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편
<-- 12. 집들이가 원래 이런거였나요? -->
난 바로 옆 돌로 옮겨 앉았다. 황제가 내가 비키자마자 그 자리위에 앉는다.
난데없이 황제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찾아왔다.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화나는 기색 한번 보이질 않는다. 그 때문인지 황제라는 위엄 보다는 그냥 학교 선배와 같은 느낌도 든다. 물론, 내가 다니던 대학의 선배 중에 이 정도의 우월한 외모를 소유한 절세미남은 없었다.
“난, 니가 당황해 하는게 재미있다.”
웬 갑작스런 개소리?
“푸하하! 그래, 지금 그 표정 말이다.”
내 표정이 뭐 어때서! 난 의식적으로 얼굴근육을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호숫가 위로 고개를 들이 밀었다.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얼추 알아 볼 정도는 되었다. 수면위에 비친 내 표정은 딱 그거였다. 눈으로 욕하고 있는 것.
“사람 놀리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왜 난 자꾸 놀리고 싶지?”
“변태라는 뜻이죠.”
“나쁘지 않구나.”
...긍정 왕이야 뭐야? 어처구니 없음에 할 말을 잃고 황제를 쳐다 보자 그가 또 다시 호탕하게 웃는다.
“오늘 황궁 안내가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조금 이상할 뿐이게요? 아니 뭐, 구경하라 해놓고 발만 닿으면 다른 곳 으로 또 다시 발만 닿으면 다른 곳으로. 이건 구경이 아니라 그냥 빨리 걷기 운동이었다구요.”
“장소에 대한 불만은 없구나. 좋은 곳들을 놔두고 왜 마구간이나 주방 처럼 누추한 곳을 안내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 나열해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시설들이 하나같이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좋아서 전혀 누추하다고 느끼지 못했을 뿐. 생각해보면 이거 완전 나 엿먹으라고 한 짓인게 분명했다.
“나 화나게 만들려고 그랬죠!”
“대실패 했지.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와! 완전 변태폐하 맞네! 은인이라면서 이래도 돼요?”
평화롭게 고여 있던 물이 일렁인다. 작은 돌이 황제의 손을 떠나 제 몸짓 보다 훨씬 큰 호수를 어지럽히며 달을 머금고 있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렸다.
“마지막은 네가 원하는 곳을 보여 주었지 않나.”
날 골리려고 작정하고 황궁으로 데려온 주제에 뻔뻔하기 까지 하다. 어이없음에 억센 콧바람이 튀어나왔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그래도 이곳에 다른 사람을 데려온 건 네가 두 번째 이니. 이정도면 은인 대접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황제가 가볍게 풀어낸 말에 내 귀가 토끼처럼 움직였다. 황제에게 은인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건 아니다. 흥미가 당겼던 것은 바로 내가 이곳에 온 두 번째 외부인 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첫 번째는 성녀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부러 ‘두 번째’ 라고 칭했고 나는 이 소설책을 관심 있게 읽었던 독자로써 그의 속마음을 외전에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알면서도 물어봐주는게 인지상정이지 암암.
“제가 두 번째 라구요?! 그럼 첫.번.째 는 누군데요?”
조금 오버스럽게 물어, 거짓연기인 것이 태가 났다 싶었는데 황제는 전혀 눈 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에 장난기가 빠지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랑에 수심이 가득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닿을 수 없는 여인.”
“세상 천지에 폐하께서 꼬시지 못하는 여인이 있다구요?”
“연심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아, 너무 앞서나갔다.
“그럼 스승님 같은 분인가 보네요!”
“아니라고 한 적도 없지.”
지금 나랑 장난치냐? 아아 표정 관리 표정 관리.
퐁당- 또 다시 호수가 일렁인다. 아직 황제의 손 안에 남아 있는 작은 돌은 허공에 띄어 올랐다가 다시 손 안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럼 짝사랑이세요?”
“그녀의 마음이 나와 이어져있지 않으니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어떤 분인데요?”
황제가 생각하는 성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마음 같아선 수첩이라도 꺼내어 줄줄이 적고 싶었다. 반드시 잘 새겨들어야 겠다는 생각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을 목표로 황제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내 질문에 황제는 별 다른 고민도 없이 툭 이야기했다.
“아름답다.”
“아- 아름답구나... 가 아니라. 그게 끝이예요?”
“뭘 더 이야기 해야 하지?”
성녀가 아름답다는 건 지나가는 꼬맹이 붙들고 물어 봐도 들을 수 있는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 말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 할 수 있는 말들 있잖아!
“뭐 하다 못해, 그녀에게서 뭔가 여느 사람들과 다른게 보인다거나! 빛이 막 쏟아져 내린다거나 그런 느낌 없어요?”
열을 내어 말하는건 오히려 나였고 황제는 차분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는데.”
“잉?! 그럼 그냥 단순히 아름다워서 좋아해요?”
맙소사. 말도 안 돼. 나의 환상이 와장창 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외모도 한 몫한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네가 말하는 것과 정 반대다. 빛이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빛 속에 둘러 쌓인 어둠이 보이지.”
황제의 눈동자에 초점이 옅어졌다. 마치 머릿속으로 성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듯 보였다.
“어둠이요?”
“그래, 누구나 가지고 있는 깊은 어둠. 고귀해보이고 마냥 선해보이지만 그녀도 그저그런 어둠에 잠식되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위태로워 보여.”
소설책에서 성녀는 선을 넘어선 선한 자로 표현된다.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봉사하며, 무모한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그녀. 현실에선 존재 하지 않을 법한 비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말하고 있는 성녀는 소설책의 성녀와는 사뭇 달랐다. 지극히 인간적인 어둠을 가지고 있는 성녀라니...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황제의 말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거든.”
이봐요, 폐하.
“그녀의 미소는 눈부시지만, 너머에 깊게 뿌리내린 어둠이 보여 곧 모든 걸 집어 삼켜버릴 듯한 짙은 어둠이. 그녀는 아닌 척 애써 누르고, 참고 버티고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나에게 부탁해오면 난 절대 거절할 수가 없지. 안쓰럽고, 또 안타까워.”
당신, 뭔가 착각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먹 따위 묻히고 있지 않다 소리치는 것만 같은 그녀가 가엾어. 실은 먹물 투성이면서. 그래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지.”
더 이상 황제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 못 이해하는 건가?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랑이 아니야.
동정이다.
성녀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비극과 같은 동정.
========== 작품 후기 ==========
*독자님 : 사오정 넘사벽 황제... 머슨을 위협할 귀염성을 가지고있다!!
작가 : 황제는 뿌잉뀨잉을 할 수 있지만, 머슨은 하지 못합니다.
독자님 : 그게 먼소리
*독자님 : 새친구 생겨서 집들이 해주는 꼬마 같은 황제
황제 : ? 나 친구 많아!!
작가 : (토닥토닥)
에리나 : (토닥토닥)
독자님 : (토닥토닥)
*독자님 : 아이고 ㅋㅋ 집에서 분노하는 머슨의 소리가 들린다
머슨 : 에리나!!! 에리나!!!
에반 : 드르렁!! 드르렁!!
*독자님 : 머슨 보고싶어요!! 내놔라!!!
작가 : 머슨 다음 화에 준비완료입니다.
*독자님 : 왜 추천 한번 밖에 안되죠?
작가 : 독자님의 추천은 레.어. 하니까요 (찡긋)
독자님 : 마이너스 추천은 왜 없을까
*독자님 : 황제는 머슨에 비하면 매력등급이 좀 떨어지는 것 같네요 역시 머슨!
머슨 : 훗
황제 : 뿌잉뀨잉 해봐
작가 : 그만해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머슨 다음 화에 나옵니다! 짧아서 죄송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