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은 18세 미만 구독불가 였습니다-55화 (55/170)

55편

<-- 9.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나요? -->

라는데...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오빠가 살해당한 충격은 2년이라는 시간 만으로 덤덤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기에는 너무도 짧았다.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아직도 목소리가 떨리면서도 그녀는 의연하고 객관적으로 오빠의 죽음을 인정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정작 머슨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케일의 앞에 서면 나 자신을 잃어가요. 자애로워야 한다, 포용해야 한다, 어진 신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귀에 박힐 정도로 수 없이 들어 왔던 말들이 그의 앞에서는 심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버려요. 별 거 아닌 일에도 투정을 부리고 싶고, 유치한 말장난을 주고 받길 원하는, 평범한 여자가 되어버리죠. 케일의 관심이 오로지 저에게만 쏟아졌으면 하는 욕심도 피어나고요.”

성녀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몇 마디 나눠보지 않은 나에게. 이야기 하는 성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것처럼 당황해 하는 건 나였다. 소설 속에서도 성녀가 마왕에게 이런 진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성녀는 자신의 맡은바 소명을 다하길 원했고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건 마왕쪽이었지 성녀가 아니었다.

내가 성녀의 말에 어떠한 반응도 없자, 성녀가 볼을 붉히며 입을 가렸다

“...곤란한 말을 해버렸군요. 사제님께는 비밀이예요. 성녀란 누구와도 이어질 수 없는 신에게 종속된 몸이랍니다. 하물며 마왕은 더더욱”

성녀가 어느새 비어버린 내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반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던 성녀의 차는 이미 식어버린지 오래다.

“이제 에리나양이 말 할 차례예요. 저를 왜 만나고자 했는지에 대해서.”

“말했듯이 도움을 받았어요. 타국에서 온 지라 적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로 머…, 아니 마왕님은 의지가 되었죠. 길 안내 라던가… 아주 소소한 것들 말이예요.”

평소처럼 머슨이라 칭하려던 것을 재빨리 정정하여 이야기했다. 성녀는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빛내며 손가락을 교차시키고 그 위에 자신의 턱을 받쳤다.

“은혜라고 해야 하나? 마왕님께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떠나야 해요. 여기에 대해서 성녀님께 도움을 구하고자 하고요. 아주 절실하게.”

“보답?”

“보답이랄 것도 없어요. 그냥 예전처럼, 쭈욱 그래 오셨던 것처럼 성녀님이 저 대신 마왕님 옆에 계셔주시면 돼요.”

“의미를 모르겠네요. 게다가 케일은 인간을 자신의 옆에 두지 않아요. 저 또한 말이죠.”

“아니요. 지금의 마왕님은 좀 달라요. 꼭 옆에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은 성녀님이여야 하구요.”

“푸흡. 아, 죄송해요. 계속 얘기해요”

성녀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려 이를 앙문 채 버티고 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염치 없지만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어요. 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음… 텔레포트 라면 케일이 저보다 뛰어날텐데요?”

“아뇨. 성녀님만 저를 돌려보내주실 수 있어요. 때가 되면, 반드시 부탁해요.”

성녀의 눌러내리던 입꼬리가 버티지 못하고 크게 휘었다. 예상처럼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채워졌다. 재밌는 건 그녀 혼자였다.

“에리나 양. 케일을 사랑하죠?”

어떤 맥락에서 이 질문이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난 그녀의 웃음에 동조하지 못하고 소리가 잦아질 때 까지 기다렸다.

“케일이 무슨 변덕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찰나의 호의를 착각해선 안 돼요 에리나양.”

“무슨 말이죠?”

성녀의 얼굴에 웃음이 싹 걷혔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변화에 소름이 끼쳐 나도 모르게 찻잔을 꽉 쥐었다. 성녀는 아주 중차대하고 비밀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 마냥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동시에 눈빛에는 걱정이 스며들어있었고, 그 너머에는 상대방은 바라지도 않는 동정심도 깃들어 있었다.

“에리나 양은 지금 망상에 빠져 있어요. 케일이 에리나양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하나. 에리나양이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 처럼 본인이 없으면 마왕의 삶이 무너질 거라는 것 둘. 사실 자신이 신계를 뛰어넘어 다른 공간에서 온 존재가 아닐까 라는 것 셋. 뿐만 아니라 내가 케일의 옆에 쭉 있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죠?”

성녀가 친히 손가락 까지 펼쳐가며 설명했다. 그리곤 찻잔을 부여잡은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린다.

“의사를 소개해 줄게요. 현실로 돌아와요 에리나 홀든양.”

비꼬거나 놀리는 투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오히려 그 모습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허무맹랑한 것일지 몰라도 한 순간에 사람을 환자로 단정 지어 버리다니. 기가 찼다.

“기분 나빴나요?”

“몰라서 묻는 거 아니죠?”

성녀가 당황해 하더니 날 달래려는 말을 찾으려 눈을 굴린다.

“난 케일에 대해 아주 잘 알아요. 그 누구보다도요. 에리나양이 아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망상 따위가 아니라 모두 진짜예요.”

“에리나양. 당신이 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맞아요. 그래요, 난 케일을 아주 오래 봐왔고 그의 옆에 있었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전 지금의 마왕님 상태에 대해 얘기 하고 있는거예요.”

“어쩌다 잠깐 같이 있게 된 에리나 양과, 6살 때부터 알고 지낸 저 중에 누가 더 케일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6살이요?”

“케일이 절 키웠으니까요.”

“...뭐라구요?”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누가 누굴 키워? 소설책 어느 부분에서도 이러한 설정은 없었다. 성녀 세르데벨라를 키운게 마왕이라니?! 생각해보니 소설 책에서 성녀와 마왕의 만남이 다루어지진 않았다. 도입부부터 마왕은 성녀를 사랑했다로 시작했고 둘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주신께서 절 선택하시고, 제 양육을 케일과 엘에게 맡겼죠.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주신 께선 엘에게 명하셨고, 케일은 가끔 엘을 도와 저를 돌봐주는 정도였답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는 개와 고양이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저에 관해서는 부부처럼 상성이 잘 맞았어요.”

성녀는 그날을 추억하듯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기서 말하는 ‘엘’이란 천신 엘트리온 므뉴 그라시엘을 뜻하는게 틀림없었다. 소설 책 에서도 성녀가 그를 엘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제가 18살이 되던 해에 엘과 케일의 보살핌은 끝이났지만 그것은 공식적인 것이지 그들과의 만남이 끊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신전으로 보내지고 난 후에도 보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언제라도, 어디라도 찾아와 주었죠. 제가 산 길지 않은 세월의 내내 케일이 있었어요. 에리나양이 바라보고 있는 케일은 진짜가 아니예요.”

부정할 것이 있지만 맞는 말이었다. 내가 했던 이야기는 망상이 아니나 내 옆에 있는 건 마왕이아니라 머슨이니까.

“마왕이… 당신을 키웠다고요?”

“그러다시피 했죠.”

하, 막장드라마가 따로 없다. 이게 말이 돼? 자신을 키워준 혹은 자신이 키운 사람과 몸을 섞었다니.

소설을 섭렵한 나는 자만에 차 있었던 걸까? 3자의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신이라도 된 듯 착각하고 있었구나. 지금과 같이 내가 모르는 강력한 사실 하나가 떡하니 놓이자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전부를 믿을 수 없게 돼버렸다. 이 세계에서 살아 남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할 말을 잃고 흐드러지게 미소짓고 있는 성녀를 똑바로 마주봤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기울어진다. 어질- 앉은 채로 상체가 휘청 였다.

“...괜찮으세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런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현실이라 굳게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은 헛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머리가 복잡할 거예요. 이해해요.”

그 따위 것 때문에 이러는게 아니야.

성녀는 내 앞에서 안절부절 하더니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마에 손을 얹더니 그녀가 화들짝 놀란다.

“열이 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평소보다 일도 덜했고, 몸 상태도 괜찮았다. 그러나 성녀의 말대로 뒷 목이 뜨거워 지는 것이 느껴졌다. 성녀의 발언 때문에 충격을 받긴 했으나 이렇게 한 순간에 전신을 태울 듯 뜨거운 열이 피어난다는 것은 이상했다.

“에리나양.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성녀가 황급히 통 유리창으로 달려갔다. 잠금쇠를 풀자 미약한 자연의 공기가 내부로 흘러들어온다. 괜히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으나 나아지는 건 없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나가는 게 더 빨라요. 바래다 드리고 싶지만, 이 사실을 알면 사제님이 앞으로 신도들을 일체 만나지 못하게 하실 거예요. 길을 따라 쭉 가로질러 가세요. 그 밑에 판자로 빠져나갈 구멍을 가려놓았어요. 물론 안전하답니다. 제가 매일 신전 밖으로 빠져나가는 비밀통로 이기도 하고요.”

알았어, 그만 말해.

성녀의 목소리가 머리를 더 어지럽게 하는 것 같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비틀 비틀 정원으로 걸었다. ‘탈칵’ 뒤에서 유리문이 잠기는 소리가 이어 들린다. 성녀의 말대로 정원을 따라 걸으니 두껍고 거대한 담 아래에 작은 개구멍이 보였다. 몸을 숙여 지나가야 하는데 그대로 바닥에 코를 박을 뻔 했다

“흐윽”

땅에 손을 짚고 엉금엉금 기어 나오자 구불 구불한 원형 계단이 나타났다. 시야가 마구 흔들리며 발을 뻗기가 힘들었다. 난간을 붙잡고 눈을 또렷하게 뜨려 노력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는 넘어지지 않으려 손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계단의 마지막 칸이 보였다.

그때였다.

“우욱”

배가 용암을 삼킨 듯 뜨거워 지더니 헛구역질이 시작됐다. 타액 말고는 입 밖으로 뱉어 지는게 없었으나 몸은 체내의 무언가를 빼내려 기를 쓰고 가슴을 눌러댔다. 핑- 세상이 회전하는가 싶더니 눈에 물기가 차오른다.

왜 이러지?

========== 작품 후기 ==========

*에리나 정신차려!

*독자님 : 후후, 에리나는 성녀의 일을 다 알고이찌요!

작가 : 아니었음미다.

에리나 : 아 뒷골.

*독자님 : 양파껍질가는 아저씨 가 생각나요!(그릭) 에리나의 양파를 가져가 주다니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인가요?

작가 : 양파 : 뜻밖의 원빈.

*독자님 : 성녀가 이중인격인가요?

작가 : 아닙니다 그냥 나쁜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당! 에리나 시점으로 쓰려니 미화되어 보이지만 (절레 절레)

*독자님 : 작가님! 글 쓰는데 권태기도 오고 한답니다. 이럴때 독자의 응원이 힘이 되죠!

작가 : 맞습니다! 진짜 제 활력소8ㅅ8! 사랑해요 뽀뽀뾰쮸ㅉ쮸쮸쮸쮸ㅠ쮸쮸쯉(돌 아얏)

*독자님 :재탕하면서 느낀건데 스킨쉽하면 진짜로 정기가 나눠지나요?

작가 : 정기에 대한 언급을 제대로 안해서 혼란이 있으 실 것 같은데요, 나중에 머슨 기억 안잃은거 까발려지고 그 부분에 대해 나옵니다!

*케일 : 열심히 키워 놨더니 요물이 되었어.

에리나 : 마왕이 키웠으니 어련할까

*선작,추천,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뿌로롱님 감사합니다!

*확인 못하고 올려요 8ㅅ8 차후 수정하겠습니다. 앗 그리고 ~로써 ~로서 맞춤법 지적해주신 독자님의 코멘트가 사라져서 동공지진!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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