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편
<-- 10. 연회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 인가요? -->
성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평온해졌다. 질투로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가라앉고 경직되어있던 얼굴 근육이 나른하게 풀어진다. 성녀는 흐트러진 케일의 옷 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오랫동안 케일의 몸 위에서 머물렀다.
“내가 언제나 엘보다 케일 너를 더 따랐다는 걸 기억 하지?”
“그래서 엘이 날 싫어했고.”
“케일은 꼭 좋아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싫어하진 않았어.”
그녀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랬었지, 케일은 그랬었어” 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케일과 엘 그리고 자신. 이렇게 셋이서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릴 때가 가장 신이 나는 그녀였다. 세상을 호령하는 두 남자를 손에 쥔 아찔한 정복감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 따윈 없어”
“낭비? 말좀 예쁘게 해줘 케일. 엘처럼 말이야. 부드럽고, 상냥하게.”
케일이 성녀의 손을 쳐내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성녀의 한쪽 입꼬리가 불쾌해진 기분을 숨기지 않고 치켜 올라갔다. 멀어져가는 케일의 뒷 모습을 보며 성녀는 억지로 바들거리는 눈을 감으며 크게 호흡했다. 솟구치는 화를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분노의 대상은 케일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에리나였다.
성녀는 연회를 즐기는 내내 케일에게 집중했다. 자신의 시선이 분명히 느껴질 텐데도 그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였다. 잠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껴 인사를 받고 있는 사이에 케일의 모습이 사라졌다. 넓은 연회장을 모조리 살피는 것은 물론이고 테라스의 커튼까지 들추어 보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잠깐만요.”
“서, 성녀님?!”
시종장 게르니아 였다. 그녀는 남 시종과 이야기하던 것을 미루고 냉큼 성녀를 향해 몸을 돌려 인사했다.
“뭘 가만히 서있니? 어서 인사드리렴. 성녀님이시다.”
“에반 프리차일드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괜찮아요. 물어볼 게 있어서요.”
게르니아는 에반에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라며 이야기 한 뒤 그를 보냈다.
“무슨 일이시죠?”
“한 시종을 찾고 있어요. 신전에서 절 만나고자 했던 신도인데, 고민하던 일이 잘 해결 되었나 걱정이 되어 참을 수가 없네요. 방금 전에 잠깐 마주쳤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거든요.”
“마음씨도 고우셔라. 연회장에서 까지 신도 생각뿐이시라니. 그 신도는 참 복받았네요. 이름이 뭔가요?”
“에리나 홀든이요.”
게르니아가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어 이름을 확인했다. 분에 넘치게 잘생긴 남편을 둔 건방진 아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였다.
“양파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네요. 원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양파창고로 도착한 성녀는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역시나 케일은 에리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케일이 에리나의 몸을 감싸 안은 채 였다. 당황한 에리나가 주절 거렸으나 그 말이 귀에 들릴리 만무했다.
‘참아. 여기서 화를 내는건 미련한 짓이야. 어차피 버려질 아이.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아.’
“길을 잃었어요. 홀 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케일이 거절하면 어쩌나 초조 하고 불안한 마음이 일순 스쳤다. 그러나 걱정과는 다르게 케일은 아주 흔쾌히 성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래, 역시 저 계집보다는 나인게 분명하지.’
혼이 나간 듯 멍한 에리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토록 재미있을 수가 없다.
‘안쓰럽긴. 여전히 망상에 사로잡혀 있구나.’
성녀는 케일을 데리고 나와 사위가 조용한 테라스로 이끌었다. 감정 없이 메마른 케일의 눈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키스해 줘.”
“난 엘이 아니야.”
“그래, 케일이라서 말 하는거야. 어서”
제 아무리 신실한 성자라도 단번에 입술을 부딪혀 올 듯 유혹적인 모습이었다. 반쯤 감긴 촉촉한 눈동자와 심장을 울리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짙게 깔린 밤하늘과 어우러져 자극적이었다. 그러나 케일은 한 발자국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아, 역시 케일은 날 안아주지 않아. 왜 엘처럼 날 안지 않는거야? 내가 아름답지 않아?”
“인간의 기준이지.”
성녀가 케일을 향해 등을 지고 밖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금발을 헤치고 옅은 실타래가 휘날리듯 머리칼이 나부꼈다.
“고마워, 길 안내를 거절하지 않아줘서.”
케일은 대답도 없이 테라스의 커튼을 열었다. 그때 성녀의 목에서부터 강한 울림이 터져올랐다.
“가지마.”
“바빠”
그녀의 가녀리고 하얀 팔이 케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만 있어 줘. 어렸을 땐 내가 마왕성으로 가지 말라고 칭얼대면 한 시간이도 두 시간이고 천계에 남아있어 줬잖아.”
케일이 팔을 풀어내고 그녀의 어깨를 마주 잡았다.
“내가 널 죽이는 상황은 만들지 마. 미약한 온정으로 널 살려둔 거니까.”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성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야?
“주, 죽이다니, 나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웃음이 나온다.
“날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한 건 케일이야. 날 반려로 맞이하겠다 했어!”
“그땐 몰랐으니까.”
“뭘? 엘이 날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원하는건 엘이 아니라 케일이라고!”
인간들에게 혼인이란 인생의 큰 획이 그어질 만큼 중대한 경사였으나 마왕에게선 아니었다. 불사의 몸이니 대를 이어 나가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강한 힘을 가졌으니 결혼으로 세력을 키울 필요도 없었다. 마왕에게 결혼이란 어떠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내킬 때, 마음 가는 상대와 하는 아주 가벼운 의미인 것이다. 때문에 반려가 누가 되든 케일은 별 관심이 없었다. 가끔 레이넌이 ‘마왕님을 쏙 빼닮은 여자아이가 보고싶네요!’ 라고 주책 맞게 지껄이던 걸 빼고는 그 누구도 마왕에게 혼인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성녀 즉 벨라가 케일에게 반려의 자리를 비워 둘 거면 차라리 자신에게 달라 라며 요구 했고, 케일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겠다 약속했다. 때문에 벨라를 위한 각인의 증표를 자신의 마력을 쏟아 부어 만들었으나 그것이 엉뚱하게도 에리나에게 흡수되어 들어가 버린 것이다.
성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뺨을 타고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어서 증표를 나에게 줘. 약속을 지켜 줘"
"엘에게나 부탁해 봐."
"말 했잖아, 엘은...!"
성녀의 말이 뚝 멈추었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눈을 벅벅 비비더니 그토록 매달리던 케일을 밀치고 홀린듯 달려갔다.
케일의 뒤엔 밤의 시간이 닿지 않는 듯 하늘 보다 더 위에 존재할 하얀 빛으로 짜아내린 백발의 사내가 서있었다. 성녀가 달려오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려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내가 뭐? 벨라."
품에 안겨있는 성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반면 성녀의 뒷 머리를 쓰다듬는 엘의 손길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 작품 후기 ==========
*분량 너무 작아서 죄송합니다 ㅠ 조금이라도 올려보려는 작가의 노오력...*
*독자님 : 첫사랑이미지에 사기 잘 당할것 같은 황제 ㅋㅋ 에리나 제대로 봤네요!
작가 : 이쯤 되면 관심법
*독자님 : 마성의 에리나가 나중에 천신도 홀리나요?!
작가 : 헤헤 지켜봐 주세영ㅋㅋㅋ
*독자님 : 오늘밤도 오시나요?(채근해본다.)
작가 : (코멘트를 확인한다.) (오려고 노력한다) (손이 너무 느려 죽고만싶은 작가)
*독자님 : 나는야 머슨파! 머슨 나와라 오바!
작가 : 와..머슨 부럽다 머슨 파도 생기고 8ㅅ8!
*독자님 : 황제의 손수건을 에리나가 가지고 있는걸 본 머슨이 딥빡해서 감금루트?!
작가 : (독자님의 마음을 충족시켜드리지 못해 사과의 말씀을 미리 전하는 바입니다.)
*독자님 : 오! 업뎃 떴길래 공지인줄 알았는뎅 헤헷, 아 설마 오늘밤 안오시는건가요?
작가 : 들고오기도 민망할 정도의 용량으로 왔습니다.(숨는다.)
*독자님들 ㅠㅠ 잉 제가 바빠 글을 자주 올리지 못하는 요즘같은 때에도 변하지 않고 관심가져 주셔서 진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ㅠㅠ사랑 쪽쪽
*게으르거나 귀찮아서 안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는 작가 였습니다. 후...
크리스마스때 애인도 없으니 글이나 쓰면 좋겠건만 그때도 일입니다.훗. 인생뭐없네용
*선작,추천,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