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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은 18세 미만 구독불가 였습니다-78화 (78/170)

78편

<-- 12. 집들이가 원래 이런거였나요? -->

결국 와버렸다. 쨍한 대리석 바닥 위에 앞코가 다 뜯어진 초라한 검정 가죽 신발은 누가 봐도 나의 것이 분명했다.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을 한다 하더라도 전혀 비좁지 않을 만큼 넓은 로비는 외부인인 나를 자꾸만 위축되게 만들었다.

“저런. 너무 감격스러워 하지는 말라고.”

“어깨에 손 좀 치워주시죠?”

황제가 능글맞게 웃었다. 오, 때려주고 싶은데?

난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기다리고 있을 머슨 생각이 쉽사리 떨쳐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교육받은 시종들이 줄을 지어 황제를 맞이하였다. 황제는 염색약을 한 시종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곤 손짓으로 그들을 물리며 나를 생뚱맞게도 ‘은인’이라 소개했다. 이 말 한마디에, 나의 초라한 행색은 보이지도 않는지 시종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어느 저명한 은사님을 마주하는 것처럼.

“황궁이 피크닉 장소는 아니지만, 특별히 너를 위해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도록 하지.”

“아아. 황송하여라”

게다가 가이드가 황제라니. 이것 참... 복이 넘치는 건지, 재수가 없는 건지 모를 일이다. 황제는 거침없이 황궁 안을 휘젓고 다녔다. 난, 이 넓은 황궁에서 혹여나 길을 잃을까 싶어 발걸음이 빠른 그의 뒤를 힘겹게 쫓아다니기 바빴다.

“이곳을 전부 눈으로 담으려면 꼬박 사흘은 걸릴 테니, 내 특별히 보여 주고 싶은 곳을 선별하여 안내해 주겠네”

“그것 참 듣던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네요. 성문 안으로 들어온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경험이 된 것 같긴 하지만요”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앞으로 밀었다. 묵직한 아픔에 그를 쏘아보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즐겁기만 해 보인다.

“무슨 마음에도 없는 소릴!”

“백 퍼센트 진심 인데요.”

“어서 가자구!”

실력있는 정원사의 솜씨로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지만 그것을 구경할 틈은 없었다. 황제놈의 걸음이 빌어먹게도 빠른 탓이었다. 때 아닌 운동에 몸에 열이 오르고 땀이 맺히다 못해 떨어질 즈음 드디어 황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도착했네.”

돌담이 우거진 곳에 두께가 제법 있어 보이는 거대한 목조의 문이 나타났다. 어울리지 않는 금색 고리를 퉁퉁 울리자 문 안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와-”

녹의 푸르름을 머금은 잔디가 영화속에서나 보았던 스위스 체르마트의 전원을 연상시켰다. 평화롭게 양털을 깎으며 소젖을 짜고 자급자족의 생활로 단란한 가정을 꾸려 살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러나 이 잔디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말이었다. 금빛 안장을 몸에 두른 채로 자연을 벗 삼아 자유롭게 뛰어 다니는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 이었다.

“어때, 마구간 처음 보나?”

중학교 때 현장학습으로 들렸던 마구간에서 말 당근 주기 체험을 했던 경험이 있다. 날리는 흙밭 위에서 검은 눈을 치켜뜨며 당근을 씹어 먹던 말의 모습은 기억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 위에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제 집 보다 백배는 더 넓어 보이네요.”

팔자도 좋다. 진심어린 감탄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다른 질문을 건냈다.

“실망하지 않았나?”

“잉, 어째서요?”

황제는 멀리 보이는 축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더 들어가면 냄새도 아주 심하지.”

아, 그건 나도 잘 안다. 체험학습을 갔을 때 말똥 냄새로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으니까. 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보겠나?”

말이 묻는 거지, 분명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간에 억지로 끌고 들어 갈 위인이었다. 난 끄덕임 한 번 없이 문 안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오히려 잡아 세우는 건 황제였다.

“안가요?”

“흐음. 이곳 구경은 여기 까지다.”

“예?”

황제는 짧게 이야기 하고 마치 경보대회 라도 나가는 듯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도착한 곳은 흰색과 상아색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깔끔한 인상을 풍기는 주방이었다. 아무리 위생이 생명인 곳이라 하지만 황궁의 주방은 눈이 부실정도로 지나치게 번쩍 거렸다. 바닥부터 찬장, 식기, 갖가지 요리도구들 어느 것 하나 흠집이 있다거나 오염된 것이 묻어 있지 않았다. 매일 매일 공을들여 관리한 티가 났다.

“여기는 주방.”

“말 안 해도 알아요. 황궁 사람들은 참 대단하네요. 이 분들은 돈 진짜 많이 벌어야 돼.”

“끝인가?”

“...더 미사여구를 붙여서 감상을 만들어 내야 하나요? 저 그런 재주는 없는데요.”

황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고... 어딘가 즐거워 보이면서도 또 가만보면 아닌듯한 아주 애매한 모습이다.

주방에 도착해 제대로 된 구경을 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황제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녀들의 방, 청소도구함, 문서저장고, 황궁기사단의 땀냄새 나는 훈련장 까지 모조리 돌아 보았다. 먼저 지친 것은 당연히도 나였다. 나는 차가운 복도 한가운데에 철푸덕 주저 앉아 버렸다.

“더 이상은 못 가요!”

“생각보다 체력이 약하군.”

뭐 보태준 거 있냐?! 그보다 나 집에 언제 보내 줄거야! 황궁 안에서 괜한 고생을 한 내 다리를 턱턱 주무르고 있는데 손이 뻗어져 온다.

“지금 고문하는 거죠.”

“푸흡.”

어라? 이 황제 봐라. 아니라는 말은 안하네? 내가 가만히 황제를 올려다 보고 있기만 하자, 황제가 잠시 고민하며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장소를 가지.”

“마지막? 진짜 마지막이죠?”

“그래.”

지금까지 보아온 결과 워낙 막무가내인 사람이라 이 말을 쉽게 믿어도 되나 확신이 가지 않았다.

“마지막 장소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가자.”

그가 하나의 제안을 더 해온다. 내가 원하는 곳?

“더 돌아다니기도 지쳐 죽겠는데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리가… 아!”

“있군.”

그래, 한 곳 있다. 소설 책에서 황제와 성녀의 밀회 장소로 자주 등장하던 작은 호수. 거긴 정말 반드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고요한 호숫가 위에서 묘사된 성녀와 황제의 키스신은 독자들의 심장을 제대로 저격하여 설렌다는 댓글창만 페이지 수를 한참이나 넘어가게 만들었었다. 현실에 무뎌졌던 책에 대한 덕심이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난 황제의 손을 마주 잡고 일어섰다. 고운 피부와 대비되는 거칠거칠한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진다.

“아무 곳이나 가능 해요?”

“물론.”

“정말, 정말이죠?”

“어디 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이 곳의 주인이 괜찮다는데 어디든 말 만 해 보거라.”

너 이자식,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난 망설임 없이 이야기 했다.

“폐하께서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곳이요.”

모호한 말이었지만, 황제의 입장에서 듣자면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다. 화려하지만 삭막한 황궁내에 그가 유일하게 안식처라고 생각하는 곳은 단 한군데 밖에 없었으니까. 시종일관 여유롭던 황제의 표정이 굳어져갔다. 으음. 잠시 쫄았다. 얼굴위에 생기가 지워지니 꼭 다른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 곳이나 된다면서요.”

“그래, 그랬지.”

황제는 이후로 말이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성녀가 찾아오는 것 외에는 누구도 그 장소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던 그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 선뜻 호숫가로 안내할 리가 없었다. 황제가 나에게서 등을 돌려 몇 걸음 멀어져 간다. 에이씨, 다 된다고 할 땐 언제고... 나중에 원래의 세계로 넘어갔을 때 그 호숫가를 미처 보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안타까울지도 모르겠다.

“안 오나?”

“네?”

황제가 멈췄다. 멀리서 고개만 돌려 나를 보았을 때 그는 웃고 있었다.

“가자며, 내가 가장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곳.”

“...”

진짜? 정말?! 기대감에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길 잃어도 모른다. 잘 따라와라”

“네!”

황제를 뒤 따라 가는 내내 콧노래가 나온다. 다리 아프기만 했던 황궁 탐방(?)이 드디어 흥미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혹여나 호숫가가 아니라 다른 곳 으로 가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황제의 개인정원으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정말 그 호숫가로 가는 것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이 길이 바로 호숫가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니 말이다.

“와-”

어느 덧 별들의 시간이 찾아오고, 주변이 밤으로 물들어있었다. 어두운 사위 속에서 외로이 자리를 지키는 작은 호수만이 보석을 품은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소설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눈이 부셨고, 크지 않았음에 아늑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 같은 여름밤과 어울리는 청량함도 품고 있었다.

“시시한가?”

“이게 어떻게 시시할 수가 있죠?!”

세상에 나 같은 성덕은 없을 거야. 소설 책에 나온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다니! 감격에 차 이야기 하자, 황제가 멋쩍게 웃는다.

울퉁불퉁한 돌들에 비해 겉 표면이 비교적 맨들맨들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다! 황제가 밤 새 이 돌위에 앉아 호수의 수면을 하염없이 바라 보았던 곳! 난 냉큼 그 돌 위에 소설속 황제처럼 앉아 보았다.

성녀에 대한 사랑에 고뇌 하던 황제의 소설 속 지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크흐- 이 호수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겠지.

“이곳이 마음에 드나?”

“완전요! 여기가 제일 멋져요!”

“...”

목소리가 좀 컸던 것 같은데 아무렴 뭐 어때 지금 내가 신나는데! 그런데 황제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 미소를 거둔 채였다. 게다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아 오히려 이쪽이 더 민망할 지경이다.

난 황제를 못 본 채 하며 가만히 호수 위를 바라보았고,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만히 내 옆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숨 막힐 정도로 어색한 침묵에 더 이상 경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제도 그것을 느꼈는지 갑자기 헛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크흠! 흠! 거기 내 자리다.”

아, 지금 비키라고 계속 눈치 줬던 거? 에라이, 그래 자리 뺏어서 미안하다.

난 바로 옆 돌로 옮겨 앉았다. 황제가 내가 비키자마자 그 자리위에 앉는다.

“...뭐 꼭 비키라는 말은 아니었다.”

“이랬다 저랬다. 까다롭네요.”

“그게 내 매력이지.”

“매력이 다 죽었나… 아, 아니예요. 혼잣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에리나 : 그래서 나 집은 언제감?

머슨 : (빡침 게이지 상승중)

*독자님 : 아, 머슨이 에리나 감금시켰으면 좋겠어요!

작가 : (꼭 반드시 감금물을 써야겠다 다짐하는 작가)

*독자님 : 황제 왕따죠? 맞죠?

작가 :...굳이 말하자면 자발적 왕따...려나요...

황제 : 왜 나를 동정하지?

작가 : (토닥토닥)

*독자님 : 황제 완전 민폐캐릭터예요! 에리나가 집에 가고 싶다잖아!

에리나 : 제 말이 그거예요! 이거 완전 권력남용 아닙니까?!

황제 : 그래, 경치가 아름답군

작가 : 대환장쇼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겨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했던 날씨가 이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네요 독자님들 감기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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