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편
<-- 8. 이건 잠입인가요? 취업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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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달이 청초한 호수 위를 비췄다. 흔한 조각상 하나 없이 돌무더기에 둘러 쌓인 재미없는 모양새의 호수였지만, 황제 크리헬은 황성 어느곳 보다 이 적적한 호수가 있는 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꾸밈 없이 물위의 달만을 고요하게 품은 채 일렁이는 모습이, 지진 하루를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폐하”
오늘처럼 만월이 비추는 밤과 어울리는 미성의 목소리였다. 오롯하게 자신만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곳에 타인의 인기척이 들렸으나 크리헬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다.
“벨라”
성녀 세르데벨라가 하얀 후드를 내리며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크리헬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작은 돌 위에 얹어주자 벨라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위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또 도망인가요?”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도 성녀 세르데벨라 앞에선 존칭을 사용했다. 그녀는 인간 세상의 법률에 귀속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말을 전하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수도 있는 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성녀 세르데벨라였다.
벨라는 매혹적이게 붉고 반짝 빛이 나는 입술을 움직여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들으면, 사춘기 소녀 인줄 알겠어요.”
“신전의 사제들이 매일 황성 앞을 기웃거려요. 성녀님이 또 황성에 숨어 들어갔나 싶어서.”
“배짱 있게 들어오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수고스러운 짓을 하는지 몰라요”
“성녀님이 얌전히 신전에 계셨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죠.”
“지금 사제님들 편을 드시는 건가요?”
벨라가 장난기 어린 소리로 뾰루퉁하게 물었다. 크리헬이 가슴께로 흘러 내려온 벨라의 금발을 쥐어 코언저리로 가지고 왔다.
“글쎄요.”
“변하셨네요, 폐하. 제가 이곳에 자주 와서 소중함을 모르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행여나 발길을 줄이겠다는 말이면 당장 거둬요”
크리헬의 호수 만큼이나 맑고 선한 눈동자가 벨라를 향했다. 그러나 내뱉는 말과 다르게 그 눈동자 속에는 깊은 집착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가볍게 건내는 인사치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가 벨라를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그저 크리헬의 성격이다.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모두에게 평등하기 위하여 도를 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한 것. 사랑에 미쳐 날뛰는 모습 같은 건 크리헬에게선 절대로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벨라는 이토록 선하고 바른 황제 크리헬이 자신에게 미쳐 열렬하게 구애하는 모습을 바랐다. 때문에 이런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는다. 작은 욕망같은 건 가볍게 눌러버린 채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무결한 성녀로서 이야기를 한다.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일주일 후에 아비츠 백작가의 연회에 참석 하셔요.”
“아, 연회장은 받았어요.”
“그러나 가지 않겠다는 말씀이신 가요?”
“성녀님도 알다시피, 요즘 나라 내부에서 흑마법이 다시 성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반란이 될 우려가 크고요. 진위파악이 되기 전까지 모든 연회는 참석하지 않기로 했어요.”
흑마법. 시전자가 자신의 고유 마력을 통해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을 재물로 하여 시전되는 마법이다. 대표적인 재료가 바로 인간의 피이다. 마력을 담는 마구에 피를 흡수시켜 저장한 다음 흑마법을 부릴 때 마다 그것이 소모되게 만든다. 얼핏 보면 일반 마법과 별 차이가 없으나, 어느정도 클래스가 높은 마법사들은 알 수 있었다. 발동되는 마법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마력인지 아니면 비릿한 피 향 인지. 크레힐이 태어나기도 전인 수 십년 전. 한 마을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모든 사람이 죽어나갔다. 신의 분노라 생각 하고 주변 마을에선 매일 같이 신전에 들려 기도를 올렸지만 그것은 신의 분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한 무차별한 희생의 산물이었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하여 가죽이 눌러붙어 있었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겨진 채로 길 위에 버려진 것이다. 바로 마력이 없는 자들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그들의 피를 앗아간 것. 그제 서야 황실은 흑마법의 위험성을 깨닫고 전면 금지시켰다. 고위 황실마법사들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는 자가 있으면 단두대에 올렸고, 그들의 머리를 나라 곳곳에 메달아 경고를 주었다. 몰상식하긴 하나 공포로 교육한 것은 효과가 있었다. 크레힐이 즉위한 직후에도 개인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흑마법을 사용 한 사례 외에는 흑마법 단체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었다.
“흑마법이요? 자신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자들 이겠군요”
“사실이라면 선처는 없을 거예요. 그토록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어요.”
과연 성군. 어쩌면 성녀인 벨라 자신보다도 그가 신전에 있어야 할 재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곧았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감히 반발 할 수 없을정도로 탄탄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난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소위 폭군이라 불리던 자들은 흑마법을 전면 금지시킴에도 필히 자신만은 허용하는 모순적인 법안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너무 염려말아요 폐하. 제가 폐하의 편이 되어 드릴게요.”
“궂은일은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가끔 호숫가로 나와 주기만 해도 돼요”
크레힐의 손끝이 벨라의 흰 뺨에 닿았다. 힘을주어 누르지는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어 내려간다. 찬 손에 비해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벨라가 크레힐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아비츠 백작은 제가 아끼는 사람이예요. 누구보다 폐하를 따르는 충신이기도 하고요. 폐하를 위한 연회인데 폐하께서 자리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서운해 할까요”
“셰얼린 후작가의 반역을 잡아 낸 것은 새 영지를 받아 마땅하죠.”
“그래요. 다 아비츠 백작이 밤새 폐하를 생각하기에 일구어낸 성과죠. 그러니, 방문해 줘요.”
“...성녀님이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고민해 볼게요.”
벨라가 환한 웃음을 띄었다. 그것이 얼마나 싱그럽던지 여름이 다 지나가 꽃들이 땅속에 숨을 준비를 하는 데도 주변이 화사하게 빛을 내었다. 그 미소에 크리헬은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고마워요.”
확실하게 간다 이야기 하진 않았으나 벨라는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감사의 인사까지 해버린다. 크리헬은 더 이상 그녀의 기쁨을 막는 짓 따윈 하지 않았다. 소녀처럼 순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한폭의 아름다운 명화처럼 보였다. 이 것에 애꿎은 먹물을 튀게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 할 줄 알고,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다른길을 택해 걷고 있는 데도 수더분 하며 인간적이고 누구보다 밝은 기운을 내뿜는 그녀가 좋았다. 마냥 헤프지도 않고, 성녀의 권위와 품격은 유지하되 모든 이를 포용해주는 따뜻한 품이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지금처럼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을 해 올 때도 있지만 그 의도가 불순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크리헬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강하게 거절 할 수 없었다.
“케일도 같이 가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
크리헬의 온기가득한 표정이 순식간에 식었다.
“케일을 봤거든요.”
마왕 케일하르츠. 누구도 그를 정답게 ‘케일’ 이라 부르지 못 한다 신마저도. 그러나 이 여자만큼은 달랐다. 어렸을 적 같이 뛰놀던 소꿉친구를 부르듯 그녀의 입에는 너무나도 쉽게 그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것도 성녀의 입에서 마왕의 애칭이.
“...괜찮나요?”
2년전 그녀의 오빠가 마왕에 의해 살해당했다.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통탄에 빠져, 그리 좋아하는 신전 밖 나들이도 가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럴리가요. 나중에 만나면 뺨을 세게 쳐올려주려 했어요. 정강이를 걷어 차던가… 그런거요. 복수랍시고 우습죠?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딱 거기까지예요. 누가 감히 마왕을 건드려요, 안그래요?”
그리 말하면서도 마왕에 대해 아주 잘 안다는 듯, 자신은 그가 전혀 어렵지 않다는 듯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요. 오랜만에 보는데 괜히 눈물이 터져나오고, 바보 같이 그리웠더라고요. 그가. 분노 때문에 그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리워서 였더라고요.”
벨라의 목소리에 물기가 여렸다. 크리헬은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그 마음은 날카로운 흉기로 거칠게 난도질 당해 갈기갈기 찢겨가고 있었다. 피가 흐르고 온 몸을 적실정도로 아팠지만 애써 덤덤한 척 가만히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딱, 폐하께서 연례행진을 하기 하루 전 날이었어요. 폐하가 돌아다니실 것 같은 길목을 둘러보고 있는데, 사제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찾아 냈더라구요. 놀라 소리치는데 그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의 시선이 절 향해 있지 않았어요.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그 여자에게 메여있는 것처럼… 여자를 바라보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