 전개가 빨라서 넘 좋아요〉〈!
작가 : 다, 다, 다행이예용! 넘 갑자기 "암 유아 뽜더" "호에에에?!" 이런 느낌일 까봐 걱정했는데 ㅠㅠㅠ
*독자님 : 릇샘파가 생각나서 아이디가 르릅이라니... 작가님 소싯적에 쿵쿵따좀 하셨군요?
작가 : 영혼까지 받쳤습니다. 하시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원굉' 하면 끝났어요. (추억 회상 크흐흐흐으으~~)
*독자님 : 머슨은 완결 날 때까지 머슨이라고 불리나요? , 케일은 야채 케일에서 따온건가요?
작가 : 이름에 관한 건 본편을 통해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알묜 재미옶짜나욧헿쁍) , 케일은... 하.. 이말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근심 고민) 사실, 눈치 채신 독자님들도 계실것 같은데 '엘' '에리나' '케일' '벨라' 이름 다 비슷하지 않나여?ㅋㅋㅋㅋ 엘 이름을 가장 먼저 정하고 그다음 쭉쭉쭉 생각나는 대로 막 정해서 별 뜻은 없습니다...
주인공들 : 와, 졸라 대충 지었음 지 아이디 정할때 부터 알아봤따 내가
*독자님 : 작가님 필명은 의식의 흐르르르를브르르르릅 이었군용ㅋㅋ
작가 : (빵터지다) 맞습니니다. (딱히 해드릴 말이 떠오르지 않지만 걍 너무 웃겨서 적어 봅니다.)
독자님 : 날 소중하게 대하란 마뤼야ㅡㅡ
*독자님 : 제가 성인이 되고 노블 1일권을 끊어본건 이 작품을 보려고 그랬나 봅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되겠지만 개인지 내신다면 꼭 갖고 싶네용
작가 : 하... 소장본 나오면 독자님건 따로 '아주 건전하고 유익한 필수 상식 100선' 표지를 만들어 드려야 되나 봐요 (A4 용지로 글씨 연습을 해본다. ) (환불요청이 들어온다.)
*독자님 : 입벌리고 널브러진 모습도 안쓰러워 보이는 대단한 콩깍지네요 ㅋㅋㅋ
작가 : 트루럽. 참사랑이죠. 제가 독자님을 사랑하는 것 처럼요. (그윽)
*독자님 : 원고료 쿠폰 다 털었어요!! 노블 결제 한달치 쿠폰 까지 다 넣었어요 자주와주세요
작가 : (아니 지금 내가 뭘 본거지?) (이거 완전 그건데? 작가한테 인생배팅한건데?)
저도 독자님에게 배팅합니다. 우리 끝까지 가봐요
독자님 : 누구신데 악담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독자님 : 저 노블에 댓 처음 달아봐영 으윽 하이라이트에서 끊긴 기분이야 ㅠ
작가 : (어서와, 노블 코멘은 처음이지?)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독자님 닉네임 떠벌떠벌 하고싶다.. 으으으윽!!! 독자님이 코멘달아주셨따아아!!
*독자님 : 작가님 원래 패턴인 밤의 연재 부탁드립니다!
작가 : 미리 말씀드리자면..16일까진 좀 힘들것 같습니다ㅠㅠㅠ 야간권도 있어서 밤에 보시는게 편하실 것 같은데..죄송해여 ㅠㅠ (작가가 글로벌 하여 죄송합니다.)(참고로 아시아쪽 말고 해외 나가본 적 없음)
*독자님 : 케일도 머슨이라긔 구분짓지마ㅠㅠ!!
작가 : 맞습니다. 케일마왕 머슨마왕 따로있나 다같은 마왕인걸 ㅠㅠㅠㅠ!!!
머슨 : (알아봐주시는 독자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독자님 : 개인지 내시면 후기도 포함하시면 어떠세요?!
작가 : 저 진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끝나는 챕터마다 베스트 코멘트~! 이런식으로 해서 몇개 촤라라락~ ㅋㅋㅋ 내볼까... 이런생각여 ㅋㅋㅋ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늘품21님, 하니송이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사담)
후기 쓸 때 독자님들 코멘트가 전부 재밌어서 고르는데 30분 답글 다는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젤 신남) 그런데 갑자기 창에 오류가 떠서 와라라라락 전부 날아가 버린거예요 모니터 붙잡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참고로 코멘트 쓰셨다가 갑자기 삭제하시는 독자님들 제가 다 보고있습니다ㅋ_ㅋ
엄청 재밌는 코멘트 여서 나중에 후기에 써야징~~ 했는데 삭제하신 분들도 몇몇 계셔서 아쉽... 삭제하지 마세여 뿌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