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편
<-- 9.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나요? -->
“또 황성에 다녀오신 겁니까?”
늙은 사제가 제 자식에게 탓하듯 걱정이 어린 투로 물어 오자 성녀 세르데벨라는 하얀 이를 보이며 살며시 미소 지을 뿐이었다. 온 몸을 가리는 성의가 어깨 밑으로 흘러 내렸다. 지고하던 성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볼륨감있는 나신을 뽐내는 매혹적인 여성이 나타났다. 신실한 늙은 사제는 그러한 벨라의 모습에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으며 얇은 슈미즈를 건냈다. 흰 천 위에 대비하여 검정색으로 성녀를 상징하는 문의 모양이 넥 라인 밑에 자수되어 있었고 옷을 입었음에도 성녀의 몸의 윤곽이 실루엣으로 아슬아슬 하게 드러났다.
“성녀님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신자님 한 명이 신전 앞에서 성녀님을 만나 뵙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런… 잘 타일러서 보냈나요?”
벨라가 안타까운 눈을 하며 물었다. 늙은 사제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성녀를 안심시켰다. 성녀를 만나고자 하는 신자의 수가 몇 명이든 벨라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지치고 힘이 들법 한데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새겨 들어주며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며칠 밤이 지나도록 신자들의 수가 끊이질 않자 성녀가 쓰러질 것을 우려하여 신전측 에서 결국 만남을 제재시켰다. 그러나 아주 간절히 성녀를 만나고자 하는 신자들은 미사가 다 끝난 늦은 밤, 혹은 모두가 잠이 든 차가운 새벽이라 할 지라도 신전 앞에서 성녀를 기다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신자들 정도는 만나게 해달라며 벨라가 직접 부탁하자 신전 측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존중했다.
“다음 미사 때 제가 알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성녀님과 비슷한 또래거나 조금 더 어린 여신자였습니다.”
“무슨 걱정을 안고 저에게 조언을 구하려 했을 까요?”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신전을 비우는 것을 자제하시면 됩니다.”
성녀가 빙그레 웃으며 침대 위로 사뿐히 앉았다.
“저는 문을 열어요. 그러니 이 신전 안에 아무리 가두려 해도 소용없어요.”
“그런 뜻이 아니…”
“자자,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신께선 병들지 않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만 생명을 늘려주시진 않는답니다.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우리.”
늙은 사제의 잔소리가 시작되려 하기 전에 벨라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사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못마땅한 낯으로 벨라를 바라 보았지만 딱 거기까지 였다.
“저를 찾아왔던 신자의 생김새는 어떻던가요?”
“키는 성녀님 보단 작은 듯하였고, 행색이 남루한 것을 보아한 것을 보면 가난에 시달려 찾아온 듯 보였으나, 또 얼굴을 보면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적당히 기름이 도는 혈색 좋은 피부와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활기가 들어차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절 찾아온 신자들이라면 볼과 눈 밑이 푹 꺼지고 입술이 메마른 자들일 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사랑 때문 이려나?”
벨라는 흥미로운 퀴즈를 풀 듯 검지로 매끈한 뺨을 툭툭 건드리며 고민해 보았다. 사제는 벨라가 꺼낸 추측에도 고개를 저어보였다.
“스쳐 지나가듯 본 게 전부이지만.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은 늙은이의 안목으로 보았을 땐 오히려 사랑받고 있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요? 또, 또 다른 것 없어요? 그 신자에 관한 것 말이예요”
신자에게 관심있거나 해서 열성적으로 물어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늙은 사제의 잔소리를 누르고, 따분한 신전 안에서 유일한 여흥을 즐기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듣는 것. 그것만큼 벨라의 정체성을 또렷이 해주는 것은 없었다.
“흐음… 머리가 분홍빛이었다는 것 외엔…”
“잠깐만요.”
연신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웃고 있던 벨라가 확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갑작스레 변한 모습에 편안하고 여유롭게 그 날을 떠올리며 이야기 하던 사제도 몸을 굳히곤 성녀에게 집중했다.
“불편하신 데라도?”
“저와 비슷한 또래에 머리가 분홍색이였다 구요?”
“예. 혹시 일면식이 있는 신자님입니까?”
벨라는 유독 신경 쓰이던 한 명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날에 마왕 케일하르츠의 품에 안겨있던 그 분홍머리여자. 벨라의 눈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그렇다고 이 감정이 분노는 아니었다. 그냥 단지 거슬릴 뿐. 어차피 마지막에 케일의 품에 안겨 있는건 벨라 자신일 테니까. 그것에 대해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마왕 케일하르츠는 성별을 떠나서 어떤 인간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인간이 바로 자신 세르데벨라 르네다.
“한 번 본 기억이 있네요. 그래서 이번 미사때 절 만나러 오겠다 하던가요?”
“성녀님을 찾으러 급히 나가는 길이었기에 확답을 듣진 못했지만, 표정을 기억하건데 반드시 올 거라 생각됩니다.”
벨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귀를 간질이는 고운 웃음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그래요? 다음 미사가 기대 되네요. 미사가 끝난 후 자리를 마련해 줘요. 그 신자를 직접 만나 봐야 겠으니까.”
*
연회 이틀 전. 양파 껍질 벗기기 마스터를 단 나는 그릭 아저씨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양파냄새를 부상으로 얻었다. 내가 지나가면 주위 사람들이 코를 막으며 한 번씩 노려본다. 그러지 마세요, 해를 끼치진 않아요.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반이 지켜주고 있는 덕에 머슨은 다행이도 큰 사고를 치진 않았다. 뭐, 머슨을 보고 하루에도 열 댓명의 사람들이 상사병을 앓고 가는 불상사는 빼고 말이다.
“머슨, 일은 이제 적응 돼?”
“난 그냥 서있기만 해.”
오, 얼굴 간판. 역시 외모가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구나, 난 손 끝 다 망가트려 가면서 눈물콧물 질질 짜고 양파껍질이나 벗기는데 말이다.
“에리나 나랑 바꿀까?”
“그게 마음대로 되냐. 그리고 양파 껍질 아무나 까는 거 아니야. 다 요령이 있어야 한다고.”
“아니면 양파 껍질 까는 마도구 라도…”
“스읍- 또 마법쓰지?”
머슨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밴드로 둘둘 감긴 내 손끝을 계속해서 만지작 대더니 입에 가져다 대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다.
“차라리 내가 했으면 좋겠어.”
“아냐, 난 내가 하는 게 더 나았다고 봐.”
머슨의 시선이 내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계속 마음이 쓰이는지 한숨을 푹푹 내쉰다. 난 잡혀 있는 손을 힘주어 뿌리치고 그의 머리를 끌어 당겨 가슴으로 안았다.
“난 원래 자취를… 아니, 혼자 요리도 했었고 우리 세자인에 있었을 때도 내가 척척 밥도 잘 만들었잖아. 그래서 이런 양파 껍질 까는 것 쯤이야 우스워. 머슨은 힘은 세지만 오히려 이런 건 더 어려 울 수 있어. 안 해봤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는 사람이 봤다면 양파껍질 하나로 유난이란 유난은 다 떤다고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 둘 사이에선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머슨이 불편하게 허리를 푹 숙인 채로 안겨있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에리나는 괜찮다고 말 할 거 알아.”
세상에, 이 자식 눈치 좀 늘었네?
고개를 들어올린 머슨의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하다. 그러나 머슨의 기분을 풀어 주기도 전에 나는 또 안 좋은 소리를 해야 했다. 잠시 그의 눈치를 보며 말 할 타이밍을 잡다가 적막으로 공기가 차게 식어갈 즈음 입을 열었다.
“머슨, 나 내일 어디 좀 다녀 올 때가 있어”
“같이…”
“안 돼. 어허 표정 풀어.”
머슨이 내 어깨를 부여잡고, 성이 난 아이처럼 잔뜩 얼굴을 구겼다.
“수도는 위험해”
“위험하지 않은 곳에 가는거야.”
바로 세르데벨라 르네가 있는 신전에. 수도에서 시간을 보낸지 어느새 일주일이 넘었고, 지난 번에 신전 앞에서 만난 사제님이 이야기 해 준 데로 내일은 미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얼굴을 익히게 만들고, 기회가 된다면 머슨에 대해 대화를 해 볼 작정이다. 책의 흐름대로 라면 현제는 머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 자신의 살해당한 오빠로 인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그의 기억에 관해서. 혹시라도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도와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대뜸 당사자인 머슨이 나타나면 성녀도 몹시 당황하고 그 사이에 껴있는 나도 상황정리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혼자 가는 게 당연히 나았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머슨. 늦지 않아.”
“조용히 뒤에 서있기만 할게.”
“안 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게”
“그래도 안 돼”
“숨소리도 내지 않을 게”
계속해서 사정하는 머슨을 두고 단호하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흔들리려는 마음을 부여잡고 눈을 꼬옥 감고 크게 소리쳤다.
“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난 어엿한 성인이고 걱정시킬 일 따위 만들지 않아.”
머슨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터덜 터덜 걷더니 나를 지나쳐 침대위로 철푸덕 힘없이 내려앉았다. 내가 그의 옆에 앉자 머슨이 몸을 슬쩍 돌린다.
“삐쳤어?”
머슨은 대꾸하지 않고 아예 누워 버리 더니 이불을 머리 끝까지 둘러쓰곤 요지부동이다. 불러도 대답해주지 않고 불편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것을 정확하게 전달받은 나는 가볍게 머슨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역시 반응이 없다.
“미안해, 그런데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래.”
“...”
이 외에도 여러 말을 건냈지만 효과가 없었다. 삐쳐도 단단히 삐친 것이 틀림없다. 같이 가게 하는 걸 허락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난 이불위로 등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토닥였다.
“피곤해? 먼저 잘래?”
“...”
불 끌게. 커튼이 닫힌 창문에 의해 방 안이 온동 어둠으로 가득 들어찼다. 난 감각만으로 침대를 찾아 올라 그의 옆에 누워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머슨은 뿌리치지도 내 손을 마주 잡지도 않는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씁쓸해 지는 마음을 뒤로 하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질 않아 한참을 잡생각에 허덕이는 대도 머슨은 그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 오도록 나를 안아 주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역대급 삐친 머슨
에리나 : (안절부절)
*독자님 : 에리나 너무 구르는거 아니에여? 서브남주 없어여?
작가 : (동공지진) 황제 크리헬이 서브남주와 비슷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벨라에게 아주 푸우우욱~빠진 상태죠.
*독자님 : 머슨 얼굴 왜 평범하게 안바꾸나영?!
작가 : 얼굴을 바꾸는 것도 일종의 마법인데 그것을 유지하는 시간 만큼 마력이 소모됩니다. 뭐, 지존짱간zi 머슨에게는 식은죽먹기 겠지만 에리나가 한사코 반대하죠
*독자님 : 오늘의 감상일기. 머슨이 다 조져줬으면 좋겠댜.
작가 : 조짐 당하실 분들이 알아서 자리깔고 눕습니다. 두구두구두구
*〈읽지 않으셔도 되는, 작품과는 전혀 무관한 작가의 사담중의 사담〉
괜히 생각나서 끄적여봅니다.ㅋ_ㅋ
지난 화의 댓글 중.
독자님 : 작까님 개몽총..ㅎ 양파는 어니언인데여?ㅎㅎㅎ
(작가 멘붕 카오스, 수치플).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작가의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친구 : 그런데도 꾸준하게 추천수랑 코멘트가 달리는 게 신기하다.
작가 : 이거시 바로 나와 독자님들의 끈끈한 유대!! 〉〈어니언도 갈릭도 막을순없어!
친구 : 유대 ㄴㄴ 너 글쓰라고 조련 ㅇㅇ
작가 : 왜곡하지마8ㅅ8!
*어니언을 지적해주신 독자님 감사합니다. ㅋ_ㅋ...아직도 부끄러워서 이불뻥뻥차는 유리멘탈 작가. 봐도 못 본척 해주신 독자님들도 감사합니닼ㅋ.......(엉엉)
*선작,추천,코멘트 감사합니다〉〈!!
*쿠폰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