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편
<-- 12. 집들이가 원래 이런거였나요? -->
아비츠가에서 주최한 성대한 연회의 마지막 날. 예정 없던 소란과 범인 없는 침입으로 그야말로 분위기는 아수라장이었다. 모든 혈관에 알코올이 들어찬 아비츠 백작은 상황을 파악할 틈도 없이 인사불성이 되었고, 5층 높이의 창문에서 떨어진 게르니아는 온 몸이 기이하기 꺾인 채로 겨우 숨만 껄떡이는 상태였다.
사병들이 체닌의 방에 들어왔을 때에 에리나와 머슨 그리고 에반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발가벗은 체닌의 몸을 담요로 덮어준 사병 하나가 벌어진 일에 대하여 묻자, 체닌은 저도 모르게 에리나가 쥐어준 쪽지를 손바닥 가장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
“옷 차림이나 성별 정도도 기억 안 나십니까?”
“글쎄 모른다니까?!”
히스테릭 하게 소리치자 사병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술기운으로 사고를 할 수 없게 된 아비츠 백작으로 인해 연회는 어영부영 끝이 났다. 그 누구도 연회의 마지막을 알리지 않았으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게르니아의 모습을 본 귀족들은 놀란 심장을 붙잡으며 자신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휑해진 저택 안으로 의원이 다급하게 게르니아를 치료하고, 체닌은 드디어 그 살을 갉아 먹는 듯한 감옥에서 빠져 나와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다음날. 해가 떠 오른지 한 참이 돼서야 아비츠 백작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젯 밤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보고를 받자마자 자기 컵 하나가 산산조각 나며 바닥을 굴렀다.
“부인 께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누군가 마법으로 잠궈 놓은 방을 강제로 열어, 게르니아를 창밖으로 내던졌는데 그 안에 있던 세자인의 계집이 범인 얼굴을 못 본게 말이 돼?!”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게르니아 시종장이 날아가 버렸다고…”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 방은 오직 게르니아만이 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게르니아한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아니면 전부 튕겨내 버린다고, 아주 치명적인 공격 마법으로 변해서 말이지!”
아비츠 백작 에게 보고를 하던 시종이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뭐야”
“저택 내 마법사들이 보내온 소견서입니다. 문에 걸려있었던 마법이 마력의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뭐?”
아비츠 백작은 종이를 눈 앞으로 바짝 가까이 들이 밀어 읽어내렸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이었다. 문고리에 손이 닿는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쉽게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아무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황궁 마법사들이 온다 해도 절대 해제 할 수 없어! 게르니아가 매일 매일 피를 바쳐가며 강화시킨 마법인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해제가 되겠어!”
쾅! 분노에 찬 주먹이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반란을 사전에 막는 것에 대해 공헌하여 처음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아, 오랜 준비를 걸쳐 열었던 연회가 미스테리한 사건을 남겨 둔 채 끝나 버렸다. 귀족들 입에서 오르내릴 말들은 아비츠 백작가에 대한 긍정적인 친밀이 아니라, 정체모를 침입자로 인한 시종장의 피해와, 보안에 미흡한 아비츠 백작가의 경비 수준인 것이 분명했다.
아비츠 백작은 반드시 그 침입자를 잡아 망쳐버린 연회와 귀족들 간의 입지를 다지는 첫발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에 대한 응징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체닌은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게르니아는 정신조차 돌아 오지 않으니 침입자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법을 겹겹이 쌓아올린 잠금마법 마저 손쉽게 해제해 버리는 의문의 침입자 라니. 아비츠는 그런 고위 마법사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정도는 천신이나 마왕, 아니면 문을 여는 성녀 밖에는 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잠깐-
설마, 아니 그럴리 없겠지만. 혹시... 라는 가정이 아비츠 백작에게 스며들었다. 자신이 말을 뱉어 놓고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떠보인다. 분노로 연신 이마에 못난 주름을 만들어 내고 있던 아비츠의 표정이 변하니 곁을 지키던 시종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비츠 백작은 시종의 걱정에 대답하지 않고 불안한 듯 턱을 쓸어 만졌다.
“...성녀님이 날 배신 할 리 없잖아.”
그렇게 말 하면서도, 머릿속에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성녀 말고는 없다. 라고 끊임 없이 반복 재생 되고 있었다.
*
체닌은 아무도 없는 외로운 방 안에서 힘을 주어 만지면 찢어져 버릴 정도로 잔뜩 구겨져 있던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상황이 급박하긴 했는지 글씨가 괴발개발이다.
‘체닌, 잘들어. 아비츠 백작은 널 죽일거야. 세자인을 갖지 못해도 죽일 거고, 갖게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지. 그땐 쓸모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저 아비츠 백작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서 게다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하고 있다는 적나라한 소리를 듣자, 단단히 쌓아 왔던 마음의 벽 사이사이에 이가 빠져 위태롭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련하게도 에리나가 준 쪽지를 숨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체닌은 필요했다. 약해진 마음을 다시 잡아줄 무언가가. 시종들이 체닌에게 안정을 취하라며 형식적으로 말했지만, 밖으로 나서는 동안에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슬립을 벗어 던지고 단단함이 깃든 검녹색의 드레스로 갈아입은 체닌은 마차에 올랐다. 정말 가고 싶지 않은, 애초에 별 관심도 두지 않았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유지 표시가 되어있는 팻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서자 이렇다 할 건물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황폐한 거리위에 마차가 멈춰섰다.
“기다려. 금방 나오니까.”
드레스를 잡아 올리고 체닌이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머지 않아 저택하나가 이질적으로 눈에 띄었다.
“테론! 테론 아비츠!”
굳게 닫혀 있을 줄 알았던 문이 쉽게 열리고, 먼지 쌓인 카펫에 발자국을 남겨가며 체닌이 저택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에 박혀 있는 거야”
집안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소름끼치는 싸한 공기만이 몸을 휘감았다. 테론 아비츠의 변태 사이코적 행위에 대해 알고 있었던 체닌은 그 행위가 직접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저택에 스스로가 발을 들일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는 테론을 만나려면 이렇듯 직접 찾아 갈 수 밖에 없었다.
에리나 홀든을 죽이려는 자는 누구인지, 너는 왜 연관되어 있는지, 아비츠 백작가문과 연결고리가 있는 건 아닌지 등 체닌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내용이 있다거나, 반대로 에리나가 자신을 이용해 아비츠 백작을 협박하려는 낌새가 보인다 치면 바로 쪽지를 넘길 생각이었다. 게다가, 테론 아비츠 그 욕망에 둘러쌓인 자의 아들이라면, 나약해진 마음을 채찍질 해줄 수 있을거라 고도 믿었다.
그러나.
“우욱-”
그의 집무실 문 고리를 돌리는 순간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올라오는 토악질을 참아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코를 막았다.
“이게 무슨 냄새…”
한번 열려진 문은 체닌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느긋한 속도로 방 안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풀썩- 체닌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겨우 참아 내렸던 토악질은 다시 밀려 올라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우웩-!”
한 참을 개워낸 체닌은 혼절 할 뻔 한 것을 겨우 참고 벽을 짚어 일어섰다. 방 안에는 능글맞게 웃고 있을 테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더기에 파묻힌 그의 역겨운 시체만이 체닌을 반기었다.
구두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체닌은 허겁지겁 저택을 빠져 나왔다. 대기 하고 있던 마부가 지루해 하품을 하던 것을 멈추고 놀라 체닌은 부축했다.
“무슨일이 십니까?”
“다, 당장 출발해.”
“어디로 갈까요?”
“씨발, 어디긴 어디야! 아비츠가 저택이지!”
테론의 시체가 떠올라 체닌은 마차 안에서 자신의 팔뚝을 감싸며 역겨움과 무서움에 몸부림 쳐야 했다.
왜, 왜 죽은거지?
원한 살 만한 일들이 워낙 많은 자라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이상 할 것이 없는 그 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죽어버릴 만큼 호락호락한 자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를 호위하고 있는 사병들은 황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들과 견줄 만큼 실력 있는 자들이었다.
체닌은 아비츠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당장에 아비츠 백작의 방으로 향했다. 테론 아비츠가 살해 당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백자님, 저예요. 체닌.”
평소 같으면 돌아가라 냉정하게 말할 그였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문이 열린다. 그리고 한 발자국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살덩이가 떨어져 나갈 만큼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무슨일을 당했는지 몰라 잠시 멍하니 서있는데, 돌려진 고개와 말리는 시종의 소란스러움 그리고 내뱉어지는 욕설로 인해 깨달을 수 있었다. 뺨을 맞았다는 것을.
“형편 없는 년! 시골에 있는 것을 데려와 호사를 누리게 해 줬는데, 침입자들 머리털 하나 못 봐?!”
“...죄송합니다.”
“네 년 때문에 내 연회가 엉망이 됐어! 우리 가문의 꼬리표에 추잡한 헛소문이 따라다닐 거라고!”
“...죄송합니다.”
의미없는, 진심이 담기지 않는, 하물며 죄송할 짓을 하지도 않았던 자신이 고작 이딴 사과를 하려고 백작을 찾아 왔나?
체닌은 눈을 들어 백작을 올려다 보았다. 분노로 인해 이성이 자리잡지 못한 백작의 눈은 가히 정신병자 같았다.
‘니 아들놈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 넌 이 자리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내 가슴에 칼을 꽂아 넣겠지’
체닌은 무서웠다. 약자는 발톱 한 번 세우지 못하고 얌전히 꼬리를 내려야만 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언을 묵묵히 들으며, 백작을 찾아 왔던 목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체닌에게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이 짐승 앞에선 도저히 이야기 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자려고 누웠다가 독자님의 오타지적 코멘트를 보고 다시 핫스팟과 친구의 노트북을 켜는 작가)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