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편
<-- 13.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나요? -->
머슴을 부리는 마님처럼 크게 소리쳤다. 깨어난 머슨을 보면 부둥켜안고 눈물을 질질 짤 줄 알았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나쁜건 아니다. 사실 이 일상 처럼 우리 둘 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확실한 것도 없으니까.
마왕은 케일하르츠 라는 이름보다 ‘머슨’ 이라 불릴 때 유독 심장이 두근댔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난 후에도 아닌 척 연기하고, 시중들어줄 이 하나 없는 그 시골마을에서 오히려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강제로 마왕의 반려가 되어 버린 그 여자를 몇 번이고 소멸 시키려 생각했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지 못했고 나중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왜일까?
‘머슨, 잘했어.’
그래. 자신조차 납득하기 힘든 행동을 이어왔던 이유는 저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였다. 풍성한 분홍 머리칼이 작은 볼 위로 살랑이며 그 어떠한 빛 보다 눈부신 미소로 저렇게 얘기해 줄 때면, 마왕은 이대로 인간처럼 살아가더라도 좋아 웃음 지었다.
그러나 마음이 커질수록 소박했던 바람이 점차 욕심을 끌어들여왔고 이제는 칭찬 한 마디가 아니라 밤 새 ‘사랑 한다‘ 속삭여주길 원했다. 앙증맞은 입술이 자신만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왕은 불안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머슨‘을 위해서라면 무턱대고 위험에 뛰어 들기도 할 만큼 머슨에 대한 애정이 깊지만 한 편으로는 온전히 마음을 내어주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마왕은 에리나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에리나의 마음은 얻을 수 없어 마왕은 목이 탔다.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었던 그이기에 더욱 그랬다. 이대로라면 말라 비틀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쭉 인정하지 않았는데, 널 사랑했나봐. 머슨.‘
에리나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왔을 때 마왕의 세계는 거꾸로 뒤집혔다. 욕심에 눈이 멀어 에리나를 소유하고자 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하찮게 여겨지고, 그토록 부끄러울 수가 없다. 그녀 앞에서 마왕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부상을 당한 마왕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을 땐, 드르렁 거리는 코골이가 기어코 몸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전라의 상태로 이불도 덮지 못하고 침대위에 널브러져 있는 에리나는 마왕이 보기에 콧잔등이 시큰해질 정도로 안타까워 보였다. 발정기의 짐승처럼 퍼부어댄 정액이 다리 사이에 덕지덕지 묻어있었고, 얼마나 고단했던지 입을 벌리고 세상 모르게 잠든 모습이 처연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마왕은 결국 그 어느때 보다 슬프고, 가슴 아픈 눈물을 에리나 몰래 흘렸다.
마왕성에 좀 더 머무르라는 피에르와 레이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머슨은 여관으로 에리나를 데려왔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 붙어 성심성의껏 간호하고, 혹여나 배가고플 그녀를 위해 수도 내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베이커리에서 판매율 1위인 케잌을 사다 놓았다. 효과가 있었는지 에리나는 금방 눈을 떴고, 게눈감추듯 접시를 비우고선 더 사오라며 당당히 요구한다. 마왕은 곧 바로 베이커리에 있는 모든 케잌과 빵을 사들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마왕 체면이 말이 아니네. 보모라고 해도 믿겠어.”
방이 있는 2층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발걸음이 멈추고,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마왕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들고 있던 봉지더미가 바닥에 떨어지고, 마왕은 엘의 몸을 벽으로 밀치며 있는 힘껏 목을 졸랐다. 비꼬던 엘의 기세는 사라지고 어느새 컥컥 거리며 마왕의 억센 손을 때내기에 바빴다.
“제 발로 소멸 당하러 찾아 왔군”
“크흑…. 걱정 돼서 찾아왔다는 생각은 안 해?”
“마지막 말치곤 싱겁네. 잘 가라.”
마왕이 손에 힘을 주자 뿌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엘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왜 이런 모습을 그 계집 앞에선 보여주지 않았을까?”
목뼈가 부러졌음에도 엘은 정신을 잃지 않고 얘기했다.
“머슨? 그 촌스러운 이름은 뭐고, 기억을 잃었다는 멍청한 소리는 또 뭐야?”
“그게 궁금해서 온 거냐?”
“내가 너한테 관심이 좀 많잖아. 우리 성녀님도 그렇고.”
“벨라가 알아오라 시켰군.”
“시켰다니, 그딴식으로 나의 벨라를 매도 하지 마. 내가 억지로 알아오겠다고 한거니까.”
“나의 벨라? 웃기지도 않는 군.”
주신에게 선택되어 처음 천계로 올라왔던 벨라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어린 소녀였다. 예쁜 얼굴이긴 하나 내성적이고, 말도 잘 못하며, 피해망상에 젖어 자존감이 낮고, 틈만 나면 죄송하다 고개를 조아렸다. 엘은 그 모습이 가여워 인간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난감과 간식으로 벨라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으나 여전히 벨라는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채 혼자만의 공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신성력을 이용한 마법도 가르쳐야 하고 성녀의 기본 소양과 업무를 지도해야 하는 엘로썬 이만저만한 골치가 아니었다. 그러다 도움을 요청한게 바로 마왕, 케일이었다.
‘이 꼬맹이좀 어떻게 해 줘라.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대화정돈 할 수 있게 부탁해.’
마왕은 소녀를 만나러갔다. 핑크빛 벽지에 아기자기한 인형들과 달콤한 사탕바구니가 놓여져 있는 방은 벨라 또래의 여자아이가 봤다면 행복에 젖어 소리칠만 했다.
‘엘의 작품인가.’
마왕은 낯선 방의 분위기에 혀를 차고는 한쪽 모퉁이에 팔로 무릎을 감싸고 앉아있는 아이의 앞에 다가가 섰다. 체격이 큰 어른이 다가오자 벨라는 더욱더 자신의 몸을 껴안아 방어했다.
‘소원을 말해.’
케일은 무미건조하게 이야기했다. 아이를 어루고 달래는 방법따윈 모른다. 마족으로서 인간에게 하는 것처럼 정말 아무 고민 없이 툭 내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반응을 보인다.
‘...정말요?’
엘이 별의 별 방법을 동원해도 꼼짝 않던 소녀가 고개를 쭈뼛 들어 올렸다.
‘뭐든지 말 하라.‘
‘그럼, 전 죽는 거군요.‘
‘왜 그런 결론이 되지?’
‘...드릴 수 있는 대가가 없으니까요.’
‘대가는 앞으로 엘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거면 된다.’
잿빛으로 물들여 있던 탁한 소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엘이 원하는 어린아이 같이 맑은 눈은 아니었다. 어둠에 길들여져 무서운 욕망을 꿈꾸는 타락한 눈동자. 마왕은 그런 눈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었다. 소녀는 마왕에게 간절하게 자신의 소원을 얘기했다.
‘내 엄마 아빠를 죽여줘요.’
놀랄건 없었다. 다만 이런 아이인줄도 모르고 인형이니 사탕이니 가져다 준 엘이 좀 안쓰러웠을 뿐이다. 마왕은 하루가 지나기 전에 소녀의 소원을 이루어주었고, 소녀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 때부터 케일을 향한 벨라의 집착은 시작되었다.
‘뭐든지 다 들어주는 나만의 마법사님’
마왕은 벨라의 이면을 알고 있었으나 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감쪽 같이 착함을 연기하는 벨라의 영향도 있었으나 순수한 모습만을 보고자 했던 엘의 무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일부러 분쟁을 만들어 귀찮은 일에 끼고 싶지 않았던 마왕은 구태여 이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에리나 라는 커다란 의미가 마왕의 인생에 깊게 파고들어 버렸고, 벨라가 에리나 까지 건드린 그 순간 마왕은 더 이상 묵인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다.
“벨라가 너 말고도 테렌투스 황제와도 잠자리를 하는 걸 알고있나?”
가만히 마왕에게 당하고만 있던 엘이 처음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마왕이 엘에게서 떨어져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피했다.
“외로움이 많은 여자야.”
“알고 있군. 벨라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용서하고, 도와주는건 일부러 이용당하기 위해선가?”
“헛소리 집어 치워!”
“벨라의 연기에 언제까지 속아 넘어갈건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야?!
“한 때는 친우라 생각했던 너이기에 소멸 당하기 전,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러나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군.”
마왕이 다시 엘에게 달려들었다. 얼굴을 세게 내리치자 엘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튼튼했던 나무바닥에 금이가고 미약한 진동이 울렸다. 마왕은 멈추지 않고 엘의 멱살을 잡아 올려 있는 힘껏 내리쳤다.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 손은 엘을 붙들고 한 손만을 이용해 무자비 하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했다. 마법으로 손쉽게 끝낼 수 있었으나 에리나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직접 때리지 않고서야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마왕의 주먹에 피가 튀기고 엘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함몰되어갈 즈음 엘이 소리쳤다.
“진실?!”
마왕의 주먹이 잠시 멈추고 그 틈을 타 엘은 깨진 이를 뱉어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넌 그 계집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있나?”
“허튼 수작은 안 통해”
“그런 것 치곤 손이 놀고 있네. 너의 그 알량한 거짓말의 정체를 알고서도 계집이 네 옆에 있어줄까?”
진실. 마왕 자신이 가장 피하고 있던 것이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불안한 미래를 엘이 날카로운 것으로 깊숙이 후벼 파며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그 허무맹랑한 연기를 믿고 있는 다는 게 놀랍군. 아무리 봐도 훌륭한 마왕님이신데 말이야.”
“...”
“언제부터야? 그 거짓말을 시작한게. 음, 베넌 대학살 이후 종적을 감췄으니 3년인가? 인간에게 3년은 아주 긴 시간인데 말이야. 모든걸 다 알면서도 3년 동안 기억을 잃은 척 계집을 기만한 널. 이해해 줄 것 같냐 이말이지.”
“니가 상관할 게 아니다.”
“그래, 내가 상관할 건 아니지. 그런데… 저 계집은 상관이 있는 것 같군. 그것도 아주 많이.”
엘의 시선이 더 이상 마왕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그것 보다 더 멀리. 객실에서 내려오는 유일한 통로인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슨, 이게 무슨 말이야?”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들리고. 불려서는 안되는 이름이 불렸다. 마왕은 손에 힘이 풀려 엘을 놓아준 줄도 모르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 보았다.
“에리나.”
마왕이 다가가자 그녀가 뒷걸음질 친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저 말, 뭐야.”
“...”
상처받은 동그란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르고 호흡을 내뱉을 줄 모르며 정확히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하는 에리나의 모습에 마음이 찢겨져 나간다.
“전부 사실이야?”
이제와서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마왕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리나의 눈에서 허- 하는 헛바람과 함께 눈물이 재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슬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와아- 역시 엘 선배님. 오오! 완전 머슨의 속을 뒤집어 놓으셨따
*독자님 : 아침부터 눈호강 짝짝! 머렐루야!
작가 : 머렐루야 라니 신조어 대박. 갖다 붙이기만 하면 말이 되는 한글의 우수성!! 독자님의 센스!!
독자님 : 한글은 한글자도 없는뎁쇼
*독자님 : 작가님 닉넴이 느릅을 좋아해서 르릅인가요?
작가 : 아뇨...ㅋㅋ (너무 보잘것 없이 닉넴을 정해서 말씀드리기가 꺼려진다.)왜인지는 모르겠는뎈ㅋㅋ.. 닉네임 정할때 '릇샘파'가 떠올라서 릇샘파? 릇 릅 르 르르릅... 의식의 흐름대로 막 정한 겁니다.
*독자님 : 에리나가 떠난다는 느낌이 막연하게만 있고, 행동력있지 못한 것 같아요.
작가 : 맞습니다.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 어느새 머슨을 가장 먼저 찾게되는 모순 에리나를 보고계십니다.
에리나 : 육십 세에~ 이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드으으은~ 아직은 머슨 때문에 못 간다고 전해라아아~
*독자님 : 다음번엔 에리나가 묶이는 걸로 하죠?
작가 : 머슨은 못 즐겼지만, 에리나는 즐길 수 있습니다.
에리나 : 하, 촴나 내 취향을 어떻게 알아?! (속닥속닥)난 수갑은 딱딱해서 싫어
*독자님 : 노블에 코멘트 다는건 첨이예용 먼가 쑥쓰러워성 헤헿 일요일동안 1화부터 93까지 달렸는데 지치지 않고 넘넘 잼써여〉〈
작가 : 완.전.공.감. 저도 이거 연재하기전에 노블 작품은 코멘트 잘 못달았습니닼ㅋㅋㅋㅋㅋ 용기내주신 독자님 완전 감사해엿!! 그 덕에 작가는 힘이나서 폭풍글쓰기!! 사랑합니다 독자님〉〈
*독자님 : 시간이 점점 줄고 있어요 돌아와요 작가니뮤ㅠㅠㅠ
작가 : 헛. 시간 다 끝나셨으려나?ㅠㅠ죄송해요 ㅠㅠ넘 늦었져 ㅠㅠㅠㅠ 안돼에에에에 다시 돌아오실 때 까지 편수 많이 쌓아 놓을게여 ㅠㅠ 하, 오늘따라 친구가 밥을 사준다며 운수가좋더라니...ㅠㅠㅠㅠㅠ (김첨지 작가)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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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못하고 올려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