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편
<-- 9.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나요? -->
머슨의 낯선 냉대는 하루 종일 계속 되었다. 아비츠 백작가로 들어가기 전 헤어지기 싫다고 징징거리며 시간을 잡아 먹는 행동 따위도 없었다. 여관에서부터 시작해 내내 말 한마디 없이 걷다가 정문 앞에서도 깔끔하게 흩어지며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항상 에반에게 머슨을 던지듯 맡겨놓고 뛰어 지나갔던 길목인데 오늘은 쓸데없이 평화롭다.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 내릴 때 마다 머릿속에는 그 만큼의 걱정이 쌓여갔다. 머슨이 나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마다 토라지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이번처럼 입을 꾸욱 다물고 눈 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적은 처음이었다. 자기 딴에는 내가 저를 믿지 못하고 밀어낸다 생각하여 단단히 삐친 것으로 보인다. 기분을 풀어주려 목을 가다듬고 평소 보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어조로 머슨의 이름을 불렀으나, 머슨은 ‘응’ 이라며 감흥도 없이 냉랭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 대답이 너무도 쌀쌀 맞아 조금은 애교를 부려 보려던 마음에 냉수가 퍼부어진 듯 싹 식었다.
그렇게 까지 화 날 일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인데. 세자인에서도 그 정도의 외출은 흔하게 있었다. 언제 까지 그렇게 토라져 있을 거야? 라고 빽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막상 풀이 죽어 기운 빠진 머슨의 모습을 떠올리면 차마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후... 안 그래도 자기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것도 서러운데 내가 되려 화까지 내고 있으면 얼마나 속상할까.
“양파 속 까지 다 벗겨 내리면 안 되지!”
움찔- 등 뒤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몸을 떨었다. 하마터면 거친 칼날이 엄지를 스칠뻔 했다. 그리고 난 내 발 밑에 우수수 떨어져 있는 양파의 하얀 속 살들을 보았다. 맙소사. 머릿속이 머슨으로 가득 차 내가 벗기는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잠시 정신을 빼 놓고 있었네요.”
“어디 아픈건 아니고?”
“네, 멀쩡해요.”
과장되게 하하 웃자, 그릭 아저씨가 오늘 할당량의 양파 무더기를 자신 쪽으로 가져갔다.
“쉬엄 쉬엄 해.”
확연히 줄어든 양파를 보고 괜찮다며 그릭 아저씨를 말렸으나, 오늘처럼 집중을 못 할 때 괜히 애꿎은 양파만 버린다며 기어코 내 할당량을 가져간다. 난 그릭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일을 마치고 나오자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과 하늘의 경계에 은은한 주황빛이 퍼져갔다. 신기하게도 노을을 바라보면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밥 먹을 시간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배꼽 시계처럼, 고단한 하루가 끝이 났다는 것을 노을을 통해 몸이 확인하기 때문일까?
“머슨, 고생했어.”
“에리나도”
머슨이 형식적으로 답한다. 그가 긴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나가자 내가 뛰어 머슨의 앞길을 막아 세웠다.
“언제 까지 그럴건데?”
화를 내고자 한 건 아닌데, 내 의도와는 다르게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머슨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 보다가 손을 움직인다. 그 자연스럽고도 느긋한 동작에 나도 모르게 온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관자놀이 옆부터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나 싶더니 무언가 떼어낸다. 양파껍질이었다. 난 머리를 마구 휘저어 그것들을 툴툴 털어냈다. 한 두 개가 아니었던지 어깨 밑으로 살랑 거리며 껍질들이 떨어 진다.
“머슨, 나랑 평생 얘기 안 할거야?”
“...”
“네가 그렇게 나와도 내 마음 안 바뀌어”
내가 말 하는데도 머슨은 여전히 입을 다문채로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난 머슨의 팔을 치워내고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하지 않을 거지?”
“...”
“그래 좋아. 넌 곧바로 여관으로 가. 난 따로 들를 곳이 있으니까.”
머슨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적안이 한참이나 내 얼굴위에 머물더니 아주 어렵게 떨어진다. 머슨이 등을 돌려 나와는 반대되는 길목으로 걸었다. 멀어져 가는 익숙하고도 널따란 등을 바라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여린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빨리 다녀 올게.”
허약한 체력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신전으로 전력질주 했다. 신전 앞에 도착하자 예의 그 엄청난 계단에이 보였다. 손 까지 이용하여 네 발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여 헉- 헉- 고지가 보일 즈음에 육중한 신전 문이 열리더니 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느린 반주의 성가가 울려 퍼지자 딱히 종교는 없었음에도 복잡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는 것을 느꼈다.
“가만, 지금 미사 끝난건가?”
망할. 오늘 기회도 날려 버릴까 싶어 초인적인 힘을 발휘 해 다리를 빨리 움직였다. 사람들 사이 사이를 파고 들어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신도님?”
“하아, 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사적으로 옆을 바라보는데 어딘가 익숙한 모습의 사제님이 나를 부른다.
“아! 지난 번에 그…”
일주일 전에 신전 앞에서 마주쳤던 늙은 사제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성녀님이 기다리십니다. 가시죠.”
“저를요?”
“예.”
뜻밖의 상황이었다. 약속 없이 무작정 찾아 온 거라 만나달라고 일방적으로 부탁하려 했건만 성녀쪽에서 오히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얼떨떨한 발걸음으로 사제님의 뒤를 따랐다. 긴 복도를 따라 얼마나 걸었던지 신전 깊숙한 곳 까지 들어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신전 기사들이 부쩍 많아 진 것을 보아 성녀의 개인 공간이 있음직한 곳이라 생각되었다. 담이 첩첩이 쌓여 있는 곳을 지나 드디어 사제님의 발이 멈추었다. 상아색의 복도 한 면에 오롯이 달려있는 단 하나의 문 앞이었다.
“들어가시지요”
“노크도 없이요?”
내가 망설이자 사제님이 대뜸 기다란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아니 이사람이! 마음의 준비는 하게 해주세요!
커다란 통유리창 앞에 달빛을 등지고 있는 성녀가 보였다. 마치 동화속에 한 장면처럼 그 뒤에는 아담한 호수를 낀 정원이 있었고 전신을 둘러싼 하얀 성의를 입고 있는 성녀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공주님 같아 보였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성녀는 익숙하게 나를 티테이블 위로 안내했다. 등 뒤로 문이 닫히고 이 공간에 나와 성녀 단 둘만 남겨졌다.
“반가워요. 세르데벨라 르네예요.”
“에리나 홀든입니다.”
내밀어진 손을 마주잡자 부드러운 살의 촉감이 느껴졌다.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붙잡고 있고 싶을 정도로 신경을 자극하는 피부였다. 그녀는 눈이 부시게 고왔다.
“이 곳에 오는 동안 사제님이 고리타분한 질문은 하지 않던가요?”
“아니 뭐, 신전 구경하기 바빠서 대화랄 것도 못했네요.”
“그렇군요. 가끔 사제님이 피곤할 정도로 틀에 박힌 충언을 하셔서, 괜히 신도님을 불편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걱정했답니다.”
“전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성녀가 다행이라며 웃자 무겁고, 엄중하게 느껴졌던 공간의 분위기가 밝게 환기되었다.
“사제님이 다 저를 생각해서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나쁜 분은 아니랍니다.”
“네, 그래 보여요.”
성녀가 붉은 꽃잎이 드리워진 하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능숙하게 옷 소매를 정리하여 차를 대접하는 게 의외였다. 풍기는 이미지로만 봐서는 고상한 공주님 같아 보이는데, 찰나의 대화를 통해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소탈하고 수더분한 성격이었다. 하긴, 소설 책에서도 신전 안에만 갇혀 있는 것이 싫어서 이곳 저곳 모험을 하러 돌아다니고, 한 번은 용병길드 사람들과 친해져 어울리다가 사건에 휘말려 큰 일을 당할 뻔 했을 때 마왕 케일하르츠가 구해주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여주인공의 모습이지.
“드세요. 향이 아주 좋답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에서 레몬향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덥지근한 날씨에 전속력으로 질주 까지 한 지라 얼음 동동띄운 냉수나 들이키고 싶었다. 난, 예의를 생각하여 억지로 뜨거운 차를 삼켰다.
별 다른 말 없이 성녀는 가만히 내가 차를 홀짝 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입술에 곡선을 그리며 깊게 웃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어요.”
올 것이 왔구나. 난 찻 잔을 내려 놓았다.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케일에 관한 건가요?”
성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현자의 모습으로 내가 신전에 올 것을 알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안다.
“네”
“에리나양의 얼굴을 기억해요. 케일에게 안겨 있었던 모습도.”
그렇지 기억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2년 만에 재회한 사랑을 나눈 남자가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케일과 무슨 관계인지 물어봐도 되는 건가요?”
여태 자애롭던 성녀가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초조해 하면서 머뭇거리는 말투가 그러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지만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만 또르르 굴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성녀의 얼굴이 불안으로 가득 차는게 보였다. 그것을 확인했음에도 머슨… 아니 마왕 케일하르츠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섣부르게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말이 튀어나오질 않는다.
“...제가 도움을 좀 받았어요. 지금도 받고 있고요.”
“케일이 마치 은인 같은 사람이라 이건가요?”
“뭐, 비슷해요.”
성녀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래도 신기해요. 저 말고 다른 인간에게 관심을 주다니. 케일에게는 오로지 저 밖에 없었거든요.”
소설 책을 통해 읽어서 아주 잘 알고 있지.
“케일이 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지는 않던가요? 아무거나 좋아요. 평소에 하지 않았더라도 그 날 절 마주쳤던 일에 대해서라든지…”
그런게 있을리 없었다. 오히려 내가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가 “나에겐 오지 에리나 뿐이야” 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건 성녀가 바라는 것이 아닐테니 굳이 얘기 해 줄 필요는 없었다. 성녀의 간절한 눈빛에도 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이해해요. 그도 내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했을 테죠. 내 오빠를 죽였으니”
말에 가시가 있었다. 따끔 아파올 정도로 뾰족한.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녀가 이해한다 말한 내용도 틀린 것이었다. 머슨은 단순히 기억이 없어서 성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라 성녀의 오빠를 죽였다는 사실 조차 망각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성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오빠는 마법사를 동경하던 이였어요. 그러나 마력은 선천적인 것이고, 흑마법은 금지되어 있으니 재능이 없는 오빠가 마법을 부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이었죠. 그러다 마족의 신체를 먹으면 마력이 생겨 난다는 말에 혹하여 그런 끔찍한 짓에 가담한 거겠죠. 이해해요. 동생으로서, 인간으로서. 그러나 동정한다 해서 죄가 사라지진 않아요. 이건 명백하게 오빠의 잘못으로 일어난 참사죠. 케일을 탓 할 순 없어요.”
========== 작품 후기 ==========
*언제나 생각했던 대로 글이 써지진 않는 것같아여 8ㅅ8 오늘 분량에서 성녀 에리나 대화씬을 끝낼 예정이었는데 길어지고...또 길어지고...
*독자님 : 저도 양파 갈릭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작가 : (동지가 생겨 기쁜 작가) 같이 연습하죠. 양파, 어니언. 양파, 어니언.
*독자님 : 벨라도 빙의녀 인가요?
작가 : (갈등. 독자님을 혼란에 빠트릴 것인가?!) 아닙니다. (그럴 성격이 되지 못했다.)
*독자님 : 작가님 정주행 하고 왔어요 쓰담쓰담해주세요!
작가 : (물빨핥)
*독자님 : 아싸 황제가 섭남이다! 벨라한테 가는 남자 모두 끊어버려라~
작가 : 아직 한명남았다.(아저씨 원빈st)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 주신독자님들 감사합니다^^!!
*Rachel04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소설 속 계절은 늦여름이긴 하나 여름인데, 뜨거운 차를 대접하는 벨라. 이년이!! 고도의 엿먹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