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은 18세 미만 구독불가 였습니다-80화 (80/170)

80편

<-- 12. 집들이가 원래 이런거였나요? -->

“너한테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또 야. 또 달라. 머슨은 기억을 잃어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성녀와 황제는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내가 소설 속에서 보아온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정의감이 투철하여, 자신을 향해 열렬하게 구애하는 남자들 보다 길을 잃어 헤매는 소년의 손을 잡아 주었던 성녀가 대놓고 머슨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고, 성녀의 욕심없고 맑은 선함에 이끌렸던 황제가 오히려 그녀를 어둡다 말하고 있었다.

“쫑알쫑알 쉬지 않던 입이 잠잠한 걸 보니, 많이 놀란 모양이군.”

당연하지, 어떻게 안 놀라. 내가 알던 황제는 성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놀라움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을 한참이나 짓고 있자, 멋쩍게 웃던 황제의 미소도 서서히 걷혀갔다.

“내 고백이 그렇게도 충격이었나?"

달에 취해, 밤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던 황제는 머리 위까지 가득 차올랐던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듯이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자신의 말에 대해 작은 후회를 하고 있어보였다. 그래, 현자타임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놀라하고 있으면 안 돼. 괜히 말했다 싶어 비밀엄수 라는 명목 하에 목이 베이는 꼴은 절대 당할 순 없으니!

“추, 충격이라기 보다는… 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둡다’라고 표현 하는 게 좀 생소해서요.”

“그래, 수많은 글을 읽어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여인을 그리 표현 하지는 않았더군”

“바로 그거예요. 혹시 뭐, 어디가 특출 나게 예뻐 보인다거나 이 부분은 정말 사랑스럽다 하는 면모가 있나요?

“그녀는 신이 불철주야로 공을 들여 탄생시킨 듯 모든 면모가 빼어나다.”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덮여 말하는 남자의 대사가 아니었다. 이건 아주 객관적이고 건조한 평가일 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황제의 애달픈 짝사랑 이야기를 실시간 생 라이브로 듣고자 했던 것과는 다르게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자 더 이상 성녀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난 재빨리 화제전환을 시도했다.

“이런 이야기 막 나한테 해도 돼요? 내가 여기저기 다 퍼뜨리고 다니면 어쩌려구요!”

“팔팔 끓는 물에 네 살가죽이 떠다니는 걸 보고싶진 않구나.”

“...네?”

“새벽이슬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네 목이 떨어지는 걸 보는 건 썩 마음이 언짢을 것 같구나.”

“아뇨 잠깐만요 폐하.”

화제전환 하려다 내 이번 삶을 전환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황제는 웃음기도 없이 호수 저편을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순간 우연처럼 바람이 불었고, 그 미세한 바람에 내 목이 댕강 잘릴까 목을 감싸 쥐었다. 오, 아직 멀쩡해.

“아니, 내 앞으로 끌려오기 전에 백성들의 돌질에 맞아 죽지만 않으면 다행인가. 나에 관한 허황된 이야기를 아주 싫어하거든. 워낙 사랑받는 몸이라, 내가.”

“우리 무슨 얘기 했던가요? 아 갑자기 대뇌피질이 아프네. 의원을 좀 불러주세요. 아니 괜찮아요. 대뇌피질 전문 의원이 집에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지했던 황제의 붉은 입술 사이로 방정맞아 보이는 호쾌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솔직하구나”

“가진 것도 없는데 자존심 세워 봤자 좋은 일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음, 마음에 든다.”

“거 참 영광이네요.”

황제의 손이 머리위에 닿는다. 작은 머리통을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만큼의 널찍한 손이었다. 머슨 보다는 약간 작나?

“으아앗-”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리며 눈 아래로 흩어져 내려온다. 황제의 손이 평화롭기만 하던 내 머리위를 마구 휘저어 버린 것이다. 머슨에게 벌써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머리위에 손이 닿으면 다정하게 쓰다듬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봉변을 당하다니…

“저 잔머리 많아서 머리 관리 힘들단 말이예요”

투덜댔으나 황제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는 듯 보였다.

“아비츠 백작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 형편이 어렵나?”

머슨이라는 캐쉬템이 있어서 부족한 편은 아니지만(오히려 넘치도록 풍족한) 상황상 그렇다고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았다.

“저 같은 서민들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값비싼 마도구는 잔뜩 샀던데”

아차. 허를 찔렸다. 그러나 변명 하나가 머릿속에 번쩍 떠올라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제 거 아니예요. 심부름이죠”

“그런 일도 하나?”

황제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호수 위에 머물러있던 시선이 나를 향하고 나지막한 음성이 귀로 파고들었다.

“테렌투스 국은 전 대륙을 통틀어 빈민층이 가장 적은 나라이지.”

“적다는 거지 없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게 바로 저 일수도 있구요.”

황제의 눈이 휘어진다. 지금 웃어? 물론 거짓말이라 해도 가난에 관해 눈물어린 이야기를 하는데 나라의 주인이라는 놈이 웃고자빠졌다니.

“일자리가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라 황궁 시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지.”

와 뜻밖의 취뽀. 현실에서 아등바등 잠 안자고 노력해도 어려운 그 힘든 걸 제가 해냅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의 취업은 사양이다. 난 어차피 돌아갈 몸이고, 이곳에 더 지낼 수 있게 된다 해도 난 체닌을 데려오고, 성녀와 이야기가 잘 성사되면 세자인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즉 더 이상 수도에서의 볼일 따윈 없다는 말씀!

“말씀은 감사하지만 고향에 다시 내려갈 생각이어서요”

“아… 트렌시아가 고향이 아닌가?”

내가 그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했나? 황제는 어디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물어왔다.

“네, 좀 먼 곳이라. 빨리 집으로 내려오라고 아우성이셔서 오래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거 아쉽게 됐군.”

“그렇죠 뭐.”

살랑- 간질거리는 풀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잠시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달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는지 은색의 빛이 더욱더 밝아진 기분이다. 얼마나 지난거지? 머슨 걱정할텐데. 슬쩍 곁눈질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제 좀 보내줘!

“가는 거냐?”

오우, 귀신이야 뭐야?

“네. 시간이 많이 늦어서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누구?”

“대뇌피질 전문의원이요”

“하하. 그 의원이 실력이 좋은가 보군. 나도 진료 받아봐야겠어.”

“제 담당이라”

“내가 황제인데도?”

“저 말고 다른 사람 몸만 보면 까막눈이 돼서요.”

이제 그만 넘어 가라 좀! 집에 가고 싶다고! 내 간절함이 닿은 건지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그래, 어서 전문 의원에게 가라”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돌려주세요. 제 물건”

“마차에 실어 놓아라 일러두었다. 훔쳐가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어.”

당장에라도 성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갈 것 같던 발걸음이 잠시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자, 잠깐 마차라고?

“걸어가도 되는데요”

아씨, 머슨이 텔레포트 시켜 준다고 했는데, 거기로 가야 되는데!

“신분이 미천하다 하더라도 황제가 직접 초대한 손님을 걸어가게 할 순 없지. 거절한다면 나에 대한 모욕쯤으로 생각하겠다.”

아나, 이거 선의야 악의야? 환장하시겠네! 그러나 마땅히 거절할 구실도 떠오르지 않고, 더 이상 입싸움 하기도 싫어서 그냥 순순히 받아드리기로 했다. 안 그래도 머슨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여기서 시간 낭비 할 순 없지.

“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황송하게도 황제는 마차 앞까지 나를 배웅했다. 아주 느릿느릿하다 못해 열불 터져버릴것만 같은 걸음 속도로!

“혹여 나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땐 저번에 건내준 손수건을 가져와라. 의심없이 문을 열어줄 것이니.”

“그럴일 없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

“그럼요 가져 온다구요. 저 가볼게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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