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편
<-- 8. 이건 잠입인가요? 취업인가요? -->
몇 번의 골목을 빠져 나오고, 몇 번의 대로변을 지나니 광장에서 멀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적이 드물어지고 자갈이 깔린 외통길이 나왔다. 바스락. 신발 밑창에 자갈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꽤 걸었다 싶을 즈음에 시야가 뻥 뚫리며 번잡한 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길을 걸어온 듯 너무 급작스러운 변화였다. 다양하게 채색된 고층 건물들이 빼곡하게 지어져있고 그 사이로 길이 트여 있었는데 그 곳에는 물감을 덕지덕지 묻힌 화가나 거리의 악사들이 한 자리씩 잡고 저마다의 퍼포먼스적 행위예술을 표하고 있었다.
“여기 최고다.”
이 책 속으로 떨어진지 2년 만에, 처음으로 여행을 온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너무도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과 특색 있는 건물, 신기한 가게들이 단번에 눈을 사로 잡았다.
“에리나의 그런 표정 처음 봐”
“머슨, 나 관광객이 된 기분이야.”
“트렌시아가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긴 하지.”
그렇구나! 여유만 있었다면 이 곳을 샅샅이 둘러보고 두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아비츠 백작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나는 폭발 할 듯 가슴 뛰는 호기심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구경할까?”
“아니! 가자.”
설득 하지마! 나 바로 넘어가니까. 내 바람이 머슨에게도 닿았는지, 머슨은 더 이상 나에게 권하지 않고 다시 길을 따라 나섰다. 어지러울 정도로 거리를 채웠던 건물이 사라지고 녹음을 머금은 잔디가 보였다. 그 사이로 상아색 길이 터있었는데 길을 따라 쭈욱 시선을 옮기니 거대한 저택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청 잘 사나보다. 체닌이 촌장님 댁네 자기방을 보고 기겁했던 이유가 2할 정도 공감이 갔다.
“저기지?”
“응”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병사들이 철통 같이 저택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저 곳으로 들어가진 않을테니 누군가 이 저택에서 나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체닌이기를. 나와 머슨은 저택 앞에 구부정하게 이어진 길에 들어가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저택을 감시했다.
“머슨, 잠복수사의 시작이야.”
“잠복수사?”
“숨어서 지켜보는 거”
체닌이 나온다 싶으면 은밀하게 그 뒤를 쫓아 미행 한 뒤 접선을 한다.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지 않다 싶으면 머슨이 출동하여 마법으로 체닌을 기절 시킨 후 세자인으로 재빠르게 튀면 되는 것이다. “당신과는 도저히 못 살겠어요. 우리 이혼해요!" 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아비츠 백작가에 날리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이런 우스운 방법으로 이혼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비츠 백작이 부인이 사라졌다며 신고를 하게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꿀꺽- 마른 침이 넘어갔다. 막상 일을 행하려니 몸에 긴장감이 돌았다. 유명한 첩보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알 수 없는 사명감이 몸 속에서 끓어 넘쳤다! --
“에리나,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몸을 숨긴 이유가 없지 않을까?”
아뿔사.
너무 의욕이 넘친 탓에 고개를 빼놓고 있었다. 크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머슨에게 가벼운 실수를 보여 버렸다.
“너무 긴장하지마. 내가 있잖아.”
머슨이 뒤에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데워진 몸의 열기가 등 뒤로 피어오른다.
“머슨 우리가 이렇게 부둥켜 안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깨를 움직이며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머슨은 내 목에 얼굴을 파묻고 “으음-” 거리며 오히려 힘을 주어 나를 안았다.
“에리나와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몇 년을 기다려도 좋아.”
“...순전히 네 생각 아닐까...?”
나도, 세자인의 마을 사람들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머슨의 말이 발화점이 되었는지, 하루 반나절을 그 앞에 서있었건만 체닌의 뒷꽁무니도 우리는 구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첫날에 아비츠 백작 가문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선 나름 만족하며 발길을 돌렸다.
여관에 다 와갈 때 즈음 내가 걸음을 우뚝 멈추자 머슨이 곧 바로 내 옆에 섰다.
“머슨, 먼저 들어가 있을래?”
“아니”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이렇게 완고하고 빠르게 튀어나올줄은 몰랐다.
“오늘 많이 걸었잖아 들어가서 먼저 쉬고 있어”
“에리나가 옆에 없는게 더 힘들어”
역시 통하지 않을 줄 알았다. 난 억지로 그의 등을 밀어 여관 문 안으로 넣었다.
“가라면 좀 가라”
“어디가는데?”
신전! 성녀 만나러! 라고 대놓고 이야기 할 순 없으니 대충 부끄러운 척을 하며 상황을 넘기려 시도했다.
“이, 있어. 여자의 그런 것”
있기는 개뿔
“생리해?”
실패다. 머슨 앞에서 방귀뀌는 모습도 서슴지 않게 보여주던 내가 이제 와서 생리로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효과가 있을리 만무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혹시 에리나 내 아이를 가졌어?”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먹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에 목소리가 커졌다. 정수리 끝까지 열이 확 달아오르고 진심으로 부끄러워졌다. 헛소리 말라며 그의 등을 퍽 퍽 때려 여관 안으로 억지로 들어가게 했다. 문 밖에 혼자 서서는 한동안이나 식지 않은 뺨의 열기를 달래야만 했다.
신전의 위치는 소설책에 자세히 묘사 되어 있었으므로 찾기에 수월했다. 시계탑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나있는 길을 쭈욱 걷다보면 신전이 보인다. 정말이었다. 흰색 종탑과 수많은 천사들의 석탑이 세워져 있었다. 신전으로 통하는 까마득하게 높은 계단을 올려다 보았다. 성녀의 몸이 가녀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려면 없던 살도 빠지겠다.
큰 마음을 먹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차고, 무릎이 저려왔지만 한 칸만 더 오르자, 한 칸만 더! 라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올라왔다.
“하… 죽겠네”
겨우 끝까지 올라 굽었던 허리를 폈다. 거대한 흰색 문 앞에 서있자니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음… 그래도 남의 집에 왔으니 노크는 해야겠지
‘똑 똑 똑’
문에 비하면 내 손은 거대한 호수에 살짝 발을 담군 개미 다리 수준이었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굳게 닫힌 문은 열릴줄을 몰랐다. 너무 늦게 왔나?
‘쿠궁-’
갑자기 움직이는 문에 몇 발자국 뒤로 발을 떼었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연세 지긋하신 사제님이 총총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러나 사제님은 나를 반기기위해서 문을 열고 나온 게 아니였다. 내가 인사하지 않았더라면 나를 그냥 지나치고 계단을 내려갈 터였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지 기다란 사제복을 입고서도 다리를 급하게 움직였다.
“오늘 미사는 끝이 났습니다. 내일… 아니, 일주일 뒤에 오세요.”
“일주일이요? 전 성녀님을 만나 뵙고자…”
“신도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아무나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겠지.
“일주일 뒤에는 뵐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짧게 대답하곤 그가 제멋대로 나에게 인사하더니 휭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난 아직 말 안끝났는데. 조심스럽지 못한 발걸음에 행여나 굴러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는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사제는 여느 소설에 나올법한 무림고수처럼 잽싸게 계단 끝을 향해 가고있었다.
"...일주일 뒤라"
굳게 닫힌 신전문은 다시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난 그 사제님 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헛걸음의 연속이네”
그러나 이 말을 하루에 한 번씩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매일 매일이 헛걸음의 연속이었다! 성녀는 둘째 치고 바로 체닌이 그러했다. 아비츠 백작가 문 앞에서 나와 머슨이 확인 한 것이라곤 사병들의 하품 횟수 정도 였다! 그것이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지나자 들끓었던 사명감이 낭패로 바뀌고, 애꿎은 분노가 들어찼다.
“아니, 체닌 그년은 뭘 하길래 집 밖을 안 나와?!”
‘빠악!’
답답함에 혼신의 힘을 다해 벽을 내리쳤다. 데미지를 입은 건 온전히 내 손뿐이었다. 아얏 아파라. 머슨이 놀라 내 손을 부여 잡으며 호- 호- 입바람을 불어준다.
“집이 너무 넓어서 하루 온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밖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은 낼 수 있겠다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 납치범의 마음도 좀 생각해 줘야지!”
“그건 맞아.”
“한 번 사는 인생! 머리채 잡고 확 끌고 나올까?!”
“내가 할게.”
“아냐, 넌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나한테 맡겨. 한 번 잡아봐서 감이 좀 있으니까.”
“에리나를 믿어"
진즉에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머슨은 아직까지도 내 손을 부여잡고 손가락 사이 사이를 쓸어내고 있었다. 결의에 찬 나는 생각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머슨에게 잡힌 손을 떼어낸 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에리나?”
“가자”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고향친구라고 둘러대고 신분증 달라 하면 촌에 살아 서울말 모르는 척 바보흉내라도 내는 거지 뭐!
내가 당당하게 사병들 앞에 두 발을 넓게 벌려 딛고 섰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 이제 네 놈들은 들고 있는 창으로 나를 가로막은 뒤 한 뒤 누구냐?! 라고 묻겠지.
“늦었다. 어서 들어와라”
아니네?
창을 들어 막기는커녕 오히려 문을 열어준다. 난 두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머리정리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있자 병사가 재촉한다.
“이번 파티에 고용할 시종직에 지원 하려고 온 게 아닌가?”
시종?
“크게 열리는 파티라 일손이 모자라 일반 서민들도 고용 한다만은, 저택의 크기에 놀라 꼼짝 못하는 걸 보면 파티에서 일하긴 힘들 것 같다.”
상황파악은 덜 되었지만, 나를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저 메이드 하녀 이런 게 취향이라 꼭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머슨?”
“...”
“감격해서 말도 안 나온다고? 그래, 일단 들어가보자. 하하하!”
병사들의 마음이 바뀔까 얼른 머슨의 팔을 끌고 철문 안으로 발을 옮겼다. 나와 머슨은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빨리 가보라며 등을 떠밀리기도 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아무 사건도 작은 분란도 없이 너무나도 쉽게 아비츠 백작 저택으로 들어와 버렸다.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 몸이 떨렸다. 그러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일부러 당당한 척 걸었다.
“에리나, 같은 손 같은 발이야.”
========== 작품 후기 ==========
*날씨가 미쳤습니다. 손을 주머니속에서 꺼내고 스마트폰을 만지는데 떨어져 나가는줄 알았어요. 독자님들 감기조심하세여8ㅅ8
*독자님 : 이 소설이 저의 낙이되었어여!
작가 : 독자님의 코멘트가 제 낙입니다 〉〈
*독자님 : 머슨 저도 키우고싶습니다(간절)
작가 : 저는 어떠실련지?(애교를 부린다)
*독자님 : 에리나에게 서브남이 등장하나요?
작가 : 그렇습니다! 그런데 서, 서브남이라고 해야하나?(고민하는 작가)
*번외편을 이어서 하는게 좋다는 의견이 많았으므로 이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작,추천,코멘트 감사합니다〉〈
*원고료쿠폰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독자님들을 오타내서 독잔미들이 되어버린... (독자님들을 독장미 만들어버리려던 작가....)