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편
<-- 8. 이건 잠입인가요? 취업인가요? -->
에반이 주근깨가 드리워진 콧잔등을 찡긋 거리며 헤실 웃었다. 완전히 신용하기에는 대화를 나눈 시간이 너무도 짧아 경계가 되었지만, 뭐 알아서 가이드도 해준다는데 이걸 또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 사람들을 굳이 외모로써 나눈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뻔하지. 귀족들이란 인간 중에서도 지독하게 미를 추구하는 족속들이라고. 반반한 시종들은 연회장에서 직접 일을 하게 되고, 아닌 시종들은 귀족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하겠지.”
“이러나 저러나 싫네”
“우린 저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장식품인 거지.”
“엿 같은 신분제”
에반이 “히익!”소리를 내며 나를 툭 밀쳤다. 그리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행이 우리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에게 작게 이야기했다.
“방금 그거 역모에 해당되는 거 알아? 말 한마디 잘 못 하면 단두대에 서게 된다고.”
나는 괜히 내 목을 만지작 거렸다. 아직 잘 붙어 있지?
“...민주주의 만세”
“쉿! 쉿!”
요란법석을 떨며 에반이 자신의 입에 검지를 대었다. 내가 봤을 땐 너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눈치 못 챌 거야.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에반과의 대화도 깊어져 갔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시종이 갖추어야 할 예의에 관한 것도 들을 수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어때야 하고, 말투는 어때야 하고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중요한건 단 하나였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 척 . 생각과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있으면 돼.”
“그거 쉽네.”
“아니, 에리나는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도 좋을 자리에 있는게 나을 것 같아.”
머슨이 대뜸 끼어들더니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어째서?”
지금 나 개무시 하는거 맞지? 그렇지? 머슨의 손이 내려오더니 엄지가 내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잔뜩 힘이 들어가있던 얼굴이 놀랍게도 편안해진다.
“남들 앞에서 감정 없이 서 있는 건 내가 하고 싶어.”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머슨은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옆에서 누가 죽어가더라도 편안하게 모닝 커피를 한잔 마실 수 있는 의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머슨의 적성에는 그런 일이 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정한다고 될 일이 아냐.”
“알아. 그냥 에리나가 굳이 그런 상황에 끼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높게 뻗어 머슨의 뺨을 어루만졌다. 머슨이 고개를 살짝 내민 상태로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린다.
“걱정 마.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 질라 치면 그림자처럼 빠져 나올 테니까.”
“응”
머슨의 적안은 이 세상에 존재 하는게 나 뿐인 듯 오로지 내 얼굴만 담겨 있었다. 사랑이 줄줄 흘러넘치는 눈빛으로 진득한 시선을 보내오니 새삼스럽게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돌았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았다.
‘짝 짝 짝’
등 뒤에서 들리는 박수에 감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에반이 반은 놀란, 반은 흥미있다는 얼굴로 우리를 향해 손바닥을 부딪히고 있었다.
“너네 진짜 사랑해서 결혼 한 게 맞구나?!”
...너 지금 까지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니?
확 그를 다시 한번 매섭게 바라보자 그가 또 다시 사과한다. 벌써 3번째 사과이다.
또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에반에게 궂은소리를 하고 있는데, 별관 문이 열리며 게르니아와 그의 시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부에 호명하는 이들은 왼쪽,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리에 남아 있도록”
늦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기대 한건 아니었지만,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뻔뻔하게 명령해오는 모습을 보니 심경이 뒤틀린다. 어우 재수없어.
나와 머슨 그리고 에반의 이름이 줄줄이 호명 되었고,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게르니아가 마지막 품질검사를 하는 듯 다시 한번 사람들의 얼굴을 주욱 훑어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하는 것처럼 우리도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고 차렷자세로 서있었다. 올라간 눈꼬리를 가늘게 뜨며 주의깊게 얼굴들을 살펴보던 게르니아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머슨의 앞에서.
시리고 두터운 빙벽같은 게르니아의 눈동자가 사르르 녹는다. 그녀가 보기 드물게 당황해하며 머슨 앞에서 자신의 안경을 자꾸만 고쳐 쓴다.
“누, 누구지?”
머슨은 대답 대신 게르니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자기 딴에는 파닥파닥 혼신의 힘을 다해 날개짓을 하지만, 보기엔 아주 느린 속도로 비행하고 있는 날파리를 보는 듯 특별한 의미도 흥미도 없는 시선이었다.
“머슨 홀든 입니다!”
큰 소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내가 서둘러 대답했다. 게르니아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 지며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린다.
“너한테 물어 본게 아닐텐데?”
어우 이 언니 성깔 한번 장난 아니시네. 게르니아가 노골적으로 눈을 위 아래로 움직여가며 나를 살폈다. 그리곤 아- 하는 소리를 작게 터뜨렸다.
“천으로 얼굴을 둘둘 감싸던 아이군. 그래서 내가 못 알아 본거야. 둘이 부부라고 했었지 아마?”
“네, 3년차.”
신혼! 열렬히 사랑할 때! 그러니까 머슨은 건들지 마! 게르니아가 잠시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툭툭 치더니 이내 그것을 쭉 뻗어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너, 다시 넘어가.”
“네?”
게르니아는 긴말 할 것 없이 시종들을 시켜 나의 양 팔을 붙잡게 했다. 내가 놀라 발버둥 치자 머슨의 힘줄이 우뚝 선 팔목이 들어나며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난 재빨리 그의 이름을 불렀다.
“머슨! 잠깐!”
그가 움찔 몸을 떨며 시종의 얼굴을 날려버리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귀족의 자택에서 가문에 소속된 시종에게 폭력을 대놓고 휘둘렀다간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게르니아가 빤히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은 막아야했다. 내 옆에 서있던 에반도 나지막하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가, 갈게요. 제 두발로 걸어가요.”
“나도 갈래.”
“넌 안…”
“머슨 홀든은 이 곳에 남는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게르니아가 명령했다. 그러나 머슨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내 옆으로 찰싹 붙어왔다.
“머슨, 넌 여기 있어”
“싫어.”
“말 들어.”
그의 양 어깨를 잡고 내쪽으로 당겼다. 내가 얼굴 앞으로 작게 손짓하자 척 하면 척 알아듣는 머슨이 귀를 내어준다.
“잊었어? 우리의 목표는 체닌을 찾는 거야. 넌 연회가 시작되는 홀을 중심으로, 나는 외곽을 중심으로 찾는 게 더 나아. 체닌만 찾으면 연회를 다 볼 필요도 없이 떠나는 거야. 알았지?”
머슨은 내 설명에도 여전히 불만가득한 표정이다. 난 그의 목을 끌어 당겨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할 수 있지, 머슨?”
“...응”
그를 놓아 주고 에반을 지나치며 그에게 한마디 툭 건냈다.
“남편좀 잘 부탁해.”
“아들인지, 남편인지…”
말하면서 에반이 쿡쿡 웃는다. 너 4번째 사과 해야 할 타이밍 아니니?
내가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로 옮겨 가자 마자, 우리들은 한 시종의 안내에 따라 무려 본관으로 들어가게 됐다. 무슨 입구가 세자인의 우리 집보다도 한참이나 크다. 상아색의 기둥하나에도 멋들어진 조각들이 파여 있어 신경을 쓴 태가 난다. 복도에 걸려진 멋들어진 초상화를 보니 꼭 옛날 시대극 영화의 세트장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환상도 잠시.
“넌 여기다.”
던져지 듯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들어 갔다.
‘딸깍’
등이 켜지자, 주변에 보이는 환경에 잠시 안도했다. 나 말고도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시각적인 것 보다도 코를 확 쏘는 냄새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이번에 일손으로 온 애가 아가씨야? 그런데, 이거 힘이나 쓰겠어?”
손 등위에도 털이 수북하게 난 아저씨가 걸걸하게 웃었다. 나름 말끔하게 차려입은 흰색 조리복… 이라고 하고 싶었으나, 소매 끝과 튀어나온 배 부분에 누런 자국이 나있다.
“이게 다 뭐죠?”
“뭐긴 뭐야. 양파지. 처음 봐?”
“아뇨, 그게 아니라 이건…”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문이 있는 한 쪽 면을 제외하고 삼 면을 가득 양파가 채워져있었다. 넓직한 볼 위에 껍질이 벗겨진 매끈한 양파가 넘치도록 담겨 있었고, 그것 보다 배는 많은 새 양파들이 어서 자신을 까달라고 아우성 대고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그곳엔 양파껍질 침대라고 해도 될 만큼 그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비츠 백작가가 사실은 양파로 수익을 올리나요?”
“하하하! 아니야. 연회에 쓸 것들이지. 3일동안 이어질 연회에 이 정도 양은 우습지. 온 나라의 귀족들이 다 몰려 올거라고. 자, 왔으니 일을 배워야지. 양파 까본 적은 있나?”
하, 나를 뭘 로 보고. 이래 뵈도 자취 4년차다. 양파 한 번 까보질 않았을까? 난 조금은 생소한 묵직하고 날이 두꺼운 칼을 받아 들었다. 사용의 흔적이 있는지 여기저기 기스가 나고 나무 모양의 손잡이가 갈라져 있어 잘 못하면 튀어나온 가시에 손이 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에 양파를 감싸 니라 사용 되었던 것 같은 천들이 굴러다니자 그것을 냉큼 집어 길게 찢었다. 칼에 천을 감고 열심히 양파 껍질을 깠다. 아고 눈 매워.
“아가씨 잘 하는구만!”
“그럼요. 그런데, 여기 배치 된 게 저 혼자 뿐인가요?”
“원래는 남자 셋을 보내 준다고 했는데, 나도 아가씨 혼자 덜컥 와서 좀 당황하고 있는 참이네.”
난 들고 있던 칼과 양파를 쥔 채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농담 아니죠?”
“나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네.”
당했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열심히 양파를 깠다. 아저씨는 내 솜씨를 보고 칭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그릭이라 소개하며, 일자리가 없을 때 반드시 연락하라고 당부까지 해주었다. 양파 까는 데에 엄청난 소질 있다며 제자로 받아 드리고 싶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하, 나 진짜. 이거 완전 적성인데?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그릭아저씨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열심히 양파를 깠다. 눈 밑이 너무 매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계속 되는 칭찬에 차마 손이 쉬지 못했다. 일이 다 끝났을 땐 내 손을 거쳐 뽀얗게 거듭난 깐 양파들이 광을 내고 있었다. 음 뿌듯하다 뿌듯해. 그러나 이것은 고작 삼 면을 가득 채운 양파들 중 한 쪽 면 첫 번째 줄의 양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급하게 올리고 사라집니다! 확인 전이라 오타 많을거예여 ㅠㅠ
*양파...는..어니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것만 수정하고 바로 사라지는 쟉가)
*에리나 : 나 빙의 됐는데 왜 능력이 하나도 없냐! 스텟 똥망인 캐릭터로 빙의라니! 너무하다 너무해!
작가 : 너에게 양파까는 능력을 주겠다.
*예약아이템으로 이 글을 올리는 시간 오후7시 55분까지의 독자님들 코멘트
*독자님 : 머슨이 이렇게 지적인 애였나요?
작가 : 머슨으로 산 세월보다 마왕의로 산 세월이 넘사벽으로 깁니다.
(머슨의 단조로운 대사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젓는다.)
*독자님 : 600골드면 너무 헐값아닌가여?!
작가 : 맞습니다. 딱히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에리나 시점에서 쓰는거라 언급은 되지 않았지만 상점주인이 에리나와 머슨을 등쳐먹은겁니다.
*독자님 : 자까님.. 발..ㄱ가 그 발..ㄱ는 아니겠져?
작가 : (동공지진) 에리나가 발정 할 순 있어도... 발기 할순...
*독자님 : 머슨이 지난 2년동안 겪은 세자인 고난기에 대해 외전을 파주실 순 없나요?
작가 : 고민해봅니다.(진지) (쓸게 아직 많은데 더 늘리지 말라는 자아와의 싸움)투닥투닥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쿠폰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