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편
<-- 13.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나요? -->
내 단호한 어투에 멈칫하나 싶더니 성녀는 다시금 저돌적으로 따져 물었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군요”
“거짓말 아니에요. 난 케일을 사랑 하지 않아요. 아니 할 수 없어요.”
마왕 케일하르츠. 소설책을 읽는 독자일 때나 팬이었지, 그를 실제로 마주한 순간 내 환상은 와르르 무너졌었다. 비린내 나는 피 웅덩이 속에서 인간의 목숨을 손가락 하나만으로 무참히 끊어내던 그를, 나또한 온 몸의 피가 솟구쳐 나가는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려던 그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에게 ‘케일’이란 사랑과는 전혀 연관시킬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얼굴과, 체격, 머리칼 한 올 한 올 까지 일치한 남자는 사랑하고 있다 말하기에 충분한 남자였다. 섬세하고, 다정하고, 가끔은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지만 속은 여린. 내 옆에서 따뜻한 온기를 뿜고 있는 머슨의 손가락 하나를 걸어잡았다.
넌, 머슨이야. 머슨 홀든. 네가 케일하르츠로 돌아가기 전 까지만 사랑... 할게. 그러니까 난 케일이 아닌 머슨 널 사랑하고 있다 얘기하는 거야.
"사랑할수 없다…라. 하긴, 인간이 감히 마왕에게 꿈꾸지 못할 감정이긴 하죠."
“전, 그 ‘케일’을 잘 알지도 못하고요.”
“손 까지 붙들고 있으면서, 이렇게 나오실 건가요?”
“앗, 이건…”
그래, 내 머릿속에서나 케일과 머슨이 독립된 인물이지 그를 알고 있는 제3자가 보기엔 영락없는 동일인 ‘케일하르츠’였다. 난 잡고있던 머슨의 손을 재빨리 놓았다. 그러나 머슨이 끈질기게 내 손에 따라붙어 결국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넣더니 있는 힘껏 깍지 껴 잡는다.
“이, 이거 놔!”
떨쳐내려 해도 워낙 힘이 장사인 머슨을 강제적으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성녀의 눈치를 보는 것 뿐이었다. 성녀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다. 어라라? 급기야 천신의 품에 얼굴을 묻더니 소리 없이 울기시작했다. 소리가 없는데 우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어깨가 좀 과장되다 시피 눈에 띄게 들썩이는데 모른척 할래도 모를 수가… 것보다 더한 문제는 천신의 표정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되게 험악해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전신에 파고든다. 먹잇감을 눈 앞에 둔 맹수처럼 잠시 몸을 움츠리고 기회를 엿보는 듯 해 보였다. 난 섣부르게 위험을 감지했다는 것을 티내면 마치 방아쇠가 당겨지듯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몰고 올까봐 최대한 태연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물론,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므슨, 븐으그그 즘 이승흐즈 읂으?(머슨,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
입술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머슨에게만 들릴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깍지 낀 손 엄지로 그의 손등을 긁으며 당장 여기에서 나갈 것을 이야기했다.
“에리나, 잘 안들려. 좀 더 크게 말해줘”
...너, 내 노력은 보이지도 않냐?
머슨은 보란 듯이 떵떵 소리치며 나에게 소리를 높여 말할 것을 요구했다. 오늘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 나간다면 머슨에게 눈치교육을 좀 시켜야 겠다.
“무, 무슨말?! 나 아무 말도 안했는데”
“아니야. 나 분명히 들었어. 에리나가…”
“와!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갈까? 성녀님도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불길한 공기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 거릴 정도로. 난 머슨과 마주잡고 있는 손을 잡아 끌며 문쪽으로 당겼다. 몸은 이미 반쯤 돌아가 문을 향해있고, 손 만 뒤로 한 채였다. 쉽게 따라오지 않는 그 때문에 팔 아래로 머슨의 무게가 느껴진다.
“얘긴 아직 안 끝났다.”
섬칫-
한 발 자국이라도 이 방에서 멀어지고 싶어 기를 쓰던 내 발이, 의지를 잃은 것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어느 순간 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는 천신의 냉랭한 음성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일순 잊어버릴 만큼의 공포가 머리를 지배했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머슨의 손을 내 쪽으로 좀더 끌었다. 그러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느껴지나 그것이 미미하다. 우직한 그의 몸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뿐만 아니라 내 손을 강하게 쥐고 있던 손가락에도 힘이 빠진 듯 느슨해졌고, 그 무게가 아래로 쏠려있었다.
“머슨?”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려는 손을 억세게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난... 손을 놓아 버렸다.
“꺄아악-! 머슨!!”
신발 밑창을 적실 정도로 흥건한 피가 바닥에 고여있었다. 그리고 단숨에 잘려버린 머슨의 팔도 그 위를 뒹굴었다. 익숙하지 않은 끔찍한 상황에 헛구역질이 나오고 동시에 코가 시큰해져갔다.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피범벅이 된 머슨의 잘린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이, 이거 어떡하지?”
온기를 잃은 팔은 내 손위에서 힘 없이 꺾여버렸다. 머슨은 잘린 부위에서 피를 줄줄 쏟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을 뿐이었다. 난 내 원피스 밑단을 이로 찢은 뒤 머슨에게 다가갔다.
“아, 아파? 어떻게 해 미치겠다. 이게 뭐야 씨발 진짜!!”
내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완전히 뒤덮여져 버렸다. 지혈이라도 해 줄 생각으로 다가갔으나 상처 부위가 너무 커 내 원피스 밑단 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함부로 만졌다가 봉합도 안 되는 상황에 이르러 버리면 큰일이었기에 별다른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유난 떨지마, 계집”
천신이었다. 남에 팔을 댕강 잘라놓고는 뭐가 그리 당당한지 내 모습을 보며 오히려 비웃기 까지 하고 있다. 난 머슨의 팔을 소중히 품에 안고 천신에게 다가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당신 미쳤어?! 당장 다시 돌려 놔”
무섭다.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내 목도 이 자리에서 댕강 잘려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분노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기절할 만큼 잔인한 고통에 휩싸이고 있을 머슨을 생각하면 심장이 펑! 터질것만 같이 아프다.
천신은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사리분별 하지 못하고 마구 떠들어대는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의 손이 움직인다. 내 목으로.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심하네.”
“...”
“어린아이 같군.”
“알아듣게 얘기해”
“주체할 수 없는 소유욕. 넌 케일 자식한테 완전히 사로잡힌거라고. 알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지금은 빨리 이 팔을 원상복구 시키는 것.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 할 수 없었다.
“...빨리 돌려 놓으라고.”
“맹랑해 짖을 줄도 알고.”
천신이 잘려나간 머슨의 팔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피부 위에 검은 가루가 생겨 난다. 혹 세균이라도 옮을까 싶어 입바람으로 그것을 털어냈다. 그런데 아무리 불고 또 불어도 검은 가루는 또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뭐야...”
검은 가루가 내 손가락 사이를 뚫고 흘러 내릴정도로 많아 졌다. 그것은 머슨의 팔 위에 쌓인 것이 아니라 팔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자, 잠깐 이게 뭐야? 안 돼 어? 안된다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팔은 무너져 내렸다. 붙잡으려 품안 가득 힘주어 안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바닥위에 흩어져 버린 검은 가루들을 쓸어 모으니 작은 둔덕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할 것 까진 없었잖아.”
눈물이 뚝뚝 떨어져 가루 위에 녹아든다. 내가 다치면 다쳤지 머슨이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는 건 마음이 견디기 힘들다.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팔을 잘라? 말로 해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앤데, 너무 하잖아. 이건 진짜 이건 아니지!”
엉엉- 참을 수 없이 속에서부터 통곡하며 바닥에 이마를 묻었다.
“에리나.”
머슨의 목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려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울고 싶은 건 머슨일 텐데 어리석게도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엉엉 목소리를 내어 안겨버렸다. 미안해.
“흐엉- 우리 머슨 불쌍해서 어떡해. 차라리 내 팔을 가져가지! 흐읍. 이제 내 몸을 니것처럼 써 밥도 먹여주고 몸도 씻겨주고 다 할게. 머슨, 걱정하지마. 팔이 세 개인 것처럼 살게 해줄게”
“정말 이지?”
“당연하지, 내가 책임지고 돌볼테니까…”
“고마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머슨이, 다정하게 속삭이더니 양팔로 내 어깨를 끌어 안았다. 넌,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아? 꼭 왜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이 행동하는데… 왈칵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그런데 잠깐, 양 팔? 착각인가
난 머슨의 어깨를 밀어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의 어깨 아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손등으로 몇 번 훔쳐낸 후에야 겨우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근육이 멋들어지게 자리잡힌 든든한 양 팔을.
“...붙어 있네?”
꼬집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이로 깨물어도 봤다.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팔이 확실하군. 음...
“이게 뭐야?!”
추궁하듯 묻자 머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난 아직도 바닥위에 쌓여 있는 검은 가루들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구둣발 하나가 올라가 가루들을 완전히 뭉개버린다.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군, 계집.”
========== 작품 후기 ==========
*에리나 : 이게 뭐야?!
머슨 : 난 가끔 팔 안이 간지러울 때, 팔을 잡아 뜯어서 긁기도 해.
에리나 : ...아, 적응 안돼.
*독자님 : 성녀가 숨긴 책이 뭐가 있나 보네용!
성녀 : 절친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내 뷰티시크릿★
에리나 : ...친구가 없잖아.
*독자님 : 성녀 니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쥐고 있으라고!
성녀 : 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이미 부어버린 탕수육 소스처럼.
작가 : 저런...(찍먹파)
*독자님 :4각관계가 아니라 아쉽내영 ㅠ 앗 설마! 엘 덕분에 나중에 성녀가 받는 벌이약해지나요?!
작가 : ...성녀에게 벌을 내릴 사람은 딱히 없답니다.
독자님 : (발암) (아니 작가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독자님 : [에리나] 내가 사랑하는건 케일이 아니라 머슨이니까요!
[독자님] 나는 작가님을 사랑한다!!
작가 : 독자x작가 (주인공만 사랑하라는 법 있냐?) 출간
*독자님 : 막내딸 취급받고 있는 막내며느리입니다! 시댁일 다 끝내고 누워서 리플다는 중이에요ㅠ
작가 : 명절 날 힘들게 일하신 독자님께 원기충전 빵빵 얍!!! 코멘트에서 독자님의 노곤함이 느껴졌어여 8ㅅ8! 독자님을 힘들게 하다니...이제부터 설 연휴를 연휴라 부르면 안되겠네요 흥!
*독자님 :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작가님!!
작가 : 와.. 독자님들 덕담에 올해 복 진짜 많이 받을 것 같아요! (갸아아 로또사러 가야지)
독자님 : 그러라고 준 복이 아닐텐데
*독자님 : 명절 후 오셔서 성녀 안바르시면 화낼꺼임 키듀키듀
작가 : 발린건 머슨이었으며... 최대 피해자는 에리나 였숨다..(숙여지는 고개)
*독자님 : ㅠㅠ작가님! 다음 이용권에서 만나요!
작가 : 저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와요~!
*독자님 : 작가님, 제 커피한잔 값을 드립니다. 사랑해요 책 꼭 내주세요!
작가 : 제가 이세상 넘버원 파워쫄보라 아직도 계약 결정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네요(세상답답)
*독자님 : 작가님 러블리하시네요〉〈(공지로 상황을 알려주신다니 라는 앞의 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가 : 작블리라 불러주시겠습니까? 제 영혼이 벌써 핑끄핑끄 하지않나요?
독자님 : 않나요.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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