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편
<-- 12. 집들이가 원래 이런거였나요? -->
황제가 끈질기게 이어 말하기 전에 마차 안으로 올라타 열린 창문 사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굿바이. 황제가 끈질기게 이어 말하기 전에 마차 안으로 올라타 열린 창문 사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굿바이.
마차가 출발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관 앞에 서자마자 난 마치 우사인볼트의 환생처럼 잽싸게 튀어 나갔다. 계단을 세칸씩 뛰어오르는 진기를 보이며,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에 치맛자락이 제멋대로 펄럭일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익숙한 여관방 문 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잘만 움직이던 다리가 급브레이크가 걸린 듯 멈춰 섰다. 난 매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시작했다. 1센티 간격으로 아주 조금씩.
자, 자겠지? 제발 자라!
잠금 쇠가 풀어지고 나무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유난히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서서히 벌어진 틈 사이로 내부가 보일 즈음…
“으아앗!”
문이 활짝- 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문을 연 주인은 당연히도 머슨이었다. 으아아. 슬쩍 눈동자를 굴려 머슨을 바라보았다.
“좀… 늦었지?”
“좀?”
내 품에서 염색약 더미가 빠져 나가고 빈 테이블 위에 얹어졌다. 그것을 옮긴 머슨의 손이 스르륵- 자신의 허리께로 올라간다.
“음...저기 그게"
“...”
"벌써 해가 져버렸네, 그치?“
"..."
어디 갔다 왔냐고, 뭐 하다 왔냐고 추궁에 가까운 질문들이 쏟아 질 줄 알았는데 머슨은 한 마디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게 더 무서워 차라리 욕을 해!
“머슨, 밥은 먹었어?”
“...”
“많이 기다렸지, 금방 온다고 했었는데”
“...”
“또 지키지 못했네...”
몸이 당겨지고 그의 가슴팍에 뺨이 닿았다. 정수리 위로 머슨이 턱을 올려 놓아 그의 따뜻한 온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해졌다.
“...걱정 많이 했어?”
“에리나가 위험하지 않았단 건 알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뭐가?”
“에리나의 위험이”
예언자야 뭐야, 마왕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설정은 소설에서 못 봤는데
“어떻게?”
“안전장치”
“무슨 개소…”
“그래서 어디 있다 온 건데?”
머슨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별 것 아닌 질문에 괜히 몸이 움찔 거렸다. 뭐야, 왜 긴장해 바람 핀 마누라도 아니고 말이야.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갑자기 자기 집에 초대 하겠다고 해서”
“아는 사람?”
이 말 뜻은, 내가 알고 머슨이 모르는 아는 사람 따윈 없는데 도대체 누구냐는 의미였다. 실제 부부보다 더 각별하게 붙어 생활 했던 우리였기에 서로가 모르는 지인 같은 건 없다.
머슨이 물어 오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고, 유별난게 아님에도 괜히 말 하기가 망설여 진다. 그 아는 사람이 무려 황제라서, 성녀와 사각관계를 이루는 인물 중 하나라서 더더욱 그렇다. 기억을 잃기 전 너의 연적과 본의 아니게 친분을 쌓다 왔단다.
“으읏- 무거워”
내 정수리 위에 얹어진 턱이 힘을 주어 꾹 눌렀다. 재촉의 의미였다. 하아- 그래. 쫄려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머슨은 기억도 못하고 황제랑 나랑 썸타는 것도 아닌데.
“황제 폐하”
“...뭐?”
“우리 저번에 퍼레이드에서 봤던 그 사람. 연회 때 내가 도움을 준 일이 있어서 보답하겠다고 황성 구경을 다 시켜주시네. 나 같은 게 언제 그런 곳을 구경이나 해 보겠어 그래서 다녀왔지”
강제적으로 끌려가다 시피 한 것이 팩트였지만, 이 말은 머슨의 화를 돋게 하는 불씨가 될 수도 있었기에 자체 필터를 살짝 거쳤다.
“에리나 그 자식 만나지 마.”
어깨가 밀쳐지는 가 싶더니 머슨의 손 아래에 단단하게 붙잡혔다. 적안이 타오르고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왜 그래, 그냥 집들이야.”
“에리나가 황제라는 놈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당장에 데려왔을 거야.”
내 어깨를 붙잡은 손이 분노로 꽉 쥐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아파할까 싶어 머슨이 자제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맞닿은 부분에서 심상치 않은 불길이 이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은 너무도 잘 알았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상했다. 황제에 대한 기억은 없을 텐데, 고작 퍼레이드 때 한 번 본 것만으로 이렇게 악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는 건가? 상식적으로 설명 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너, 황제에 대한 기억이…
“...돌아 온 거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너, 기억이 돌아 왔어? 그래?”
머슨의 옷자락을 쥐고 바짝 다가가 물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뛴다. 두려움, 환희, 걱정, 안도 등의 감정이 마구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슨은 아주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 놈이 첫사랑이고, 잘생겼다며.”
...얘 지금 뭐래니?
잠시 눈을 감고 귀를 후볐다. 들리는 머슨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고, 또 절실했다.
“만나지 마. 에리나에게 멋진 남자는 나 하나면 돼. 첫사랑도 나고, 잘 생긴것도 나야. 그 자식은 쳐다도 보지 마. 제발.”
퍼레이드 직후, 내가 황제를 보고 잘생겼네, 다 가졌네, 첫사랑 이미지네 어쩌고 했던 것을 지금 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을 줄이야.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머슨의 팔을 힘 주어 뚝! 뚝! 떼어 냈다.
“자라”
긴장이 풀려서 인지 피곤함에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에리나, 그 자식 절대 만나지 마. 응? 대답 해 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뭐 앞으로 만날 일도 없을 것 같고.
“정말…”
“에반은?”
내 대답에 만족 하지 못하고 머슨이 더 완강한 대답을 갈구하기 시작 하려 할 때 재빨리 말을 낚아챘다.
“이제 찾냐?”
머슨의 등 뒤에서 늘어지는 아주 게으른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옆으로 꺾어 침대를 보자 에반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도 누워있어?”
“부부 싸움 구경 잘 했다. 것보다 감히 폐하를 질투 하는 남편이라니. 마누라는 황성도 가고 너네 부부 대단하다.”
조롱이 분명한 박수와 휘파람 까지 뒤따르자 옆에 얌전히 놓여있던 베개가 에반의 얼굴로 날아갔다.
빠악-
“악-”
“그게 갑자기 왜 날아가냐?”
“하나 남은 베개나 내려놓고 말하시지?”
“손이 미끄러 졌다. 미안 에반”
에반이 자신의 콧잔등을 쓸어 내렸다.
“맞을 까봐 맘편히 잠이나 자겠어?”
“여태까지 자 놓고선”
에반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무거운 동작으로 방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가?”
“여관 주인한테 빈방 하나 내어달라고 할 거야.”
나와 머슨을 번갈아 보던 에반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커플이랑 방 쓰는 건 미치도록 불편하단 말야.”
“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반이 손을 뻗었다. 머슨을 향해.
“니 앞으로 달아 놓을게”
“머슨한테 맡겨 놨냐?”
“잘 자라!”
쾅-
에반이 쏜살같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다가 본능 적으로 침대를 찾아 엉덩이를 내렸다.
아직 서있는 머슨을 바라보며 별 의미 없이 미소 짓곤 물었다.
“쟤 왜 집에 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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